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51)화 (151/151)

# 23.

모두의 축복 속에 탄생한 공주님은 무럭무럭 자라, 노란색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두 살의 공주님이 되었다.

“아이참, 공주님. 뛰시면 안 된다니까요.”

“마리!”

제 어미를 닮아 엄청난 활동량을 가진 아이는 여러 부분에서 빨랐다. 하다못해 달리기 실력까지도.

노아는 황급히 달려와 저를 품에 안아 드는 마리의 이름을 부르며 까르르 웃었다. 멀리서 뒤따라오던 로잘린이 웃는 얼굴로 제 딸아이의 행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두렴, 마리. 어차피 제가 하고픈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이니.”

라나가 권해서 입은 흰 드레스에, 노아가 입은 드레스와 비슷한 노란색 양산을 든 로잘린에게서는 능숙한 어미의 태도가 물씬 풍겼다. 편안함에 적응하며 조금 풍염해진 몸도 그렇지만, 처음 결혼할 때보다 훨씬 성숙해진 태가 눈에 띄었다. 예전의 예민하고 감정적이던 모습은 상대적으로 깎여 있었다.

“아빠!”

노아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떼어 주던 로잘린이 몸을 돌렸다.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은 미모를 가진 로잘린의 사내가 봄볕 아래 가까워지고 있었다.

“노아, 이리 오렴.”

다가온 로비엔이 능숙하게 마리로부터 노아를 안아 들었다. 말랑한 가슴이 없어 불편할 법도 한데, 단단한 제 아비의 가슴팍과 어깨에 찰싹 달라붙은 노아에게서는 조금의 불편함도 느낄 수 없었다.

하긴, 제 말이라면 깜빡 죽는 아비의 품인데 불편할 리가 있을까. 로잘린이 짧게 혀를 찼다.

처음엔 아이의 모든 것을 용납해 주는 사람이 로잘린이었다면,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로비엔으로 바뀌었다. 못마땅한 건 아니지만, 그러다 노아의 습관이 나빠질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어미를 닮아 눈치가 좋은 아이는 영악하게도 가릴 때를 알기는 했다.

“로잘린, 손잡아요.”

노아를 안은 로비엔이 마차의 발판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로잘린은 양산을 접어 마리에게 넘기고, 로비엔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곧 제 아비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노아를 안은 로비엔 역시 마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날이 정말 좋네요.”

“날씨 좋아!”

마차의 문이 닫히자, 덜컥거리며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로잘린은 창문 너머로 스치는 완전한 봄의 풍경을 기분 좋게 응시하다가, 노아의 목소리에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좋은지 로비엔의 볼을 고사리손으로 붙들고 몇 번이고 쪽쪽거리며 뽀뽀하는 노아와, 혹시라도 마차가 덜컹거리며 아이가 다칠까 단단히 잡은 로비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아가 유난히 기분이 좋네요.”

“어딜 가는지 아는 모양이에요.”

로비엔이 노아를 가볍게 들어 정면에서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짧은 다리 때문에 바닥에 발이 닿지 않으니 무서울 법도 한데, 아이는 퍽 즐거운 얼굴로 허공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노아를 달랑 잡아 들고 장난스럽게 어르던 로비엔이 예쁘게 솟은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후, 다시 제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노아, 오늘 어디 가는지 알고 있니?”

로잘린의 질문에 아이가 로비엔의 품에 답삭 붙어 눈을 깜빡였다.

“밖에!”

“밖에 어디?”

“노아 그런 거 몰라.”

어디 가는지 알 거라는 건, 그저 제 아이가 유달리 똑똑하다는 아비의 착각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폐하께선 노아를 너무 천재로 생각하신다니까요.”

“단어를 모르는 걸 수도 있죠.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로잘린도 노아에게는 꽤 천치같이 굴었으나, 로비엔은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착각임을 지적해 줘도, 노아의 아버지는 뻔뻔했다. 로잘린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노아, 오늘 언니 보러 갈 거야.”

“언니?”

노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응. 노아 언니.”

로잘린이 설명하는 동안, 로비엔의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 위에 흐트러진 노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노아가 자라면서, 당연히 로잘린을 닮았으리라 생각했던 머리카락 색이 차차 변해 가고 있었다. 제 어미보다는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은 로비엔의 백금발이 얼마쯤 섞인 것처럼 보였다.

“언니가 뭐야?”

“노아보다 큰 사람. 노아는 두 살인데 언니는 다섯 살이야.”

“어딨어?”

노아의 물음에 로잘린이 조금 흐리게 웃었다. 로비엔은 로잘린에게서 평생토록 사라지지 않을, 첫아이를 향한 미안함과 그늘을 서글픈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곧 만날 거야.”

로비엔의 설명에 투명한 물빛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고 예쁘다 해 줘?”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로비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노아가 안고 예쁘다고 해 줘.”

“노아가 할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은 모양인지, 노아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글로리에 대한 생각으로 흐려진 얼굴을 하고 있던 로잘린이 피식 웃었다.

조금 우울해질 것 같으면, 노아의 존재가 모든 것을 환기하고 생각을 바꿔 놓았다. 지나친 슬픔에 가라앉지 않도록.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 마차는 팔팔하게 날뛰던 노아가 깜빡 잠들 때까지 달렸다.

왕궁에서 북쪽으로 달리면, 언덕과 별채 등이 있는 왕실의 사유지가 있었다. 왕궁과 멀지 않아, 왕실의 일원들이 평소에도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

잠든 노아를 안고 내린 로비엔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로잘린은 그와 함께 짙푸른 잔디를 밟고 걸었다. 온 사방이 평화로웠다. 드넓게 펼쳐진 녹지와 동그랗게 솟은 작은 언덕, 그리고 그 위의 예배당.

“넓어서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으니 글로리가 좋아할 것 같아요.”

로비엔은 최근, 왕실 전용 사원에 안치되어 있던 글로리를 이곳으로 옮겼다. 선왕과 같은 곳에 두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선왕을 원망하는 마음이라면 로비엔보다 더한 로잘린은 당연히 그에 찬성했다. 게다가 태동으로 느꼈듯, 노아만큼이나 활동적이었을 글로리를 사원이라는 공간에 가두어 두고 싶지 않았다. 영혼이라도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기를 바랐다.

로잘린은 한 손으로는 드레스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로비엔의 손을 붙잡고 언덕을 차근히 올랐다. 뜻밖의 인기척에 놀란 토끼가 호다닥 달음박질을 쳤다. 도망친 위치를 숨겨 주려는 듯 느긋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파리가 흔들리며, 짙푸른 녹음의 냄새와 잔잔한 소음을 전해 왔다.

“여기예요.”

작은 예배당 뒤편. 돌로 세운 비석이 있었다. 로잘린의 애틋한 시선이 비석 위의 이름을 맴돌았다.

“으응…….”

로잘린이 비석에 손을 갖다 대기가 무섭게, 로비엔 품에 안겨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노아가 칭얼거렸다. 아이를 고쳐 안으며 달래려던 로비엔은 곧 생각을 바꾸고, 몸을 측면으로 틀어 노아에게 글로리가 있는 곳을 보여 주었다.

“노아. 여기에 언니가 있단다.”

“웅……?”

다시 잠들 것처럼 꼬물거리던 것이 번쩍 눈을 떴다.

“노아 언니?”

“아까 안아 주고 예쁘다고 말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니?”

로비엔의 말에 노아가 몸을 바동거렸다. 내려 달라는 뜻이었다.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를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로비엔이 몸을 숙여 노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람이 아닌 대상을 발견하고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아가 비석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노아 언니. 예뻐!”

그 순간, 노아가 짧은 팔을 뻗어 할 수 있는 한 비석을 꼭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저를 보면 해 주듯, 끌어안고 예쁘다고 칭찬했다.

로잘린이 물기 섞인 숨을 내쉬었다. 제 아내의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로비엔이 가만히 로잘린을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언니 좋아!”

차가운 비석에 얼굴을 문대며 애교를 부리던 노아가 비석 위로 날아드는 흰 나비를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팔랑거리며 다가와 코끝에 앉았다가, 노아가 재채기를 하자마자 놀라서 달아났다.

직전까지 제가 뭘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어린 공주님은 그새 그 나비를 따라 달려 나갔다. 로비엔과 로잘린의 뒤를 따르던 라나와 마리가 자신들이 살피겠다는 뜻으로 멀찍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력이 약한 딸아이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어지자, 자연히 시선이 다시 비석과 그 아래 글로리가 묻힌 땅으로 향했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 같은 첫아이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것이 늘 미안했다. 노아가 이만큼 크기 전까지는, 찾아와 제대로 애도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글로리, 내 딸.”

로잘린은 로비엔의 품에 기대어, 단 한 번도 안아 주지 못했던 어린 딸에게 사과의 마음과 사랑을 전했다.

같은 생각을 했을까. 로비엔이 고개를 돌려 아내의 관자놀이 근처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부부는 그렇게 끌어안고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있었다.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 같네요.”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을 때였다.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로잘린이 작게 웃었다.

“오늘따라 라나가 흰 드레스를 권하더군요.”

“잘 어울려요. 다시 결혼하고 싶을 만큼.”

“애를 둘이나 낳았는데 무슨 결혼을 다시 하겠어요?”

새초롬한 눈매가 로비엔을 흘겨보았다.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생각은 한번 해 볼게요.”

로비엔이 로잘린의 머리에 이마를 기댄 채 웃었다. 웃으면서 작게 진동하는 가슴의 울림이 등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음이 변했어요?”

로비엔이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제 아내를 품에서 놓았다. 바투 붙은 몸이 떨어지며 그의 마음이 상했나 생각하는 순간, 로비엔이 손을 낚아채더니 예배당으로 이끌었다.

얼결에 예배당으로 끌려간 로잘린이 예배당의 내부를 훑어보았다. 로비엔이 관리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는 예배당은 작지만 엄숙하고,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여기서 뭘 하시려고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겁니다.”

로비엔이 제 뒤로 따라오던 로잘린의 손을 끌어, 제 옆에 세웠다. 로잘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로비엔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의 증인은 글로리가 될 거예요.”

다시 결혼할 생각이 있냐고 묻더니, 이런 뜻이었나.

“로잘린 보가트 양.”

손목을 훑어 내려온 로비엔의 손가락이 하나하나 로잘린의 손가락 사이로 겹쳐졌다. 몸을 겹친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고작 닿은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여전히 당신의 이름으로 내게 사랑을 맹세할 수 있습니까?”

천장의 창문을 통과한 부드러운 햇볕이 그의 머리 위로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쏟아져 내렸다. 애정을 갈구하듯 자신을 직시하는 눈동자와 마주한 로잘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것은 신이 아닌, 그들의 자식을 걸고 하는 새로운 맹세였다. 기만이나 거짓이 존재해서는 안 되고, 임의로 깰 수도 없는 무거운 약속이었다.

“그럼요. 로잘린 보가트의 이름으로 맹세해요.”

그러나 로잘린은 아주 쉽게 맹세했다. 당연하게도 그 이유는 제 배로 낳았던 아이나 권력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를 가진 아버지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원하는 사내. 이처럼 아름답고 섬세한 사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자신은 여전히 로잘린 보가트였다.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감정에 대한 생각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은 불완전하기에, 완전해지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일생을 의탁하는 일은 이 인생 최고의 행운이 되리라.

“그렇다면 나와 계속 부부로 살아 주겠습니까?”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 당신은요?”

“내가 죽는 날까지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저도요.”

왕세자와 신하가 아닌, 남자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 그리고 여자 로잘린 보가트의 약속이었다.

영원을 맹세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고 느낀 순간,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마치 베일을 걷어 올린 새신랑처럼 로비엔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맞대어 왔다.

“공주님!”

조용히 숨결을 나누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노아를 부르는 목소리에 로잘린이 웃으며 로비엔을 밀어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제 사내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예배당을 나섰다.

다시 라나의 손에서 바동거리며 벗어난 노아가 힘차게 언덕 위를 달려왔다. 로비엔이 넘어질 뻔한 아이를 받아 드는 동안, 로잘린은 예배당을 돌아보았다.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너를 변하지 않을 맹세의 증인으로 세울 만큼 절대적으로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을 알지 못하던 순간에도 사랑했으니, 그것을 아는 지금은, 그리고 이후에는 너를 더욱 사랑하겠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오면, 한 번도 제대로 안아 준 적이 없었던 만큼 꼭 안아 줄게.

어디선가 아이가 달려오는 듯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질 자유, 희망, 그리고 사랑의 냄새였다.

<로잘린 보가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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