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4) (4/268)

004. 은광(隱狂)

‘그래, 그날.’

하빈은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 일’이 벌어진 것은 어느 날 오후였다. 아주 평범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학교.

그날도 뒷자리에 앉은 태서는 새 만화책을 꺼내 들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 좀 생겨라, 내 인생. 게임판타지가 되든, 능력이 생기든, 레이드가 열려 헌터물을 찍든.’

매일 가져오는 책은 달랐지만 태서가 떠들던 내용은 비슷했다.

갑자기 레벨이 생기고, 괴물이 나오고. 마침내 이야기의 주인공인 SSS급 헌터가 모든 걸 해결하고.

이왕이면 본인도 그런 삶을 살면 재미있겠다고 했었는데.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하지만 그건 많은 사람들이 죽는 세계니까, 나라면 그것보다는…….’

그때, 하빈이 창밖을 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맑고 화창했던 오후가 불길한 색으로 물들었다.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에 모두가 일순 모두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고요한 정적 속, 새하얀 모래가 깔린 운동장 한가운데.

시꺼먼 구멍이 나타났다. 끝도 가늠할 수 없는 아주 깊은 구멍이.

그리고 순식간에,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괴물들이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엑-

“으아악!”

“이, 이게 뭐야!”

“다들 도망쳐!”

혼비백산한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을 뛰쳐나왔다. 당황한 표정을 짓는 담임선생님과 현실감 없는 핏빛 하늘.

덜덜 굳어버린 하빈의 어깨를 잡은 건 언제나처럼 뒷자리의 태서였다.

“소원이…… 이루어졌어.”

겁에 질린 건지, 광기인지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을 보며 하빈은 숨을 삼켰다.

“……이 상황에도 그딴 소리가 나와?”

“시스템, 시스템 창……. 레벨이랑 상태창이 나타났다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하빈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게임처럼 상태창이 나타났다고?

<지금부터 지구-#10420의 동기화가 진행됩니다>

“나, 나도……”

“레벨 창이 나온 건 아닌데 그, 게임화가 되었다는 알림이…….”

“이, 이게 무슨 상황이야?”

함께 도망쳐 지하실에 도착한 친구들이 웅성거렸다.

각자 무언가를 발견한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손짓하면서.

“알림창? 게임화?”

“이게 뭐야?”

시끄럽다 못해 혼란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상황 속. 모두가 알림을 받고 무언가를 얻었지만 하빈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알림도, 상태창도,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다.

‘현하빈 양입니까? 학교에 있어서 무사했나 보군요. 갑자기 이런 말씀 드려서 너무 안타깝지만…… 하빈 양의 부모님은 게이트에 휘말려서…….’

‘……뭐라고요?’

운명의 장난처럼 하빈을 제외한 가족 모두가 사라졌을 때도.

그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헌터가 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상태창! 상태창! 퀘스트!’

미친 사람처럼 악을 써봐도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그녀에게만 가혹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한 하빈이 정신을 차리고 마주했던 것은 집안의 빚. 홀로 남은 외로움. 당장 하루를 살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계의 압박.

그런 차가운 현실들뿐이었다.

[그랬던 거로군.]

‘!’

허억.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하빈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녀의 방이었다. 잠깐 침대에 누웠다가 잠든 모양이었다.

어느새 새벽인지 창문 사이로 푸른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하빈은 여전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하얀 검-아헤자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콱-

[바, 밟지 말거라! 언제 씻은 발이더냐!]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익숙한 목소리. 그건 아헤자르의 목소리였다. 하빈은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누가 남의 개인사를 함부로 엿보래?”

살기 어린 눈빛에 아헤자르는 잔뜩 당황해 얼버무렸다. 무슨 인간이 이런 기세를…….

[엿보려고 한 게 아니라…… 원래 첫 성좌는 기억 정도는 다 공유한단 말이다!]

“이래서 자동 연동 시스템이 정말 별로야, 그치? 내 연락처 같은 거 싹 다 긁어가는…….”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보다 진정해라. 이대로면 바닥이…….]

뚜둑.

“…….”

마루가 검 모양으로 파이는 걸 본 하빈이 곧바로 발을 뗐다.

각성 이후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스탯의 영향이었다.

하빈은 뒤늦게 잠을 깬 듯 두 눈을 깜빡였다.

[난 분명 바닥의 파손을 경고하였다, 인간! 내 탓이 아니다.]

“……망했다. 이거 수리 어떡하지.”

짧게 한숨을 쉰 하빈이 씻으러 화장실로 향하다가 우뚝 멈추었다.

”야, 설마 이런 것도 동기화니 공유니 되는 건…….”

[아, 안 된다! 진짜 안 된다!]

“……너 성별 뭐야?”

[중성! 중성!]

“중성? 진짜? 대충 넘어가는 거 아니고?”

[아, 아니, 애초에 성별 같은 건 없다! 내가 인간도 아니고!]

억울한 듯 웅얼대는 아헤자르의 말을 흘려넘기며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에서 막 깬 터라 순간적으로 너무 저기압으로 대하긴 했다.

“그래. 내가 너한테 지금 이럴 때가 아니긴 해.”

[그렇다! 이제 좀 더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현시우.”

현시우한테 물었어야 했는데.

하빈이 폰을 꺼내들며 중얼거렸다. 이 자식은 카톡 한다더니 역시 까먹은 게 분명하다.

어제 연락처 뜯어내길 잘했지. 절대 선톡할 생각을 안 해요.

타닥타닥. 하빈의 손이 재빠르게 핸드폰 위를 움직였다.

* * *

까톡. 까톡.

“…….”

현시우는 폰을 확인하자마자 제 눈을 의심했다.

도른자

카톡한다며

네가 놓고 간 이 검 뭐임

자꾸 멸망멸망거림;;

세계구원에 미쳐있나

중2병인데 꼰대인 대환장 콜라보;

이딴 선물 필요없ㅇ

빨리 집ㄷ에 기어들어와서

도로 가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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