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8) (8/268)

008. 연수원 입소 (2)

채지석은 주변의 술렁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하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현하빈 연수생이지?”

“아닌데?”

“우리 길드에 들어올래?”

“싫은데.”

즉답, 칼답. 그럼에도 채지석은 부담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려 하빈이 수저를 바삐 움직였다.

‘빨리 먹고 이 자리를 뜨자. 당장 뜨자…….’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채지석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음……. 혹시 조건이 궁금한 거면, 미리 알려줄 순 있어. 네가 온다면 기본급은 10억이고…….”

“적네.”

“적어? 그럼 100억?”

“그건 이미 있고.”

“이, 있다고……?”

‘그게 왜 있어……?!’

드물게 살짝 커진 채지석의 눈. 그 모습을 보며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채지석이랑 얘기하는 사람 누구야?’

‘길드 가입 권유인가?’

‘까이고 있나 봐!’

‘쟤 뭐야? 무려 솔라리스 가입 권유를 깠어! 그것도 채지석 면전에 대고!’

‘100억은 개나 주래! 부자인가? 재벌이야?’

“…….”

‘개나 주라고는 안 했거든……?’

술렁술렁. 주변의 당황한 웅성거림 속에서 하빈은 끄응 한숨을 삼키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주 침착하고 확고한 태도.

“놉. 안 가. 안 들어가. 절대 안 감!”

“…….”

일 안 하고 편하게 사는 게 그녀의 유일한 목적! 어차피 얼마를 주든, 죽어도 길드 가입은 안 할 예정이었다.

하빈은 충격받은 채지석을 뒤로하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다음 오후 일정은 안전교육이야.”

“…….”

“보다시피 내가 네 담당 멘토가 되었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어째서 이 사람이 내 담당 멘토인 거지?’

점심 식사가 끝난 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채지석이었다.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의 그를 보며 하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 많고 많은 사람 중 이 사람이 멘토라고? 혹시 뒷돈 줬나? 분명 뒤에서 물밑 작업을 한 것 같은데.’

그녀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갈 때였다. 지석이 하빈을 불렀다.

“하빈 연수생?”

“아무리 그래도 님 길드 가입 안 해.”

“어, 그건 좀 더 생각을…….”

“안 해.”

칼같이 떨어지는 하빈의 거절에도 채지석은 전혀 타격이 없었다. 여전히 웃으면서 이것저것 일정을 알려주고, 멘토라는 위치답게 본인의 일에 충실했다.

예를 들어, 아침마다 지각하는 하빈을 절대 그냥 두지 않았다.

“하빈 연수생! 일어나! 오전 교육받아야지! 벌써 지각이야!”

“아, 시끄러……. 5분 뒤에 감…….”

“어제도 그래놓고 오전 교육 통으로 쨌잖아! 오늘은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다!”

“자체 공강임! 아무튼 자체 공강!”

“야……. 이거 대학교 아니거든?! 너 이러다 재연수받는다고! 지금 나가야 해!”

쾅쾅쾅. 얄짤 없이 두드리는 방문 소리.

이처럼 하빈의 스케줄을 칼같이 관리함은 물론이고.

“여기 뒷문으로 가면 배달 몰래 받을 수 있는 거 알아? 급식 질리면 말해. 시켜줌.”

“오……? 웬일로 꿀팁을 다 주고.”

“아직 주지 않은 꿀팁이 한참 남았으니 마지막까지 잘 부탁한다.”

“뭐? 마지막까지 여기 계속 있을 셈이야? 댁은 부길드장이라면서 찾는 사람도 없어? 일 안 해?”

“……당분간은.”

이런 식의 연수원 생활에 대한 귀중한 조언과 격려까지.

하지만, 그게 더 이상했다.

‘뭐지?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저 인간은 길드 일로 안 바쁜가? 이쯤 되면 귀찮을 만도 한데……. 왜 이렇게 정성껏 챙겨주지?’

그랬다.

고위 헌터, 그것도 랭커급의 헌터가 멘토로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들 아주 바쁘신 몸들이니까.

겨우 A급인 하빈을 스카웃하기 위해 이렇게 노골적으로 접근을 한다?

S급이 떴다면 모를까. 아니, S급이 떠도 대형 길드 부길드장이 직접 오지는 않을 거다.

그것도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솔라리스’ 길드의 부길드장이라는 게 문제다.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길드를 두 개만 꼽으라면 단연 ‘칼리고’와 ‘솔라리스’일 거다.

칼리고는 국내 랭킹 1위 강태서가 길드장으로 있었고, 솔라리스는 국내 2위와 3위 랭커 두 명(그중 한 명이 채지석이었다)이 함께 만든 길드였다.

둘 다 영향력은 막상막하였다. 그저 순수히 취향에 따라 헌터들의 선호가 갈릴 뿐.

그런데 무려 ‘솔라리스’의 부길드장이 직접 따라다니면서 재차 가입 권유를 한다? 겨우 A급 신규 각성자에게?

말도 안 되는 일.

‘그러니, 뭔가 있어, 뭔가 있다고.’

하빈이 채지석을 곁눈질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빈이 곧바로 홱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 분명…… 뭔가 알고 온 거다!’

[드디어 힘을 들킨 것이군!]

‘젠장.’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혹시나 캠페인이나 봉사 차원에서 멘토 역할을 하나 싶어 뒤져봤지만, 채지석이 연수원 멘토로 참여한 일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껏 안 하던 짓을, 굳이 콕 집어서 하빈의 멘토로 부임하고, 첫날부터 길드 가입 권유까지 한다고?

“진짜……. 이건 진짜 뭐가 있는데. 뭔지를 모르겠네.”

하빈은 슬쩍 자신의 직업명을 확인했다. ‘마검사’. 여전히 잘 숨겨져 있고.

레벨은 원래 서로 공개 안 되는 항목이라 괜찮을 거고.

애초에 각성 이후 집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데…….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설마……. 처음 보건소에서 마력석 폭파시킨 게 들켰나.’

끄으응. 하빈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채지석이 어디까지 알고 하빈을 스카웃하고 싶어 하는지도 궁금했다. 단순히 힘을 숨긴 강자라 생각해서 관심을 두는 건가?

“……아, 몰라. 걍 연수 기간 동안 네풀릭스나 보다 집에 가야지.”

하빈이 경쾌하게 숙소 문을 열어젖혔다. 어쨌든 길드 가입만 열심히 거절하고, 연수 적당히 받고 집에 기어들어 가면 별일은 없겠지.

척 보니 채지석은 끈질기긴 해도 심성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음……. 여러 이유가 있긴 한데.’

하빈은 턱을 괸 채 네풀릭스를 켰다. 예전 같으면 처음 화면에서 한 시간은 뭐 볼지 고민했을 텐데.

연수원 입소 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게 다 채지석 덕이었다.

‘아, 너도 ‘바람과 소원’ 보는구나? 그러면 이것도 봐봐. ‘마법사를 속인 마술사’. 이것도 재밌어!’

점심시간에 폰으로 한창 드라마를 보고 있었을 때였다. 채지석이 지나가다 슬쩍 말을 던졌다.

‘……에이, 설마 재미있겠어? 이래 봬도 나의 취향은 아주 까다롭단 말씀!’

불신과 경계가 가득했던 하빈은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클릭했었는데…….

“허억.”

[뭐, 뭐냐, 무슨 일이냐.]

“진짜로 재밌잖아? 취향 저격인데……?”

추천 개꿀.

놀랍게도 채지석은 정말로 재미있는 것들만 쏙쏙 골라 추천하는 재주가 있었다.

‘마법사를 속인 마술사 다 봤어? 그럼 다음은 스카이더맨 뉴뮤니버스도 재미있고…….’

그야말로 굉장한 타이밍이었다. 채지석은 딱 하빈이 그전 시리즈를 다 볼 때쯤에 슬쩍 다가와서 족집게 강사처럼 다음 작품을 콕콕 집어주고 갔다.

게다가 그것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죄다 명작이었다. 흔한 추천영화가 아닌 숨겨진 명작, 명드!

덕분에 하빈은 연수원에 머무는 내내 삶의 질이 급상승했다. 끝나지 않는 취향 저격 콘텐츠의 향연.

‘저, 저 인간은 헌터를 안 하고 영화랑 드라마 추천 뮤튜버를 했어도 대성을 했을 거야, 분명. 헌터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다!’

채지석의 활약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 매일 급식 먹느라 질리지? 오늘은 근처 특별 메뉴 포장해 왔어. 먹을래?”

“헉. 이건 헤메세아 연어덮밥…….”

“오, 너도 아는구나?”

뿌듯하게 웃으며 수저를 건네는 채지석.

그는 맛집도 많이 알았다. 하빈은 채지석이 ‘특별식’이랍시고 가져오는 끼니마다 속으로 숨을 삼켰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하빈이 멸망 전에 방문하려고 꼽아둔 맛집 리스트에 있는 것들이었다.

“헉……! 이건 업앤다운닭의 반반순살양념치킨?”

“아니……! 이건 제주도의 염단 돈가스? 이거 17시간 줄 서야 하는데! 대체 이걸 어떻게?!”

채지석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틈새 영업을 했다.

“우리 길드에 들어오면 앞으로도 이런 서비스를 마음껏…….”

“놉! 안 가. 그리고 공짜로도 안 먹을 거야. 계좌 부르셈.”

“…….”

칼 같은 더치페이.

아무리 맛깔나는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하빈은 절대 채지석에게 얻어먹지 않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먹었을 때는, 딱딱 정확하게 계산해서 현금을 쥐여주었다.

“야, 이 정도는 내가 산다니까. 길드 가입은 농담이니 그냥 먹어…….”

“김영란법.”

“이거 3만원 안 넘거든! 그리고 넌 공무원도 아니…….”

“김영란법!”

“아, 아니 진짜…….”

‘거기서 김영란법이 왜 나오는 건데……!’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공직자는 뇌물을 법적으로 받을 수 없다는 강력한 주장! 물론 공직자도 아닌 하빈에게 채지석이 밥 사주는 정도로는 해당 안 된다.

하지만 몹시 강경한 하빈의 태도에 채지석은 매번 포기한 채 터덜터덜 돈을 받아들고 돌아갔다.

그의 시무룩한 뒷모습을 보던 하빈이 슬쩍 턱을 괴었다.

‘……역시 저 인간은 괜히 인기가 많은 게 아니네.’

짐꾼 시절 때부터 익히 들은 정보였다. 채지석은 쾌활하고 친화력이 좋은 이미지다. 주변을 잘 챙기는 씀씀이 덕분에 남녀노소에게 인기가 많다.

무려 국내 랭킹 1위 강태서가 만든 ‘칼리고’에 비해, ‘솔라리스’의 위세가 전혀 뒤지지 않는 이유는, 솔라리스의 길마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부길마 채지석이 가진 인간미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니.

헌터넷에는 심심하면 칼리고와 솔라리스 비교 글, 그리고 강태서와 채지석의 비교 글이 올라오곤 했다.

제목: 너네 칼리고랑 솔라리스 선택할 일 있으면 꼭 솔라리스 골라라.(펑예)

본문: 내가 솔라리스 가입하긴 했지만 진짜 말단이거든? 입사한지 2개월밖에 안 된 신입, 완전 공기였음.

근데 오늘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졌단 말이야. 희귀 질환인데다 비용도 억 소리나서....너무 당황해서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내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부길마님이 직접 병원 알아봐주고 아버지 깨어나실 때까지 무기한 유급휴가 줌.... 사비로 위로금이랑 치료비 다 지원해주고...

+누군지 특정될 것 같아서 게시글 곧 펑할 예정

그럴 때마다 댓글 창도 폭발했다.

└ 바이럴;;

└ 이거 바이럴 아님ㅋㅋㅋㅋ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닌데...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솔라리스 채지석 그저 빛...

└ 나도 말단인데 여기 길마랑 부길마 ㄹㅇ진국이다.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나도 도움 많이 받음

└ ㅈㄴㄱㄷ난 강태서보다는 채지석이 더 정이 가더라. 기본적으로 사람이 좋아보임 강태서는 웃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음....맨날 차가운 신비주의;;말이 좋아 신비주의지;;;개오글....

└ 윗댓 미쳤나 왜 갑자기 강태서 머리채를 잡음? 헌터가 웃어주는 직업도 아니고 그런 걸로 까는 게 말이나 됨?

└ ㅋㅋㅋ채지석을 강태서한테 비비네ㅋㅋㅋㅋ국랭 3위랑 월랭 2위가 비교가 되냐? 아무리 채지석이 인기 많아도 이건 아니지ㅋㅋㅋ

└ 응 너네 아무리 싸워도 어차피 피데스 미만 잡~

└ 피데스가 여기서 왜 나옴?

└ 윗윗댓 쟤 모든 게시글에 ‘피데스 미만 잡’만 달고 사라지는 어그로임 무시하셈

└ 댓망진창....너넨 꼭 사람을 비교질을 해야 직성이 풀림?

└ 에휴...칼리고든 솔라리스든 가입한것부터가 인생 승리자인데. 여기 대부분 평생 명함 받을 일은 있겠냐? 걍 그사세임...

채지석.

애초에 그가 가진 성좌 이름부터가 ‘가장 가까운 빛’이다. 다들 그 성좌가 ‘태양’일 거라 짐작했다.

언제나 인류에게 한결같이 따뜻했던 빛.

그런 성좌의 선택을 괜히 받은 게 아닌 듯, 세간에서도 따뜻한 성정으로 이름 높은 인물.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친화력이 좋은 사람.

센스가 좋고 챙겨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

하빈도 호의에 진심이 담겼는지, 오로지 이용할 목적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소문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왜 솔라리스가 흥하는지 알겠다. 진짜 내가 그냥 평범한 헌터였으면 바로 가입했다, 정말.”

[아, 아니 저 인간이 해준 게 그렇게 대단한 거란 말이냐? 내 말에는 꿈쩍도 않더니! 저 인간이 나보다 더 쓸모가 있다고?]

“어……. 솔직히 염단 돈가스는 인정이지. 잘잘이보다 쓸모 무척 있음.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하빈이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아헤자르는 기함했다.

[세계 최강의 성좌인 나보다 그 네풀릭스인가 어쩌구 추천이랑 제주 돈가스가 더 좋단 말이냐? 내가 겨우 돈가스에 밀리다니!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잘잘. 넌 뮤튜브 프리미엄도 결제 못 해주잖아. 밥도 안 나와, 재미도 없어, 너를 정말 어떡하면 좋니?”

[억울하다! 억울하니라! 그놈의 뮤튜브가 뭐라고! 내가 어쩌다 이런 취급을!]

아헤자르는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소리를 질렀다. 하빈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 * *

연수원의 첫 며칠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어차피 연수라고 해봤자 첫 주는 형식적인 안전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현직 헌터를 불러서 특강을 듣기는 했지만, 특강 내용도 그냥 현직 헌터의 경험담 듣는 자리. 사실 하빈 말고도 땡땡이를 치거나 연수 자리에서 조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2주차부터는 그럴 수 없다.

멘토와 함께하는, 본격적인 ‘실기’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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