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49)화 (149/151)

# 21.

로비엔이 침대 옆의 설렁줄을 당기자, 새벽에도 아랫것들이 잠기운을 떨치고 황급히 달려왔다. 로잘린이 출산을 앞둔 임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리 베르타 궁에 대기시켜 놓았던 산파까지 달려왔다. 직전까지 함께 잠을 청하려던 로잘린의 침실은 산실이 되었다. 사내인 로비엔은 당연히 그 침실 밖으로 밀려나, 곁방인 응접실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전에도 한 번 겪었던 일이지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숨이 막혔다.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소리나, 울먹거리는 로잘린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어김없이 몸이 바짝 굳었다.

“폐하, 일단 소네트 궁에 돌아가셔서 기다리고 계시면…….”

어차피 산고는 몇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일찍 끝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아는 라나가 로비엔에게 그의 궁으로 돌아가 쉬고 있을 것을 청했으나,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선이었다.

“비께서 저리 고통을 겪고 계시는데, 나는 돌아가서 편히 쉬고 있으란 말인가?”

날카롭게 돌아온 응답에 라나가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사내는 왕이 아니라 그냥 로잘린의 남편이었다.

라나는 더는 그의 휴식을 권하지 않고 물러났다. 다만, 저토록 파르랗게 날이 선 사내가 산고가 길어질수록 미치지는 않을지 그 하나가 걱정됐다.

“아악!”

찢어지는 목소리였다. 로비엔이 선 자리에서 화살 맞은 새처럼 파드득 떨었다.

“브랜디를 가져와.”

조금 살이 오르기는 했지만, 로잘린은 여전히 말랐다. 그의 시선에서는 그 몸으로 아이를 낳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을 만큼. 그러니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로잘린의 앓는 소리에 제가 고통을 겪는 양 움찔거리던 로비엔이 술을 가져올 것을 명하자, 하녀 하나가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가 쟁반에 브랜디를 가지고 왔다. 눈치 좋게도 술잔과 브랜디 한 병을 통째로 챙겨 왔다.

“저렇게 드시면 안 될 텐데…….”

빈속에 독한 술을 들이붓는 것을 발견한 아랫것들이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하지만 불안함을 이기려고 술을 들이켜고 있는 것이니, 먹을거리를 들이밀어 봤자 손도 대지 않을 것이 뻔했다.

“폐하께서 조금이라도 집어 드실 수 있도록 응접실에 가져다 놔요.”

그렇다고 해서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나. 라나의 명령에 하인들이 달려가 간단한 음식 거리를 가져왔다. 브랜디 한 병과 치즈, 햄 따위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러나 로비엔은 자리에 앉기는커녕, 계속 서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기껏 마련해 놓은 음식 거리에도 손 한 번을 대지 않았다.

술 한 잔을 마시고 복도를 정신없이 서성거리다가, 로잘린의 비명이 벽을 부수고 튀어나오면 지진이라도 난 듯 놀라 또 한 잔을 마시기를 반복했다. 아이를 낳는 건 로잘린이었는데, 더 큰 정신적 고통을 겪는 것은 로비엔인 것처럼 보였다.

“날이 샜네요.”

마리가 라나에게 울먹거리며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녘에 시작한 산고는 아침이 되고, 점심이 넘도록 이어졌다. 아침 일찍 궁에 들었던 밀리언은 로비엔이 하는 꼴을 보고는 일찍이 자리를 떴다. 일은커녕, 로비엔이 빈속에 들이켠 브랜디만 두 병째였다. 얼굴에 화끈하게 열이 오르고, 술기운에 예민해진 감각이 뭉툭해지자 로잘린의 고통 섞인 비명에도 조금은 의연해졌다.

“원래 아이를 낳을 때는 이처럼 오래 걸리는 건가?”

“서너 시간이면 낳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보통은 그렇습니다.”

로비엔의 질문에 라나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대답했다. 라나 자신만 해도 첫아이를 낳을 때는 이틀을, 둘째 아이를 낳을 때는 하루를 꼬박 고생했던 경험이 있었다. 짧은 산고 끝에 아이를 낳는 여성들도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듣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하루, 혹은 그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식사라도 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지금 폐하를 보시면 왕비께서 속상하실 겁니다.”

물론 자신은 아이를 낳는 동안 태평하게 놀러 나갔던 전 남편의 머리털을 다 뽑아 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로비엔이 유난스럽게 초조해하는 것은 이미 제 눈으로 확인한 터라, 오히려 가엾게 느껴졌다. 제 남편에게는 그토록 절절한 로잘린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낄 게 분명했다.

유일하게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로잘린의 이름을 들이대자 로비엔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드실 식사를 가져와요.”

라나의 명령은 곧 베르타 궁의 주방으로 전달되었다.

최대한 속에 부담되지 않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로 식단을 꾸렸지만, 로비엔은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다가 모두 물려 버렸다. 입맛도 돌지 않았거니와, 로잘린의 침실에서 나는 끙끙거리는 소리가 손을 움직일 힘까지 죄 흡수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는 중에도 시간은 착실히 지났다.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던 노을까지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곧 하늘에 조각달이 걸리고, 밤이 올 시간이었다. 로잘린의 산고가 꼬박 하루를 채우게 될 모양이었다.

술이 깨기 시작하는지, 로비엔은 다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문밖으로 로잘린의 비명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공포심을 더욱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폐하. 정신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저를 보세요!”

들려오는 소리가 그렇기도 했다. 라나 역시도 로잘린이 아이를 낳지도 못하고 의식을 잃으려는 건가 싶어 바짝 긴장됐다.

차마 무도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달려들어 갈 수 없는 로비엔은 연거푸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불현듯 공포감에 심장이 죄어들었다.

그 전에는 태어난 아이가 글로리처럼 나자마자 죽지 않을지를 걱정했으나, 이제는 아이를 낳다가 로잘린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폐하! 머리가 보입니다!”

로잘린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기운을 주려는 듯 산파가 소리를 높이는 것만 들려왔다.

왕이면 무엇할까. 아이를 낳는 로잘린에게 어떠한 도움도 될 수 없고, 고통도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함이 찾아들었다. 이 순간, 또다시 아이를 잃든 로잘린을 잃든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의 몸을 밀쳐 넘어뜨리고 비웃었다.

로잘린은 그의 유일한 마음붙이였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도 로잘린을 잃는다면…….

“브랜디를…….”

쓸모없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괴로움을 잊고 싶어, 술을 한 병 더 가져오라고 명령하려던 때였다. 방 안에서 로잘린을 부르는 큰 목소리에 로비엔이 사냥꾼을 경계하는 짐승처럼 몸을 굳혔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장하게도 터져 나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목을 죄는 듯했던 불안함이 발밑으로 쑥 꺼지고, 단말마의 숨이 목을 비집고 나왔다.

“비께서는?”

산파의 명을 받은 하녀들이 데운 물과 깨끗한 수건을 들고 산실 안으로 들어가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 산파가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비엔은 아이 대신 다짜고짜 로잘린의 안위를 물었다.

“비께선 무사하신가?”

“기진맥진하기는 하셨으나, 정신을 차리고 계십니다.”

아이의 존재를 물을 것으로 생각했던 산파가 당황한 얼굴로 로잘린의 상태에 대해 대답했다.

“들어가서 봐도 되겠나?”

“잠시라면…….”

산파가 머뭇거리다가 옆으로 몸을 물렸다. 본래라면 안 된다고 하였겠지만, 어차피 그녀에게는 왕을 막을 권한이 없었다.

로비엔이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언젠가와 같이, 로잘린의 침실 안에서는 쿰쿰한 땀 냄새와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늘 침실에서 머무르는 로잘린이나 그의 체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 중에 선연히 남은 고통의 진동마저도 이전과 같았다.

로비엔은 비극을 환기하는 공기에 몸이 굳어 문가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도 혹시 환청이 아니었나 싶어졌다.

“……폐하.”

낯선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내내 비명을 지르며 목이 쉰 듯, 색색거리는 숨이 섞인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로잘린.”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꼬박 하루를 고통에 몸부림친 로잘린이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는 신께 무릎 꿇고 기도라도 드리고 싶었다. 목이 멨다.

“겁이 났어요.”

로잘린이 몸을 묻은 침대 가까이 다가간 로비엔이 내내 공포로 질렸던 그의 마음을 고백했다. 로잘린이 간신히 미소 짓는 얼굴로, 침대에 상체만 묻은 사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산고의 여파로 여전히 덜덜 떨리는 손끝에 식은땀이 스쳤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가 폐하를 닮아서 무척 예뻐요.”

그러니 제 고통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드디어 만나게 된 그들의 새로운 결실을 마주하고 기뻐하기를 바랐다.

기진맥진한 얼굴로 간신히 이어 가는 말에 로비엔이 그제야 로잘린의 얼굴에만 고정해 두었던 시선을 가슴팍으로 돌렸다.

강보에 싸여 로잘린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는 글로리보다야 크지만, 여전히 작고 불그죽죽했다. 그러나 꼬박 열 달을 다 채워 나온 어린것은 저 스스로 숨을 쉴 줄 알았고, 제 어미의 젖을 물 만큼 건강했다. 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고 제 존재를 세상에 자랑할 만큼 존재감도 명확했다.

“어여쁜 공주님입니다.”

산파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의 성별에 대해 말해 주었다. 글로리와 같은 여자아이였다.

지독했던 비극은 아예 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경험으로 밀려날 수는 있었다. 로비엔은 이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로잘린의 결정이 옳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고생했어요.”

로비엔이 땀이 밴 로잘린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마침내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고, 로비엔의 얼굴을 본 로잘린이 기진맥진한 얼굴로 사르륵 눈을 감았다. 기가 쇠한 모양이었다.

“이제 나가 주시지요, 폐하. 뒤처리를 마저 끝내야 합니다.”

산파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로비엔은 하얗게 질린 로잘린의 얼굴을 애타게 바라보다가, 제 어미와 마찬가지로 잠이 든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그마한 아이를 제대로 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에 심장 안에 묘한 감정이 요동쳤다.

“……노아.”

그 이름을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처절한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닿은 것도 아닌데 제 이름을 부른 걸 알기나 하듯이, 잠이 든 아이의 이마가 꿈질거렸다.

노아. 노아. 로비엔은 앞으로도 수백 번, 수천 번은 더 부르게 될 달콤한 이름을 입안으로 곱씹었다.

그때야 알 수 있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견딜 수 없었던 그 절박하고 처절했던 충동은, 제 어미를 닮아 아름다운 미인으로 자라게 될 어린 공주님을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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