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46)화 (146/151)

# 18.

로비엔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서둘러 베르타 궁으로 찾아갔을 때, 모든 일은 거의 마무리에 이르러 있었다.

얼마나 놀란 건지 창백해진 얼굴의 로잘린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기용품을 구매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라나, 그리고 내내 로잘린의 곁을 지켰던 마리는 궁의로부터 주의사항을 안내받고 있었다.

다급하게 나타난 왕을 발견한 모두가 로비엔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로잘린.”

“폐하.”

그 모든 것을 차게 지나친 로비엔은 로잘린에게 다가가,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올 테니 쉬고 있어요.”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 준 로비엔이 작게 속삭였다.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로잘린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불 귀를 잡고 가슴팍까지 완전히 덮어 준 로비엔이 굽힌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명을 원하는 로비엔의 눈동자가 응접실로 따를 것을 명령했다. 궁의, 라나, 마리가 동시에 그를 따라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산책하러 다녀오신 이후, 왕비님께서 갑자기 하혈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산책하러 다녀오실 동안은 어떠한 문제도 없었나?”

마리가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떠한 소란이나 문제도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하혈을 보였다니. 로비엔 역시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이지?”

“왕비님의 몸이나 아기씨가 문제라기보다는, 지나치게 걱정하고 압박감을 받으시는 탓인 듯합니다.”

궁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 태동이 적은 편이긴 했지만 로잘린이 분명히 느끼고 있었고, 로잘린의 몸 상태 역시 몇 달 전을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상태였다.

“또 조산할 우려가 있는 건…….”

“지켜보아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진정이 될 때까지만 푹 쉬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이야기였다. 로비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소식이라도 듣게 된다면 로잘린이 견디지 못할 것을 알아서였다.

“마음을 편히 먹으실 수 있도록 모두 도와주셔야 합니다.”

궁의가 덧붙인 말에 라나와 마리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라나는 결코 잘 모른다거나 하는 말로 로잘린을 불안하게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저녁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모두 물러나 있도록.”

로비엔의 명령에 모두가 인사를 올린 후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불안해하는 아내를 달래야 할 의무가 있는 로비엔은 조심스럽게 로잘린의 침실에 발을 디뎠다.

“로잘린.”

잠이 들기는커녕, 로잘린은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그리기라도 하듯 천장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로비엔은 애써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미 들었겠지만, 아이는 무사하다고 하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추운 날 산책하러 나가서 그런 걸까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저었지만, 로잘린은 쉬이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 탓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오랜만에 나가서 공기를 쐬는 게 좋아서, 몸이 굳은 줄도 몰랐어요. 멍청하게 밖에 오래 서 있었던 게 해가 된 것 같아요.”

“궁의가 절대 그대의 탓이 아니라고 했어요. 노파심이 너무 많아 그런 듯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쉬라고 했습니다.”

로비엔의 부드러운 손이 달래듯 볼과 턱을 부드럽게 스쳤다. 눈물이 맺힌 듯 흐릿한 빛을 띤 눈동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로비엔이 작은 얼굴에 몇 번이고 입맞춤을 남겼다. 안심하라는 듯 잘게 와 닿는 입술의 감촉이 긴장과 두려움으로 차갑게 굳어 있던 손끝으로 혈류를 밀어냈다.

“궁의가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모체의 불안은 아이에게도 전염된다고 했어요.”

로비엔의 말에 로잘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로비엔은 여전히 공포감이 서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직감적으로 로잘린이 제 말을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아 주세요.”

약속 먼저 하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구는 태도를 모른 척할 재간이 없었다. 더구나 이처럼 연약해진 로잘린이라면.

로비엔은 겉옷도 벗지 않은 상태로 침대에 올라 로잘린을 당겨 안았다. 단단한 가슴,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얼굴을 댄 로잘린은 그의 심장 박동을 느끼고서야 그의 조언대로 휴식을 위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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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엔의 예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로잘린은 다시 방어적으로 굴기 시작했다. 자신이 믿지 않는 사람과는 만나지 않으려고 했고,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으며, 태내에 왕손을 품은 제 일신의 안위에 집착했다.

과거, 임신한 지 6개월이 막 지난 시기에 계단에서 떨어진 로잘린은 첫아이를 사산한 경험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상황이 돌아오니 저도 모르게 예민해지는 것이리라.

로잘린이 왜 갑자기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라나와 마리는 그것이 로잘린의 트라우마라는 것을 알아 안쓰러워했다.

‘많이 불안해하시는데, 괜찮을까요?’

‘강한 분이니 이겨 내실 거야.’

라나는 마리의 걱정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라나의 얼굴에도 염려가 뒤섞여 있었다. 로잘린은 강하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로잘린도 강한지는 의문이었으므로.

“폐하. 오늘은 바깥이 무척 따뜻합니다.”

“그래 보였어요.”

로잘린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산책을 나서시는 건 어떨까요? 폐하께서 선물하신 털옷을 입으시면 괜찮을 거예요.”

로잘린이 바깥으로 나서지 않은 지가 제법 되었다. 모두의 걱정이 심화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니. 괜찮으니 창문만 조금 열어 줘요.”

겨울보다는 봄으로 추가 기울어진 날씨, 햇볕은 한층 더 온기를 띠고 날카로운 빛을 꺾었다. 말라비틀어진 것 같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는 것은 창 너머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로잘린은 라나의 제안을 거절하고 푹신한 침대의 쿠션에 등을 기댔다.

라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열었다. 그나마도 전체를 다 열지는 못하고, 반쪽만 열어 둔 채였다. 아직은 서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와 자유롭게 사방으로 내달렸다. 로잘린은 그 공기의 흐름을 침대 위에서 느끼고 있었다.

“궁의도 이제는 마음껏 돌아다녀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폐하.”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로잘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궁의도 이제는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했는데, 로잘린은 봄이 되기 전까지 침실을 벗어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추운 날씨가 아이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활동을 제한하는 건 아이에게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아, 라나야말로 로잘린을 지켜볼 때마다 걱정이 됐다.

라나가 한마디를 덧붙이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로잘린이 눈짓했다. 종종걸음으로 문으로 다가간 라나가 손잡이를 당겼다.

“칼라브리아의 국왕을 뵙습니다.”

“예를 거두도록.”

제 사내를 발견한 로잘린의 얼굴에 미소가 흐드러지게 번졌다. 방 안에 둘만 남도록, 라나가 눈치 좋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잠시 밖에 나가 보자고 제안하려고 왔어요.”

가까이 다가온 로비엔이 침대보 위에 늘어져 있던 손을 잡아 올려,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애정 표현에 편안하게 웃고 있던 로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밖에 나가자고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로비엔은 그동안 로잘린이 침실에서 두문불출해도 조용히 기다렸다. 날씨가 따뜻해지기 전까지는 산책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표현하자, 그 이후로는 굳이 산책을 나서자 제안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자신을 둘러싼 온갖 소문으로 주변이 시끄러운 것을 알면서도 침실에서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날이 봄처럼 따뜻해요. 걷기에 괜찮으니 오랜만에 나서 보면 좋겠는데.”

“음, 그렇지만…….”

직전에 라나의 제안을 거절했던 로잘린은 머뭇거리며 로비엔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물러날 것 같지 않은 기세였다.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로잘린.”

“…….”

“내가 곁에 있으니 당신을 해치려는 자도 없고, 그대의 몸이나 아이의 상태도 충분히 안정되었으니.”

그 자유분방한 성격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리 없다고 확신하는 목소리였다.

“사람들에게도 태어날 아이를 미리 선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사람들이요?”

로잘린의 되물음에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태어날 아이를 궁금해하고 있어요.”

“……아이를요?”

“유례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왕비의 아이니까.”

왕이 유례없이 사랑하는 왕비이며, 칼라브리아 인들이 전에 없이 가엾어하고 아끼는 왕비라는 이중적인 의미였다.

로잘린이 찬찬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침실에서 나서지 않는 동안, 왕비가 아이를 또 유산해서 침실에서 요양 중이라는 헛소문이 장하게 도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로잘린은 그러한 소문에서 자신이 조금만 삐끗해도 사람들이 선왕비처럼 물어뜯을 기회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여력이 되지 않아, 몇 명을 제외하곤 인간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던 탓이었다.

“기사에 실린 거짓 소문 때문에 더 사람들 앞에 서지 않으려는 거 알아요.”

로비엔이 손등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간질였다. 어쩐지 그게 마음마저 간질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로잘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당신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요.”

“제 무사함이라뇨?”

로잘린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건 온 사방에 소문이 난 참인데, 제 안위를 대체 왜 궁금해하느냐는 목소리에 의문이 배어 있었다.

“나에 대한 신뢰가 고작 이쯤인가 싶기는 하지만, 내가 비에게 유산한 책임을 묻고 새로운 왕비 감을 찾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로비엔이 과장되게 한숨을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로잘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편안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래서 비께서 무사한지, 내가 내친 게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무도한 자들이 제법 됩니다.”

밖으로 나설 것을 제안하는 로비엔의 목소리 역시 한결 편안해졌다. 로잘린이 제 제안에 응답하리라는 것을 직감한 덕분이었다.

“나갈게요. 감히 폐하의 명예를 위협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되니까.”

직전까지 거절하려던 마음도 잊고, 로잘린이 순순히 대답했다.

로비엔이 큰 결심을 한 그녀를 칭찬하듯 둥근 이마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하녀들을 불러 환복을 도우라 하지요.”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비엔이 설렁줄을 흔들어 하녀를 호출했다.

창밖에서 머리를 들이민 햇볕은 자신에게는 어떠한 공격성도 없음을 증명하듯 부드럽게 알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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