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50)화 (150/151)

# 22.

칼라브리아에 왕과 왕비를 제외하고 새로운 왕족이 탄생했다. 이번에도 왕실 소식지가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했다.

이름은 노아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

태어날 때는 그저 붉은 핏덩이에 불과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자 제 미색을 찾아갔다. 제 어미를 닮아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아비를 닮아 물빛 눈동자를 빛내는 공주님이었다.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사내아이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왕과 왕비는 젊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아이를 낳을 테니, 첫술에 배부를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타의에 의해 아이를 잃은 적이 있는 왕과 왕비가 처음으로 본 후사라는 점에서 모두 아쉬움보다는 축하를 보냈다.

“졸리니?”

물론 그와 같은 반응은 로잘린이 알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젖내가 풍기는 아이를 품에 안고, 볼을 비비며, 옹알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 아이에게 왕위를 넘겨야 한다는 절박감 역시 없었으므로, 성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노아. 내 귀여운 공주님.”

게다가 정말 제 이름을 아는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옴죽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졌다.

로잘린은 이 아이를 갖기까지 험난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죄책감, 거부, 그리고 공포와 같은 온갖 감정들이 추잡스럽게도 엉겨 있었으나, 이제는 형체조차 없었다.

“국왕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흔들의자에 기댄 채, 품에 아이를 안고 다독이던 로잘린이 고개를 들었다. 녹아든 캐러멜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띤 로비엔이 응접실의 문턱에서 로잘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비께서 식사도 거르셨다기에.”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로비엔도 로잘린처럼 어린 제 딸을 지켜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으니까.

젖을 물리면 옴찔거리며 빨아들이는 작은 입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고, 제 손가락을 들이밀면 생각보다 강한 악력으로 움켜쥐는 것도 즐거워했다. 한 번 잃은 적이 있기에 그러한 시간이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입에 먹을 것이라도 넣어 주시려고요?”

“못 할 것도 없지요.”

로비엔이 부드럽게 응수하며 침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이제 로잘린의 체향보다는 아이에게서 나는 젖내와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가득 차 있는 침실은, 들어설 때마다 낯설지만 즐거웠다.

“비께서 드실 만한 음식을 가져오도록.”

로비엔의 명령에 라나가 순순히 자리를 비웠다.

“재우는 것 정도는 유모에게 시켜도 괜찮을 텐데.”

“제가 하는 게 좋아요.”

흔들의자 가까이 접근한 로비엔이 로잘린의 갸름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노아를 낳고 석 달. 로잘린은 이제야 몸을 좀 회복했다. 로비엔은 노아를 품에서 끼고 놓지 않으려고만 하지 않았다면 더 빨리 회복했으리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로잘린이 노아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를 알아 강권할 수는 없었다.

“잠투정도 부리지 않고 얼마나 순한데요.”

로잘린이 품에 안긴 아이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냄새를 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언제는 어미가 되는 일이 무섭다고 하더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니, 천생 제 품에 안은 새끼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어미였다.

로비엔은 자신에게만 쏟던 애정이 아이에게로 나누어진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비께서 그편이 더 좋다면 그렇게 하셔야지요.”

하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그렇다고 해서 로잘린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밀리언이 말했듯, 사랑은 시간이 흐르며 형태를 조금씩 바꾸어 가지만,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힘들면, 바로 유모에게 맡겨요. 직접 돌보는 게 좋다고 하시니 두고 있지만, 몸을 상하게 할 정도까지 되면 양보 못 하니까.”

그 역시 저를 닮고, 로잘린을 닮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이 말랑하고 부드러운 것을 품에 안고 있으면 세상이 온통 꿈결 같았다. 그러니 로잘린에게만 왜 네 사랑이 변했느냐 윽박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로잘린의 건강을 상하게 한다면 다른 얘기가 되었다.

로비엔의 단호한 목소리에 로잘린이 푸스스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제 아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던 사내가 무작정 입술을 부딪쳤다.

“그만, 그만요.”

부리를 쪼듯 몇 번이나 이어지는 짧은 입맞춤에 로잘린이 결국 맑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로비엔은 감히 제 애정 표현을 거절하는 아내를 벌하듯, 이번에는 깊게 내리눌렀다. 자연스레 로잘린의 한 손이 저를 향해 몸을 숙인 로비엔의 목을 감았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숨어드는 사내를 받아 주던 순간이었다. 내내 편안히 감싸 주던 몸의 자세가 달라진 것을 알았는지, 아이가 작게 칭얼거렸다.

로잘린이 단박에 로비엔의 어깨를 조금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나기는 했지만, 약간 열에 달뜬 눈동자가 로잘린을 몽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로비엔이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폐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들려오는 목소리에 들어오라고 허락부터 한 주제에, 로잘린이 황급히 로비엔의 입술에 손을 뻗었다. 그의 입술이 민망할 정도로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탓이었다.

로잘린이 엄지로 그의 입술을 훔쳐 닦아 주자, 로비엔이 태연한 얼굴로 허리를 들었다. 직전까지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느긋한 태도였다.

“내게 주고 물러나.”

그러나 다음 순간, 로비엔이 하녀가 들고 온 접시에 손을 뻗는 것을 발견한 로잘린이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하녀 역시 잠시 놀란 것처럼 보였으나, 로비엔과 접시를 번갈아 보다가 냉큼 그의 손에 접시와 식기를 넘겼다. 로비엔이 제 비에게 하는 유난스러운 짓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먹여 주는 것쯤이야.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또 아이를 안고 있다고 제대로 먹지 않을 거잖아요.”

로비엔이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며 들린 목소리에 하녀가 히죽 웃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사이가 좋은지, 통속 소설에 나오는 연인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자. 입을 벌려요.”

로비엔이 포크에 찍은 고기 한 조각을 내밀었다. 시중을 드는 것에 절대로 익숙하지 않아야 할 사내라는 것을 생각하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로잘린이 머뭇거리며 작게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핏기가 남은 고기 한 조각이 쑥 밀려들었다.

“오늘은 가져온 음식을 모두 먹어야 할 겁니다.”

로비엔의 단호한 목소리에 로잘린의 눈이 먼저 접시에 담긴 음식의 양을 훑었다. 그리 적지 않은 양이었으나, 못 먹는다는 소리는 먼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로비엔에게 조금만 앙탈을 부리면 그가 넘어가 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옆을 지킬 시간을 줄어들어 안타까운데, 식사까지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속상하지 않겠어요?”

로비엔이 담담한 목소리로 그의 속상함을 피력했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저도 그랬을 것이라, 로잘린도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냥 입맛이 별로 돌지 않아서…….”

“궁의가 몸을 회복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앞으로는 잘 챙길게요.”

로비엔이 라나와 마리에게 확인할 거라며, 위협 같지 않은 위협을 했다.

“그러고 보니 곧 건국제가 있겠네요.”

로잘린이 중얼거렸다. 가을의 건국제에 모두의 앞에서 노아를 소개할 예정이었다. 태내에 있을 때부터 노아를 만나기를 고대하던 사람들이 그처럼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잘린이 시선을 조금 내려, 잠기운이 배었지만, 아직 잠들지 않은 제 딸을 응시했다.

“노아가 사랑받을 수 있겠죠?”

“객관적으로 봐도 어여쁜 아이니까요.”

로비엔이 로잘린의 입에 다시 한번 음식을 넣어 주며 대답했다. 로잘린이 입안에서 고기를 씹느라 우물거리는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던 그가 손끝으로 노아의 통통한 볼을 톡 두드렸다.

신생아의 얼굴이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노아는 확실히 달랐다. 몇 달 사이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의 모습에서는 어지간한 여자보다 더 아름답다는 제 아버지의 아름다움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거기에 로잘린을 닮은 새침한 눈매가 방점을 찍었다. 로비엔이 고요하고 부드러운 미인상이라면, 노아에게서는 좀 더 고양이에 가까운 새침한 미인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노아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팔불출 같은 아비의 자랑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노아가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니, 경계해야 할 자는 조금 많겠지만.”

다만 딸을 둔 아버지가 으레 하는 걱정은 아직 어린 것이 알 바가 아니었다.

“이제 그만 먹을래요.”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채소, 고기, 과일 등을 순차적으로 입에 넣어 주던 로비엔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녀가 오랜만에 제법 많은 양을 섭취했다는 것을 조금도 고려치 않는 태도에 로잘린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많이 먹었어요. 배부르단 말이에요.”

꾸벅꾸벅 졸던 노아가 잠들 정도의 시간이 흐를 만큼은 먹었다. 로잘린의 항변에 로비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음식이 담긴 접시와 식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제 비에게 물렀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정론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노아 이리 줘요. 요람에 옮겨 둘 테니.”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어요.”

로잘린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노아를 건네받으려 했으나, 로잘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품 안에서 잠시라도 떼놓는 게 그렇게도 싫은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편히 자요.”

“여기가 더 편한걸요.”

로비엔은 원망스럽기 짝이 없는 흔들의자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안겨 자는 것보다?”

배도 부른 김에 그대로 잠들 것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로잘린이 눈을 번쩍 떴다. 반짝이는 눈을 발견한 로비엔이 피식 웃었다.

“재워 주실 건가요?”

“잠깐은 시간이 있어요.”

로비엔이 순순히 그러겠노라 하자, 로잘린이 단박에 로비엔의 품 안에 노아를 안겨 주었다.

따뜻했던 체온이 멀어지자 불만스럽게 인상을 찡그렸던 아이가 제 아비의 단단한 품에 기대자 그새 표정을 풀었다. 로잘린만큼은 아니어도, 로비엔 역시 노아를 안고 어르는 데 익숙했다.

로비엔이 먼저 아이를 안은 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제 아비가 베개 내지는 쿠션이라도 되는 양 베고 누운 아이의 얼굴에 평온함이 감돌았다. 그 모습을 물에 풀어진 옷감처럼 흐무러져 응시하던 로잘린이 흔들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위로 올라, 익숙하게 로비엔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노아가 상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전처럼 로비엔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고 몸을 반쯤 겹쳐 누울 수는 없었으나, 로비엔의 품에 기대어 있자니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푹 자요.”

로비엔의 손가락이 로잘린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다독였다. 로잘린은 그의 손길을 즐기며 사르르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한 여정이었다고 생각하면, 감내할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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