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각성자 검사 (1)
현시우는 원래라면 아헤자르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아주 조금은 있었다.
세계 멸망을 막아보자, 파이팅!
대충 이런 기조의 이야기를.
아헤자르의 멸망 예언은 놀랍게도 진실이었다. 회귀 전 그들이 멸망을 막다가 실패했던 것도 사실이고.
현하빈이 다음 생에는 더 잘해보겠다며 현시우에게 회귀 아이템까지 쥐여줬던 거니까.
‘당연히 이번에도 시스템이랑 맞서 싸우겠지?’
그래, 예전의 하빈은 그랬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 수순을 밟을 거라 생각했다.
솔직히 5년 동안 자신이 아헤자르 구하느라 구른 거 생각하면, 그리고 랭킹 1위까지 오르느라 개고생한 거 생각하면……!
현하빈도 이제 좀 거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집 현관문 앞에서 현시우는 우뚝 멈추고 말았다.
그 안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
“다들 스웨트홈이나 귀묘한 이야기 봤다고 할 때마다 아는 척하느라 혼났던 내 세월들! 늦었지만 내가 다 정주행 간다, 지금!”
“그동안 못 갔던 피씨방도 가야 하고, 노래방도 가야 하고, 영화관도 가야 하고…….”
“…….”
[안 들어가고 뭐 하냐.]
5년 동안 그렇게 살았구나, 현하빈.
남들이 즐기는 거 못 즐기고 쉴 틈 없이.
마음속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회귀 전 하빈이었다면 벌써 세계 최정상 찍고 승승장구했을 시기였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한 이유는…….
원래 첫 성좌였을 네아이바를 현시우가 대신 집어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벌어진 나비효과인 거다.
‘뭐,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다 전생의 현하빈이 시킨 거니까. 너 자신을 원망해라, 동생아.’
내 탓 아님.
아무튼 내 탓 아님.
[언제까지 서 있을 거야? 다리 안 아파?]
“아무튼, 제 탓 아니에요. 이건 전부 전(前) 하빈 탓임.”
[허이구.]
“들킬까 봐 건너 건너 정보 들었을 땐 분명 잘살고 있다고 했었단 말이에요. 저렇게 힘들게 살았을 줄은.”
이참에 정보원들 싹 갈아치우든가 해야지. 빚 있는 것도 진짜 몰랐다.
현시우가 투덜거리며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 * *
그리고 지금.
멱살이 야무지게 잡힌 이 상황.
‘……와, 힘 장난 아니네.’
각성한 거 맞네, 맞아.
현시우는 슬쩍 곁눈질했다. 이걸로 실질적 세계 랭킹 1위 뺏긴 거, 확실해진 건가.
성좌빨도 있었지만 그래도 노력 많이 했는데.
“이거 네 회사나 뭐 그런 기관 물건인데 잘못 들고 온 거 아니야?”
하빈이 구석에 버려진 나무상자를 발로 가리키며 물었다. 현시우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 내 일하고는 아~예, 아~무 상관없는데.”
사실 상관있다.
“그럼 뭔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네 부탁이었다니까!”
“난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없는데?”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 하빈.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현시우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처음 매로나를 살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었다.
‘무조건 모르는 척하자. 모르는 척만이 살길!’
예전에 둘이서 쥐어뜯고 싸웠을 때나 사고 쳤을 때, 그리고 부모님께 변명할 때에도 먹혔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모름, 모름! 일단 저는 모름. 진짜 모름!’
‘아니, 그럼 이건 누가 이래 놓은 거야?’
‘그러게요. 우리 집에 귀신이 사나?’
‘…….’
대충 이런 식으로 넘어가면 잔소리 상황이 어느 정도 무마되곤 했다.
비겁해도 어쩔 수 없다. 현하빈에겐 진실을 말할 수가 없는데.
‘그리고 전(前) 하빈이 싼 똥은 현(現) 하빈이 치워라. 제발, 나 중간에 끼우지 말고…….’
다시 태어나도 회귀자 같은 건 안 해먹어야지.
조용히 생각을 갈무리한 현시우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네 이름으로 온 소포였는데. 집에 가져다 달라고 적혀있었어. 그거 까먹고 놔뒀다가 생각나서 가져온 거야.”
“난 네가 실종된 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소포를 보내?”
“헐, 그렇네?!”
진짜 영문을 모르는 척. 소름이 끼친 척.
“그 정도 생각도 안 했다고? 어디서, 어떻게 온 거였는데?”
“그건……. 포장지를 몇 년 전에 버려서 나도 모르지.”
“내가 보낸 건 맞고?”
“아니었어?!”
정말로 놀란 척.
“내 생일 선물이라는 말은 뭐야, 그럼?”
“그거야, 그냥 그걸로 퉁치고 넘어가려고.”
“힘들게 구해왔단 건?”
“당연히…… 생색내려고.”
“와, 그 말 묘하게 설득력 있어서 짜증나네?”
하빈이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시우의 얼굴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꼬투리를 잡을 만한 구석은 딱히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저 표정, 진짜로 당황한 얼굴색까지.
‘현시우가 이렇게 연기를 잘할 리는 없고.’
사실 잘했다.
그것도 아주 수준급으로. 현시우는 지금 완벽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연기했던 인생 2회차의 능력이다, 어리석은 동생아! 날 따라잡으려면 한 번 죽었다 깨어나도 모자란단다!’
한 번 속인 걸로 금세 신나서 깝죽대던 현시우가 모른 척 큼큼 물었다.
“뭐가 문젠데? 뭐였는데? 안에 안 좋은 거라도 있었어? 검 이야기는 뭔데?”
“아씨, 그게…….”
진짜 모르나.
현시우가 모르는 거면 이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나름 하빈은 현실적으로 머리를 굴려가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세계는 곧 멸망한다니까! 도와달라, 현시우!]
아헤자르는 생각이 없었다.
“아오, 넌 조용히 안 해? 그걸 동네방네 떠들면 어떡해!”
[인류는 알아야 한다!]
“그런 건 모르는 게 약이야!”
“큽.”
현시우는 기어이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 * *
“야, 넌 앞으로 입단속 잘해라. 다른 인간 앞에서 또 떠들어대면 가만히 안 둔다. 아무도 못 찾는 곳에다가 다시 봉인해 버릴 거야.”
[미안하다.]
“그리고 잘못하면 나도 죽임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하냐? 지금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데?”
[미안하다…….]
아헤자르가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그치만, 이 인간은 안전하다 판단했다.]
“도대체 어디가?”
[그건 나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풍기는 기운도 그렇고…….]
“기운 같은 소리하네. 도믿맨이세요?”
[도믿맨……?]
“하.”
하빈은 차라리 타이르는 게 낫다 생각했는지, 해탈한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자, 앞으로는 생각을 하고 행동하기. 힘만 세다고 다가 아니란다. 네가 지난 세계에서 실패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 아니었을까?”
[그, 그런 것인가……!]
“그래. 그러니까 앞으론 생각을 거치고 말하기?”
그 웃지 못할 대화를 눈앞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현시우는 생각했다.
‘역시 죽이 잘 맞네.’
이제 이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대충 마무리해야 했다.
“그래서 정리하면, 얘는 성좌고, 앞으로 세계가 멸망할 테니까 같이 시스템을 조지자고 했다고? 현하빈 너한테?”
“어.”
“못 믿겠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네.”
“그치?”
현시우는 모른 척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와. 정.말?
그.런.엄.청.난.일.이.일.어.난.단.말.이.야?
“그래서 언제래?”
“그거 물어봤는데 본인도 정확한 시기는 애매하대. 조용히 살면 대충 25년 이상은 버틴다는 듯.”
“뭐야, 당장 멸망은 아니네.”
“그러니까. 난 여기서 사과나무나 심을 거임.”
한쪽은 뮤튜브, 한쪽은 네풀릭스.
사과까지 셋 다 빨간색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이참에 쓰는 기기들도 전부 사과 시리즈로 사야지!’
하빈의 착실한 사과농장 계획에, 가만히 듣던 아헤자르가 발끈했다.
[너희 인간들은 그런 안일한 태도가 문제다! 그러니 환경보호도 안 하고, 후손에게 떠맡기고!]
“맞는 말이긴 한데 아무말이네? 뮤튜브도 모르면서 언제 그런 걸 또 알았대?”
콕콕 검을 찔러대는 하빈에게 현시우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그냥 쉬려고?”
“쉰다니? 놀 건데. 하고 싶은 것들 하면서.”
“하고 싶었던 게 많아?”
“응. 벌써 정주행할 드라마도 밀렸고, 가야 할 맛집 리스트도 있고,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 또…….”
“……그랬구나. 알겠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 현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더 할 말 없지? 없으면 이만 가고.”
“야, 아니…… 음, 오빠.”
하빈이 그를 불러세웠다. 조금 다급한 표정이었다. 현시우는 시우대로 그 자리에 굳었다.
‘이거 호칭 봐라. 뭐 부탁할 게 또 있나.’
“갑자기 불러낸 거 미안. 음……. 어쩌다 보니 다 말했는데, 나 각성한 건 비밀이다? 알겠지? 진짜 조용히 살고 싶거든. 이것만큼은 진짜 부탁할게.”
방금까지 틱틱거리던 것과는 다른 진지한 목소리였다.
시우는 바닥에 팬 흔적을 한 번, 아늑하게 꾸며진 하빈의 책상을 한 번, 하빈의 작은 어깨를 한 번 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래. 내가 뭐 그런 걸 떠들고 다닌다고. 네가 알아서 해라. 난 모르는 일이니까.”
* * *
현시우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네아이바의 당황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진짜? 진짜로? 이대로 그냥 돌아가는 거야? 설득은?]
“뭐 어쩌겠어요. 본인이 쉬고 싶다는데.”
[그럼 멸망은 누가 막아? 현하빈 정도의 힘이 아니면 승산은 희박해!]
“세상이라는 게 굴러가다 보면 멸망할 때도 있는 거고. 그런 거죠.”
[……?]
“아니면, 혹시 저 하나 정도로는 막을 가능성이 아예 없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것대로 조금 섭섭한데.”
[…….]
오랜 침묵.
“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현시우가 가볍게 웃었다.
네아이바는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이었다. ‘사유하는 지팡이’가 별명인 만큼, 그의 계산도 아마 정확하겠지.
‘하지만 이제 막 쉴 틈 생겼다고 좋아하는 애를…….’
어떻게 전장으로 다시 내몰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
게다가 이번 회차라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헛된 것일지도 모르는 희망을 품고 또 개고생하기보다는.
차라리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운명을 받아들여, 주어진 행복이라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도, 이번엔 막아낼 수도 있어. 이번 회차의 현하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힘을 가졌고.]
“아니요.”
현시우가 변명처럼 덧붙였다.
“네아이바. 그건 아우라이던의 당신들도 이미 실패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한 번 실패했죠. 이번 회차의 하빈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
“단지 그 이유로 한 사람을 억지로 떠민다는 게 말이 안 되죠.”
[……그럼 네가 지금껏 고생한 5년은?]
현시우는 씩 웃었다.
“저 고생 안 했는데요. 오히려 지금은 그 덕에 랭킹 1위 찍고 꿀 빠는 중인데. 고생은 현하빈이 더 했을 듯.”
네아이바는 침묵했다. 오늘따라 계약자의 허세가 심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한숨처럼 덧붙였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지. 그 아이가 그 정도의 자질을 품었다면,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고 말걸.]
* * *
그리고 며칠 뒤.
하빈은 집으로 날아온 공문을 보고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귀하는 각성자 검사 대상자입니다. 귀하의 지역 근방에서 각성자의 징후가 보였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재검사를 받을 것을…….]
부들부들.
“시바……. 대체 누가 신고했어?”
[오, 이것이 무엇이냐!]
“각성자 검사……. 뭐,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하빈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망했다. 안 가면 벌금도 아니고, 곧장 감방행인데.”
[감방(監房)? 죄인들이 수감되는 곳을 말하는 것이군! 네 힘을 드러내지 않으면 죄인이 된단 말인가!]
반면 아헤자르는 무척 신난 모양이었다.
[이 국가는 일을 정말 잘하는군! 힘을 숨기고 있는 자들을 가만두지 않아!]
‘일을 잘하긴 뭘 잘해!’
하빈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미친 자들아! 이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할 일이냐! 인권 어디 갔어, 인권?”
[죄인의 길은 안 된다! 준법정신을 지키거라!]
“이럴 때만 그런 거 찾지!”
게이트 사태 이후로 각성자에겐 힘을 숨길 자유, 그딴 거 없었다.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은 낌새만 있다 하면 바로바로 재검사를 시켜 어떻게든 각성자 수를 많이 보유하려 애썼다.
각성자 보유 수가 곧 국력!
그래서 한 톨도 남김 없이 조사를 해대는 것이다.
“내 스탯, 무서워서 아직 열람도 안 해봤는데.”
[당장 검사하러 가자! 무얼 하느냐! 세계 최강부터 찍고 시작하는 것이다!]
“안 된다고, 이 미친 자야! 하, 일단 얼마나 나올지 감부터 잡아봐야겠네. 디버프 물약이라도 사서 빨아야 하나?”
하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상태창을 열었다.
“스탯이 얼마나…….”
[스테이터스]
……
체력: 21.4억(비활성)
마력: 21.4억(비활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