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47)화 (147/151)

# 19.

허리를 죄지 않는 편안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아무리 날이 따뜻해졌대도 임부의 몸이 찬 공기에 드러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외투를 가져온 마리가, 저지하는 손길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녀를 저지한 건 로비엔이었다.

“다른 외투를 가져올까요?”

로비엔의 눈에 마땅치 않았던 걸까 싶었던 마리가 질문했다. 로비엔은 작게 고개를 젓고, 마리에게 손을 뻗었다.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마리가 얼떨떨한 얼굴로 로잘린의 눈치를 살피며 로비엔의 손에 조심스럽게 로잘린의 외투를 놓아 주었다. 그대로 로잘린의 등 뒤로 다가간 로비엔이 로잘린의 팔 근처로 소매를 들이밀었다.

“폐하께서 왜 제 시중을 드세요?”

로잘린은 그 소매에 팔을 집어넣는 대신, 놀란 눈으로 로비엔을 돌아보았다. 로비엔이 짧게 혀를 차며, 로잘린의 몸을 다시 저와 등지도록 돌려놓았다.

“임신한 아내를 챙겨 주는 사내로서의 즐거움도 누려 보고 싶어서요.”

담담한 목소리에 밴 즐거움은 진심이었다.

로잘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재촉하듯 흔들리는 외투의 소매를 확인한 그녀가 못 이긴 척, 그 소매에 팔을 꿰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보석으로 만들어진 단추를 잠근 로비엔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참 이상한 것을 좋아하신다니까.”

제 몸 하나 움직이는 것도 귀찮을 때가 많은데, 임신한 아내의 시중을 들고 싶어 하는 사내가 어디 흔할까? 로잘린은 로비엔의 특이한 지점을 지적하며 키들거렸다. 그가 이상하든 수상하든, 저도 즐겁기는 했다.

“갈까요?”

로비엔이 팔을 내밀자, 로잘린이 망설이지 않고 그 팔을 붙들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서는 터라 마음이 하릴없이 들떴다.

“발밑 조심해요. 혹시 미끄러지더라도 내가 붙잡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계단에 이르자, 로비엔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단단한 팔을 허리 뒤로 두르는가 싶더니,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옆구리께를 붙들었다. 한 손은 그의 빈손에 쥐어져 있었고, 등도 반쯤 그의 몸에 겹쳐져 있었다. 계단에서도 공포감은커녕,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이 들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사람들에게 그대와 아이를 보일 만한 곳.”

로잘린이 막 베르타 궁을 나서며 질문했다. 로비엔이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로잘린을 이끌었다.

어찌 되었건 그가 자신을 해할 리 없다는 믿음으로 충만한 로잘린은 오랜만에 간지러운 바람이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그와 발 맞추어 걸었다. 막상 나오니 기분이 들뜬 듯 두 볼이 상기된 로잘린을 내려다보는 로비엔의 눈동자에 간지러운 감정이 맴돌고 있었다.

“날이 정말 따뜻해졌네요.”

“그러니 이제는 나와서 산책을 하도록 해요. 레이디 메르센데티가 무척 걱정하고 있으니.”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머쓱한 것 같기도 했다.

“여긴…….”

왕실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는 교당 맞은편, 왕궁의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외벽 앞에서 로비엔이 걸음을 멈추었다. 로비엔과 결혼한 후, 짜릿한 마음으로 사람들과 자유로운 도시를 내려다보았던 그 장소.

“밖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로잘린은 그제야 두껍고 높은 벽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과거에는 드마셸의 돈으로 처바른 영광이었던 수많은 인파가 그 너머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 비를 사랑해 마지않는 이들이니 걱정하지 말고.”

“……누가 걱정한다던가요?”

머쓱함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얼마 전까지 겁이 나서 굴속에 숨어 있던 주제에 이제 와 강한 척하는 제 아내의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폐하!”

“얼굴을 보여 주세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란 로잘린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콩깍지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을 객관적이라 생각하는 팔불출 같은 사내가 로잘린의 손을 잡아 한 걸음을 더 떼도록 도와주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마른침을 삼킨 로잘린이 크게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잠시 나타났다가 급히 사라지는 얼굴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왕비님!”

저도 모르게 몸을 물려 뒤로 숨었던 로잘린이 두꺼운 벽을 붙잡고 다시 몸을 내밀었다. 마침내 로잘린을 발견한 사람들이 환호했다. 다리 너머까지 꽉 찬 인파가 로잘린을 향해 손을, 손에 들린 모자나 손수건 따위를 흔들어 댔다.

로잘린은 저를 반기는 낯선 환호성에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국왕 폐하도 계신다!”

한 걸음 다가온 로비엔이 로잘린을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제 사내의 안온한 품에 안긴 로잘린의 얼굴에 그제야 배시시, 온기 섞인 미소가 돌았다. 뒤늦게서야 이 많은 사람이 제가 안전한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고, 걱정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로비엔이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한층 더 격해지고, 높아진 소리가 온 사방을 뒤흔들었다.

로비엔의 가슴팍에 기대어 웃음을 터뜨린 로잘린 역시 손을 들어 군중을 향해 흔들어 주었다. 어디선가 기적 같은 꽃망울이 터지며 봄의 향기가 흘러오는 듯도 했다.

“건강하세요, 왕비님!”

“순산하세요!”

저를 향한 축복의 인사를 즐거이 받아들이는 로잘린의 얼굴에 기쁨이 한가득 배어 있었다. 늘 날카롭게 세우고 있던 경계심도 한껏 누그러져 있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나와 마리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폐하.”

그 순간, 로잘린이 멈칫하며 로비엔을 올려다보았다. 로비엔이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놀란 눈으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로잘린은 옆구리에 닿은 그의 손을 끌어, 동그란 배 위에 올려놓았다.

늘 기척을 죽이고 있던 아이였다. 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에 그치던 미약한 태동은 늘 로잘린의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제 어미의 배를 두드리는 손인지 발인지 모를 것에서 흥분이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저를 걱정하고, 그 탄생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제 아이의 태동을 제대로 느낀 로비엔은 어떠한 걱정도 없이 환하게 웃는 제 아내와 마주 보며 기쁘게 웃었다. 그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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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이루어진 뜻밖의 만남은 로잘린의 코끝이 빨개진 이후에 끝났다. 아무리 따뜻하대도 바람이 드러난 얼굴을 자극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제 망토까지 로잘린의 어깨에 둘러 끌어안은 로비엔이 인사를 마친 후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남은 흥분의 여진인지, 로비엔의 망토 위 담요까지 둘러쓰고 더운 탓인지 로잘린의 드러난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저는 정말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어요.”

라나는 아마도 전자인 것 같다고 짐작했다. 로잘린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뜻밖의 상황에 대한 놀람과 기쁨, 그리고 흥분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행사를 마련한 로비엔은 제 비의 들뜬 얼굴을 즐기며 손짓으로 아랫것들에게 나가 볼 것을 명령했다. 보통은 잡다한 수행을 위해서라도 믿는 수족 하나쯤은 남겨 두기 마련인데, 그녀의 주인들은 항상 둘만 남고 싶은 모양이었다.

라나는 가장 마지막으로 로잘린의 침실을 떠나며 조금의 공간도 없이 문을 꽉 닫았다. 과연 로잘린과 관련된 문제는 모두 그녀가 가장 의지하는 저 사내, 로비엔만이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이가 계속 움직여요, 폐하.”

로잘린이 로비엔의 소매를 잡아끌며 조잘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순간 이후 아이가 무척이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부모를 걱정시키더니, 이제야 움직일 마음이 들었나 보네요.”

로비엔의 손이 둥근 배 위를 크게 쓰다듬었다. 제 아비의 체온인 줄 아는 건지, 아이가 다시 한번 반응해 왔다. 로비엔의 눈매가 조금 더 느슨하게 휘어졌다. 겉으로야 아무리 덤덤한 척해도, 그가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가 너무 무서워하고 긴장해서 아이도 눈치를 보고 있었나 봐요.”

그저 전해지는 체온과 움직임만으로도, 기이할 정도로 흡족했다. 둘은 손을 겹친 채 한동안 같은 순간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전엔 그냥 이유 없이 누가 또 아일 미워하지 않을까, 해치지 않을까 더럭 겁이 났는데.”

“…….”

“저를 응원하고, 우리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저렇게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녹빛 눈동자에 물기가 맺혔다. 다가온 로비엔의 손끝이 눈가를 매만지며, 감은 눈 밖으로 밀려나는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고, 제가 너무 바보 같고 그래요.”

“아이가 들어요, 로잘린. 예쁜 말만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는 귀도 있을 것 같은데.”

조금은 장난스럽게 내뱉는 말에 로잘린이 울먹거리다 말고 웃었다.

“이름을 짓고 싶어요.”

“이름?”

“계속 불러 주고 싶어요. 제 이름이라는 걸 알 수 있도록.”

그러다 문득, 귀가 있고 들을 수 있다는 말에 아이의 이름 문제가 떠올랐다. 제 어리석은 초조함으로 아이에게 여태까지 이름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생각한 이름이 있어요?”

로잘린이 고뇌하는 동안 로비엔의 손은 자연스럽게 담요를 거두고, 그의 망토와 로잘린의 외투를 벗겼다. 그의 손길에 이끌려 간 로잘린이 마땅한 이름을 생각해 냈을 때는 이미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는 상태였다.

이불을 덮어 주면 될 일인데, 로비엔은 굳이 제 팔로 로잘린의 머리통을 괴어 주고 몸을 바짝 붙여 체온을 나누어 주려고 했다.

“생각한 이름이 있어요?”

하지만 그 품에서 벗어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가슴팍에 볼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생각해 둔 이름이 있나요?”

“글쎄. 여아라면 에일린, 남아라면 에이든이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 비께서는요?”

로비엔이 말을 할 때마다 그의 가슴팍이 오르내리며 작은 진동을 전해 왔다.

“저는 그냥 노아. 노아요.”

“뜻이 따로 있어요?”

“이처럼 활발한 아이라면 여아여도 무척이나 씩씩하게 자랄 것 같거든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로잘린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이야기에 로비엔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도 마음에 들어요. 노아라는 이름. 뜻도 좋은 듯하고.”

어쩐지 언젠가 로잘린이 달갑지 않게 들어 봤을 소리 같아서였다.

“노아.”

그래서 그는 이제야 막 붙인 아이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나지막하고 무던한 듯하지만, 애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노아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제 아비의 목소리에 대답하듯 툭 걷어차는 작은 태동을 느낀 로잘린이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로비엔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붙이고 비비적거렸다. 제 아내를 향한 친애의 표시였다.

불필요한 긴장과 걱정, 그리고 가슴에 박힌 말뚝 같았던 공포심이 일시에 녹아들었다. 이제는 로잘린의 마음 어디에서도 그러한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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