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48)화 (148/151)

# 20.

그 이후, 로잘린은 다시 본래의 성격을 되찾았다. 아이의 안위를 생각한답시고 한동안 설렁설렁 일하는 것 같더니, 일에 대한 열정이 다시 이전으로 복귀한 모양이었다.

“폐하. 눈이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로잘린을 대신하여 우편물을 중요도에 따라 분리하고, 답장을 작성하고 있던 라나가 종잇장을 들여다보기에 여념이 없는 로잘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주인은 늘 중간이 없었다. 활동을 지나치게 하지 않는 로잘린도 문제지만, 활동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로잘린도 걱정이었다.

“아, 괜찮아요. 은행 보고서는 어디에 있어요?”

한쪽에 정리해 둔 서류를 찾아 든 라나가 밀레스의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로잘린은 고맙다는 듯 싱긋 웃어 주고는 제 일에 몰두했다.

로잘린의 상단은 이제 단순히 상단 수준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왕실세를 줄이고, 직속령의 영주세를 없애면서 왕실의 예산이 줄어든 만큼 여러 사업으로 발을 뻗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로단테 백작가의 밀레스가 로잘린을 돕고 있기는 했지만, 로잘린이 가장 위에서 관리 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일거리를 숨겨 버릴 수도 없었다. 숨겨 봤자 로잘린의 명령 한 번이면 다시 내어놓아야 할 처지였으니까. 아이를 막 출산하고서도 이러고 있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폐하.”

로잘린이 시선을 들어 라나를 응시했다.

“폐하의 가문에서 계속 서신이 오는데 앞으로도 무시할까요?”

라나가 우편물 사이에서 리리엔의 서신을 꺼내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동안 드마셸이 보내왔던 서신은 로잘린의 명대로 모두 난로에 던져 태워 버렸지만, 리리엔의 편지는 처음이었다.

물론 로잘린이 제 가문이나 그 구성원들에게 큰 애정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출산을 곧 앞둔 상황에서는 마음이 또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로잘린이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없이 손을 뻗었다. 라나는 칼로 편지 봉투를 찢은 후, 붉게 혈색이 도는 로잘린의 손바닥 위에 리리엔의 편지를 올려놓았다.

로잘린의 건조한 시선이 리리엔의 편지 쪽으로 향했다.

<칼라브리아의 왕비께.

완연한 봄입니다. 태중 아기씨와 폐하 모두 건강하다는 소식이 칼라브리아 내에 자자하여 크게 걱정할 일이 없군요. 날이 따뜻할 때 몸을 푸실 테니 걱정도 한결 덜합니다. 제가 세 아이를 건강하게 낳았던 것을 고려하면, 폐하께서도 순산하고 몸을 회복하실 테니까요.

사실,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폐하의 아량으로 수도의 저택을 처분하고, 그 돈으로 저와 함께 브루타령으로 이사했습니다. 할 줄 아는 게 하나뿐이라, 소소하게 장사를 시작하실 모양이에요. 그럭저럭 키워 낸다면 성공적이고, 망한다면 그것도 복일 테지요. 다만 아버지께서도 늙었는지 이전의 탐욕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폐하께서 사업을 계속 키워 가고 계신다는 점을 무척이나 뿌듯해하면서도, 그 자리에 본인이 없다는 걸 슬퍼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은 모양이에요.

다시 만나 뵐 날은 오지 않을 테지만, 태어날 아기씨와 함께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리리엔 칼라브리체 린데만 드림.>

로잘린 리리엔의 편지를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라나가 조심스럽게 로잘린의 눈치를 살폈다.

“안 좋은 내용이라도 보내왔습니까?”

라나의 질문에 로잘린이 고개를 저었다. 리리엔은 시종일관 무척이나 예의 발랐다. 한때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딱 이 정도의 관계여야 옳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게 조금 서글펐을 뿐이었다.

“브루타령에 사람을 보내서, 아버지가 사는 곳을 찾아보도록 해요.”

로비엔이 선왕비를 안타까워하듯, 제 아비를 안타까워하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어쩌면 이렇게 부부가 똑같이 정에 약한지.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하니, 좀 지켜볼까 싶어서.”

하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억지로 보가트 상단을 빼앗아 왔다고 생각하면, 조금쯤은 기반을 다지도록 도와줄 만도 했다. 그가 발란처럼 허튼 희망이나 욕심을 품을 정도가 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리하겠습니다. 답장은 따로 하지 않으실 거지요?”

로잘린이 긍정했다. 리리엔과 살가운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괜찮은 자매 사이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애초에 리리엔도 로잘린에게서 답장을 받는 것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드마셸 역시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 증오, 원망, 죄책감, 미안함과 같이 얽히고설킨 감정은 이것으로 모두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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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경제적 가치를 운운하며 봉건제의 유상 폐지를 논하던 의회가 현재 가치의 30배를 주장하다가 기어코 농민들에게 점령을 당했다.

농민들에게 호되게 얻어맞은 의회가 로비엔의 중재를 통해 최대 2배의 보상 폐지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되었다. 의회는 그를 기반으로 수정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왕실의 존재는 여전했다. 의회 마음대로 국가의 체제를 바꿀 수는 없었다. 국왕 시해 미수 사건 이후로 왕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졌고, 사람들은 삐거덕거리면서도 안정을 찾아가는 나라를 굳이 체제 전복으로 망가뜨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제 어미가 노파심을 가졌던 과거와는 상반되게 건강히, 무럭무럭 자라났다. 가슴과 비슷한 높이로 봉긋 솟은 수준에 불과했던 배는 이제 완전히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아이가 걷어찰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도 있었다.

산달이 가까워질수록 배가 무거워 잠을 설치는 일은 예삿일이거니와, 잠을 자다가도 아이의 움직임에 깨는 날도 잦아졌다.

늘 품에 끼고 자는 아내가 바르작거리며 잠을 설치니, 로비엔 역시 낮아진 수면의 질을 경험하고 있었다.

“폐하의 침실에서 편히 주무세요.”

미안해서라도 로비엔과 같이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러니 로잘린은 늦기는 했어도, 그의 침실로 가서 편히 자라고 권했다.

“비께서는 이제 내가 없이도 잠이 잘 오는 모양이지요.”

그러나 로비엔은 제 궁의 침실로 가는 대신, 모로 누운 로잘린을 뒤에서부터 꼭 끌어안았다. 둥글게 부푼 배 앞에서 깍지를 껴 잡은 손은 결코 로잘린을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나요. 폐하께서 편히 주무셨으면 하는 마음에 드린 말씀인걸요.”

로잘린이 새침하게 부정했다. 돌아누워 로비엔과 얼굴을 마주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어차피 부른 배 때문에 침대에 등을 대고 눕기도 어렵고, 몸을 가까이 붙일 수도 없어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아무리 불편해도 비 곁에 있는 게 좋아요.”

“…….”

“아이도 언제 태어날지 모르고.”

잠기운이 밴 듯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로잘린이 작게 몸을 움찔했다. 이처럼 몸을 가까이 붙이고 있는데도 관계를 갖지 않은 게 아주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기억이 났다. 그러니 나지막한 제 사내의 목소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괜히 몸이 홧홧한 것이다. 로잘린이 괜히 마른 입술을 축이며 눈을 깜빡였다.

“……불편하진 않으세요?”

“무엇이?”

로비엔이 가느다란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로비엔이 입술을 묻은 피부가 그의 숨결에 성적인 긴장감으로 파닥거렸다.

“밤도 같이 보내지 못하잖아요.”

뜻밖의 이야기에 로비엔이 우뚝 굳었다. 물론 사랑하는 여자를 품에 안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성불구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지성인이었다.

“괜찮지 않다고 하면, 위로해 주시려고?”

참고 있는 사내를 굳이 자극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최대한 장난스럽게 대꾸하려고 노력했으나, 목소리가 하릴없이 욕망에 잠겨 들었다.

“원하신다면요.”

애써 사내로서의 욕망을 희석하려 하는 그의 노력을 무시하듯 로잘린이 대답했다. 제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로비엔이 속에서부터 깊게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염치없는 사내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 밤이 그들의 끝이 아닐진대, 며칠을 견디지 못해 고생시키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로비엔의 거절을 곱씹던 로잘린이 조용히 뒤로 손을 뻗었다.

“로잘린, 그만.”

로비엔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거친 숨이 귀로 쏟아졌다. 제가 종용한 사내의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져, 불현듯 목이 탔다.

“저도, 저도 원해요.”

로비엔은 끝내 허락해 주지 않을 요량인 듯했다. 그의 손에 단단히 틀어 잡힌 손목은 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강하게 부는 바람에는 끝내 버텨도, 부드러운 햇빛에는 지는 것이 로잘린의 남자였다. 로잘린이 숨을 헐떡이며 내뱉는 말에 로비엔이 이를 악물었다.

결국, 로비엔의 손이 긴 잠옷을 헤치고 다리를 무도하게 훑었다. 로잘린은 불처럼 뜨겁게 느껴지는 로비엔의 손 아래에서 두 허벅지를 바짝 붙이며 잘게 떨었다. 축제 때 눈이 맞아 으슥한 곳에서 급히 일을 치르는 가벼운 것들처럼 몸을 겹치려던 찰나였다.

“자, 잠깐……! 잠깐만요!”

로잘린이 등 뒤로 팔을 허우적거리며 외쳤다.

“왜 그래요?”

로비엔이 놀라 행동을 멈추고 상체를 일으켰다. 로잘린이 갑자기 뭉친 배를 감싸 안으며 희미하게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배가 당겨서…….”

배를 감싸 안은 로잘린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로비엔이 미간을 찌푸리며 달빛 아래 간신히 모습을 드러낸 제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궁의를 부를까요?”

커다란 손이 로잘린의 손등 위를 겹쳐 잡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약간의 죄책감도 있었다. 아무리 로잘린이 충동질을 했어도 참았어야 했는데, 그걸 못 참고 달려들려던 제게 아이를 놀라게 한 잘못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이제 괜찮아요. 괜찮을 것 같아요.”

한동안 몸을 웅크리고 작게 끙끙거리던 로잘린이 몇 분이 지나자 인상을 풀었다. 괜찮다며 제 옆자리를 다시 손바닥으로 두들기기까지 했다.

로비엔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로잘린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옆에 다시 몸을 뉘었다.

“다신 비께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로비엔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로잘린이 푸스스 웃었다.

“폐하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에요. 종종 이러는 거 아시잖아요.”

“오늘 밤은 안 그럴 수 있었던 걸, 놀라게 만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로잘린 곁에 누운 로비엔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대기조차 조심스러운 듯,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로비엔이 내쉬는 안도의 숨에 로잘린은 머쓱함을 느꼈다.

“그런 건 아닐 텐데…….”

로잘린이 작게 중얼거리며 조심조심 몸을 돌렸다. 어둠 아래서도 마주친 물빛 눈동자의 색이 선명했다. 저는 편히 누울 수 있는데도, 기어이 불편하게 모로 누워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래도 손은 잡아 주세요.”

로잘린이 졸랐다. 직전까지 아내의 충동질과 그에 동참한 결과로 놀라고도,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사내가 그 손을 감싸 쥐었다. 제 손을 단단히 움켜잡는 감각을 느끼며 로잘린이 어린애처럼 배시시 웃었다.

예쁘지나 않으면 말도 안 하지.

“이제 그만 자요.”

작은 손등을 다독이며 잠을 청할 것을 요구하자, 로잘린이 못 이긴 척 눈을 감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던 로비엔 역시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애써 다시 청한 수면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폐, 폐하…….”

작게 부르는 목소리에 번쩍 눈이 뜨였다. 눈에 들어온 것은 다시 몸을 웅크리고 끙끙거리는 로잘린이었다. 언제 뒤바뀌었는지, 로비엔의 손을 억세게 움켜쥔 로잘린의 손에는 땀이 흥건하게 배어 있었다.

“로잘린, 잠깐만 견뎌요.”

이불보 역시 푹 젖어 있었다. 드디어 그 작은 것이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려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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