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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45)화 (145/151)

# 17.

그 후로도 한 달가량은 고생해야 했다.

거의 물처럼 묽은 수프는 숟가락보다는 들고 마시는 편이 편할 정도였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음식을 섭취하며 한 달을 버텨 내자, 그 이후에는 사정이 한결 나아졌다.

배 속의 아이도 배가 고픈 모양인지 메슥거림이 덜해졌다. 갑자기 당기는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과일 종류를 입에 넣어도 신물이 올라오지 않았고, 글로리를 가졌을 때처럼 잘게 다진 고기를 넣어 만든 수프도 먹을 만했다.

“괜찮습니까?”

로비엔의 물음에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곁을 지키고 있던 하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입덧하는 고생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은 로잘린인데, 안도는 로잘린을 제외한 모두에게 찾아왔다.

“이젠 정말 괜찮대도요. 어서 드세요.”

로잘린이 두 번째로 겪는 입덧에 의외로 담담했던 데에 비해서 로비엔은 로잘린의 모든 행보에 예민하게 반응한 탓이었다. 로잘린이 먹지 못하거나, 어딘가 편치 못한 기색을 보이면 그날 하루는 궁이 뒤집혔다. 궁의가 로비엔에게 불려 갈 때마다 땀을 바가지로 쏟는다는 말은 거짓 취급하기에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런 지경이니 궁 내에서는, 왕비는 왕에게 유리 인형 취급을 받는다는 말이 심심찮게 떠돌았다. 저를 인형 취급 한다며 기분 나빠 할 줄 알았던 로잘린은 의외로 유쾌하게 웃고 지나쳤다.

“이 작은 녀석이 몇 명을 힘들게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로잘린이 수프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그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고마우면서도 자연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제 부모 속도 모르고.”

테이블 위로 뻗어 온 로비엔의 손끝이 로잘린의 입가에 묻은 액체를 가볍게 문질러 닦았다. 냅킨에 손에 묻은 것을 가볍게 닦아 낸 로비엔이 부드럽게 미소를 보였다.

“대단한 녀석이 나오려는 모양이죠.”

태어나기도 전부터 모든 사람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하는 걸 보면 굉장한 녀석일 거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희미한 장난기와 애정이 배어 있었다.

“제 입은 제가 닦을 수 있어요.”

로잘린이 그의 재빠른 행동을 타박했다. 어린애처럼 묻히고 먹었다는 게 부끄러운 듯, 냅킨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비를 챙기는 것은 내 즐거움인데 빼앗으시려고요?”

설마하니 그러겠냐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제법 능청스러웠다. 근처에 아랫것들이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왕이라는 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 요망한 남자.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키며 로잘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식사나 마저 하세요.”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탓에 도리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식사가 끝나면 산책하러 갈까요?”

“……좋아요.”

로잘린은 직전까지 그가 못마땅한 사람처럼 툴툴거렸다는 사실도 잊고 산책이라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결국, 로비엔이 즐거운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모든 시간은 그처럼 평화롭게 흘러갔다. 누구도 그들을 위협하지 않고, 누구도 이 평화를 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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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은 배가 다시 동그랗게 불러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계단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마리, 손을 좀 잡아 주렴.”

“네! 제 손을 잡으세요, 폐하. 계단 조심하시고요.”

“배가 불러 오기 시작하니 거동이 아무래도 쉽지 않아지네.”

로잘린이 머쓱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근래 들어 자신이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베르타 궁이 온통 어수선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내렸던 계단이 다시 공포감을 자극하기라도 한 건지,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로잘린의 손을 붙잡을 수 있는 건 수족이나 다름없는 라나, 마리, 그리고 반려인 로비엔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마땅한 때에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온 궁을 뒤집어 찾느라 분주해질 수밖에.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평소와 같았다.

“자. 무사히 내려왔어요, 폐하.”

안심시켜 주듯 마리가 덧붙이는 말에 로잘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고마워.”

“고맙기는요.”

마리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로잘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나서야 안심한 기색으로 혼자 걸음을 뗐다. 시원한 공기를 쐬고 싶어 산책을 나선 참이었다. 물론 아랫것들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데에는 취미가 없어, 동행한 것은 마리 혼자였다. 라나는 어딜 갔는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좀 춥기는 해도 공기가 시원해서 좋구나.”

2월, 바야흐로 사시사철 푸른색인 나무들을 제외하고는 죄다 벌거벗은 몸으로 눈을 온통 뒤집어쓴 계절이었다. 로잘린은 큰맘 먹고 나선 산책길 위, 뽀득거리는 소리가 나는 눈을 밟고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무사히 산달에 태어난다면 여름으로 막 접어드는 계절에 태어날 아이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이번엔 이름을 미리 지어 두지 않을 계획이에요?’

로비엔도 그 점을 의아하게 여긴 듯 로잘린에게 물어 온 적이 있었다. 생각나는 이름이 아직은 없다고 얘기하며 둘러댔지만, 사실은 같은 시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이에게 지나치게 축복이 담긴 이름을 내려 시기를 받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야.”

다 지레짐작이고, 허튼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조금의 불안이라도 존재한다면 하고 싶지 않았다.

로잘린의 손이 드레스 아래, 볼록해진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태동이 유난히 적어 걱정이네.”

두 번째 아이는 유난히 태동이 적었다. 활동성이 좋았던 글로리 때처럼 시도 때도 없이 배를 툭툭 두드려 대던 태동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몸을 공유하고 있는 로잘린이야 그 작은 태동이라도 느낄 수 있었지만, 로비엔은 여전히 아이의 태동 한 번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 점을 무척이나 서운하게 생각했다.

날이 추워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첫 태동을 보인 날로부터 지금까지 쭉, 그냥 자신이 배 속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정도 같았으니까.

문제가 있나 싶어 궁의에게도 물었지만, 아이에게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배 속의 애를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그게 그가 로잘린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폐하. 이제 돌아가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걸었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로잘린이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겨울의 추위에 코끝이 빨개진 마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로잘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추운 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하라고 특별히 명령하셨어요.”

로잘린은 그제야 날이 제법 차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최근에 날이 추워져 바깥 활동을 많이 줄이면서 속이 답답해진 탓에, 신선한 공기를 쐬는 일이 즐거워 몰랐던 탓이었다.

“그래. 돌아가야지. 폐하께서 네게 경을 치시면 안 되니까.”

찬 데서 오래 머무르는 것은 아이에게도 좋지 않다. 그 사실을 상기한 로잘린이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를 미적지근하게 밀어내며 돌아섰다.

“마리, 코가 딸기 같구나.”

막 베르타 궁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마리의 붉은 코가 귀여워 언급하자 마리가 부끄러운 듯, 한 손으로 황급히 제 코를 덮어 가렸다.

“갑자기 딸기가 먹고 싶어.”

그 순간, 딸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의식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로잘린이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마리가 눈치 좋게 응답했다.

“주방에 전달해 놓을게요.”

하여간 제 주인을 모시는 일에서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하녀였다. 라나도 그런 편이긴 하지만, 마리의 열정을 따라잡을 순 없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지. 로잘린은 주고받는 게 확실한 사람이었다. 제 봉급을 올려 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리는 로잘린의 안전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침실로 돌아온 로잘린이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며 추위로 다소 굳어진 몸을 늘어뜨렸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주방에 다녀올게요!”

마리는 그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로잘린의 침실을 떠났다. 제 방에서 큰일이 생길 일은 없으니까.

로잘린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늘어져 있었다. 손은 습관처럼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건강하게 태어나 주렴.

매일 하는 기도처럼, 작은 바람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폐하, 마리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가 문을 두드렸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타난 마리의 손에는 커다란 그릇과 산처럼 쌓인 딸기가 들려 있었다.

“주방에 갔더니 디저트로 이미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폐하께서 드시고 싶어 하신다고 말하고 바로 씻어서 가져왔어요.”

“고마워. 잘 먹을게.”

로잘린이 웃으며 다가오는 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막 딸기가 수북이 쌓인 그릇을 손으로 받아 들었을 때였다.

“…….”

배가 조금 욱신거렸다. 아니, 뭉친 건가?

로잘린이 멈칫하며 행동을 멈추고 아직은 그리 부르지 않은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폐하?”

허공에서 멈춘 그릇이 불안한 듯 제 두 손으로 받친 마리가 의아한 얼굴로 로잘린에게 물었다.

“배가 조금…….”

“불편하세요? 궁의를 불러올까요?”

마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런 게, 태내의 아이는 로잘린과 로비엔이 만나기를 고대하는, 무조건 건강하게 태어나야만 하는 귀하디귀한 아기씨였다.

“그래 주겠니?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지금 당장 다녀올게요.”

마리가 급히 고개를 주억였다.

“폐, 폐하.”

코르셋 없이 편안하게 갖추어 입은 로잘린의 실내용 드레스 한 귀퉁이가 붉게 조금 젖어 드는 것을 발견한 마리의 눈이 그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마리 역시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놀라지 마시고요. 별일 아닐 거예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불안해하는 로잘린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날뛸 수는 없었다.

마리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딸기가 담긴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에 자리를 비운 라나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레이디 메르센데티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듯하게 로잘린을 안심시켜 줄 수 있었을 텐데!

미혼이고, 아이를 가져 본 적 없는 마리는 태연하게 로잘린을 안심시킬 수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최대한 웃는 낯으로 로잘린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하던 마리가 결국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금방 올게요, 폐하.”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움켜쥔 마리가 황급히 로잘린의 침실을 뛰쳐나갔다.

그릇에서 떨어진 딸기 하나가 바닥을 데굴거리며 구르다가, 푹신한 카펫 위에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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