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9) (9/268)

009. 재난물 장르에서 누군가 도망치라 조언할 땐, 순순히 도망가는 게 좋다.

실기 연수.

직접 멘토와 짝을 지어 던전에 들어갔다 나오는 코스.

게이트 사태 이후로 ‘던전’은 두 종류가 발생했다.

첫째는 랜덤 생성 게이트. 갑자기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 한가운데 등장하는 던전들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킬스크린(Kill Screen)’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탑. 이 탑은 지구의 게임화 이후에 생성되었다고 한다. 탑 안에 진입하면 각 층마다 특별 던전을 깰 수 있다고는 하는데, 게이트 발생 던전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아서 고위 각성자가 아니고서는 접근할 엄두도 못 냈다.

당연히, 연수용 던전은 난이도가 낮은 게이트 던전을 위주로 진행했다.

또한 만일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그중에서도 안전하고 효과적인 곳으로 특별히 선별한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곳이 ‘거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던전이다.

아무것도 없이 ‘거울’이라는 이름이 붙은 던전은 전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되었는데, 다른 던전과 달리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급수가 정해지지 않음.

그리고 클리어해도 사라지지 않음.

급수가 정해지지 않은 이유는, 진입하는 플레이어에 따라 급이 정해지는 ‘거울 던전’만의 특성 때문이다.

거울 던전에 입장하면 던전이 스스로 참가자의 특성을 분석한 뒤, 딱 참가자 혼자서도 쉽게 깰 수 있는 수준으로만 몬스터를 등장시켰다.

훈련용이나 테스트용으로 쓰기에 완벽한 특성.

그것 때문에 초기에는 일부러 시스템이 안배한 ‘튜토리얼’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다.

지금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도도 연수용, 훈련용이니……. 인간 기준으로서는 실질적인 튜토리얼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거울 던전이구나!”

다른 연수생들은 신기하다는 듯 입구 앞에서 삼삼오오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하빈은 혼자 미간을 찌푸렸다.

‘참여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던전이면…… 내가 들어가면 대체 뭐가 나온다는 거야?’

스탯 각각 21억, 등급은 듣도 보도 못한 X급, 랭킹은 -1위…….

이 등급에 걸맞은 몬스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오만이나 자의식 과잉이 아니다. 그저 걱정. 진심이 담긴 걱정. 순도100%의 싸한 느낌.

“기분 탓이지만…… 내가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뭔가 진짜 큰일이 생길 것 같다. 이건 센 척 따위가 아니라 찐으로 지금 당장 땡땡이쳐야 할 것 같음.”

“야, 넌 이 와중에도 땡땡이칠 생각부터 하냐?”

기다렸다는 듯이 채지석이 불쑥 나타났다.

실기는 안전을 위해 멘토와 짝을 지어 들어가는 걸 원칙으로 한다. 그러니 이 사람도 하빈과 함께 들어가야 한다.

‘이건 내 안전이 문제가 아니라 멘토의 안전이 문제인데.’

이걸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고.

잠깐 고민에 빠져 있던 하빈이 채지석에게 말을 던졌다.

“……그동안의 얄팍한 정이 있으니 조언하는 건데,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걸 추천.”

“무슨 도망?”

“난 미리 경고했다.”

제일 좋은 건 지금 하빈이 이 자리에서 빠져주는 거지만, 하필 이번 과정은 빠지면 재연수를 받아야 하는 필수 코스. 아쉽게도 땡땡이가 불가능했다.

심드렁하니 안내 책자를 보던 하빈이 행복회로를 돌렸다.

‘그래도 플레이어가 쉽게 깰 수 있을 정도로 나온다니까, 뭐, 별일이야 있겠어? 최대한 빨리 깨고 나와야지.’

* * *

“그럼 다음은 7조. 던전 참가자는 채지석, 현하빈. 두 명입니다.”

교관의 말에 연수생들이 술렁거렸다.

“채지석!”

“부럽다. 채지석이랑 같은 조라니. 보나 마나 버스 타겠지?”

동경과 질투가 담긴 시선이 하빈을 따라붙었다.

하지만 하빈은 다른 데에 신경이 팔려 있었다.

‘그동안 다들 길어야 1시간 안으로 클리어했나.’

앞서 2명씩 짝지어 거울 던전에 들어갔던 참가자들은 꽤 빠른 시간 내에 클리어하고 나왔다.

‘일찍 클리어하는 걸 보니 정말 쉬운 수준으로 나오나 보네. 좀 어렵게 나오더라도 SS급인 채지석 때문이라고 둘러대면 되겠지.’

극한으로 행복회로를 돌린 하빈이 안심하고 입장했다. 마침내 던전의 입구가 닫히고, 하빈과 지석 단둘이 던전 안에 남았을 때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참가자의 등급 확인 중……]

[오류 발생!!. 던전 한계치를 넘었습니다!!!]

[최%종ㅎᅟᅡᆨ인 등급! : SSS2S2SS2.....]

“…….”

“이거 뭐야? 등급이…… S가 왜 이렇게 많이…….”

마침 같은 창을 채지석도 본 모양이었다. 그가 천천히 하빈을 돌아볼 때였다.

[등급 산정 완료. 참가자의 수준에 맞는 몬스터를 소환합니다.]

[……‘이름 없는 창조물’이 대거 소환되었습니다!]

띠링띠링! 알림창이 경쾌하게 울렸다.

쿠구구구궁.

알림을 확인하자마자 지면이 거세게 흔들렸다. 던전 속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운 색으로 물들었다.

끼에에에에-

지평선 너머에서 구름 떼처럼 몰려오는 잿빛의 생물체들. 죄다 팔다리가 기괴하게 비틀린 모습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몬스터의 향연은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하빈이 짜증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튜토리얼 수준이라며. 한 번에 깰 정도로 나온다며.”

튜토리얼의 상태가……?

끼에에에엑-

둘을 발견한 몬스터들이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채지석이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현하빈, 물러서. 이 녀석들…….”

체력 게이지가 안 보여.

SS급 랭커답지 않은, 떨리는 목소리였다.

* * *

끼에에-

몬스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가늠이 안 되었다. 지평선 끝까지 덮은 검은 구름.

진짜로 ‘멸망’이 도래하면 이런 느낌일까. 꿀꺽 침을 삼킨 채지석이 입을 열었다.

“현하빈, 일단 너라도 던전을 나가서…….”

[던전을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알림창이 깜빡였다.

“그럴 리가……!”

원래 거울 던전은 참가자가 언제든 나갈 수 있어서 연수용으로 널리 쓰이는 것이었다. 클리어 전까지 나갈 수 없다니, 이건 간혹 생기는 SS급 특수 게이트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채지석은 비장한 얼굴로 무기를 틀어쥐었다. 금빛 단검이 그의 손에서 빛났다.

채지석의 직업은 ‘태양의 도둑’. 세상에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희귀 직업.

슈슉.

눈앞의 몬스터들에게 금빛 섬광이 쇄도했다. 그러나.

끼에에!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전혀 약해지지도, 속도가 줄어들지도 않은 몬스터 무리를 보며 채지석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진짜로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건가?’

엄밀히 말하면 채지석은 공격 특화 클래스는 아니었다. 암살자 클래스로 분류되기 때문에 전투보다는 민첩성과 은신, 더불어 정보 수집에 특화되어 있다.

전면전에서는 제힘을 온전히 발휘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랭커 반열에 들었을 정도로 공격력만큼은 어딜 가도 뒤지지 않았는데.

‘체력 게이지가 없어서 그런가?’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몬스터의 머리 위를 응시했다.

체력 게이지. 게임처럼, 상대를 쓰러뜨리기까지 가해야 할 대미지를 보여주는 기능.

비록 지구가 게임화가 되었다 하나, 모든 사람들이 체력 게이지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아무나 볼 수 있었다면, 하빈의 머리 위를 보는 순간 다들 까무러쳤을 테니까.

이건 채지석의 특수 스킬, <꿰뜷는 눈>의 효과였다. 그마저도 몬스터 한정으로 사용이 가능한.

끼에에에!

그리고 ‘이름 없는 창조물’이라 불리는 이 몬스터들에겐 그 체력 게이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

공격을 해도 먹히지 않고, 수는 끝없이 많고.

이걸…… 대체 어떻게 파훼해?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탄식합니다.]

겨우 들려오는 간접 메시지.

그의 성좌마저도 포기했단 말인가.

채지석은 처음으로, 절대 돌파할 수 없을 것 같은 벽을 마주했다. 그동안 랭커까지 오르면서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하…….”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채지석은 실로 오랜만에, 죽음을 실감했다.

끼에에!

챙! 채앵!

공격이 안 통하니 방어밖에 할 수 없는 상황.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 혼자 여기서 죽는 거면 모를까.

뒤에 남겨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까.

……그것도 그가 데려온 신입 연수생.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괴물들의 아가리를 막아내며 채지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

이 상황은, 어떻게 보면 전부 그의 탓이었다.

현하빈은 처음부터 이 던전에 들어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땡땡이로 취급하며 데려온 것은 자신이었다.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도망가라고? 도망갈 수가 없는데?

그럼 미안하다고? 이제 와서 그깟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나.

챙강!

미처 막지 못한 괴물이 그의 무기를 멀리 날렸다. 마침내 다가온 그것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렸다. 아득한 절망에 두 손이 땀으로 미끄러질 때.

슈아악-

끼, 끼에……?

눈앞에 놓인 괴물이 반으로 갈렸다.

후두두둑.

체력 게이지가 없던 괴물들이, 대미지가 안 먹히던 몬스터들이 산산이 재가 되어 흩어진다.

“……그러게, 내가 도망치라고 경고했잖아.”

한숨 섞인 목소리가 그의 곁에서 들렸다.

현하빈.

그가 지키던 A급 신입 연수생.

멍하니 바라보는 채지석의 시선을 뒤로한 채, 그녀가 탁탁, 검에 묻은 몬스터의 잔해물을 털었다.

* * *

‘……와, 진짜 튜토리얼 수준이긴 하네. 딱 상성 맞춰서 나왔어.’

처음 채지석이 ‘체력 게이지가 없다’는 말을 했을 때, 하빈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의 스킬창을 열람했다.

<허무의 전염>

시스템의 판정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상대의 스탯 중 하나를 지목하여 무시합니다. (1일 1회 사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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