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왕립 소식지는 기관을 창설할 때 무척이나 비극적인 일을 겪기는 했지만, 액땜인 것처럼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기대감을 품은 자들이 왕립 소식지를 하나씩 낚아채 갔다.
왕이 스쿠안과 맺은 동맹과 그 효과를 알린 것도, 신문사보다 먼저 로비엔의 무사함과 빠른 회복을 알린 것도 왕립 소식지였다. 그러니 나올 때마다 색다르고 좋은 소식을 담고 있는 왕립 소식지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오늘은 무슨 소식이 있으려나.”
콧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던 사내가 첫 번째로 왕립 소식지를 막 펼치자마자, 관심이 없는 척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이들이 속속들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지금의 왕실이 이처럼 유례없는 관심과 사랑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본래 사람들은 왕실을 이유 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도록 세뇌받았다. 선왕이 그처럼 제 안위에만 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따라야 할 사람이라 생각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왕인 로비엔은 모든 부문에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다. 왕실세를 조정하고, 수도와 직속령의 세금 부담도 낮추었다. 타국과 평화 협약을 맺어 대내외적인 안정도 추구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지주들과의 지리멸렬한 대립을 지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원망하거나 체제의 전복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이미 극단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한 번 고초를 치른 후 모습을 감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기는 했다.
“왕비께서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으려나?”
“아, 안 보여. 머리 저리 치우게!”
“거 같이 좀 보지, 치사하게.”
그리고 이렇듯 왕이 사랑받게 된 것은 평민 출신이었던 왕비, 로잘린의 영향이 컸다. 당연히 누려 왔던 삶에 의문을 가지고, 그의 관심 밖에 있던 것을 고려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의 힘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왕비는 구빈원을 만들어 배곯는 이들을 살펴 주고, 왕립 병원을 민간에 개방해 주기까지 했다. 지금의 왕실이 찬양을 받는 이유였다.
“뭐라고 쓰여 있나? 응?”
“왕비께서 회임하셨다는군!”
로잘린이 마침내 회임했다는 소식을 발견한 사내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와 관련하여 온갖 낭설이 떠돈 적이 있다는 사실은 모두 잊은 듯이 기뻐했다.
“뭐? 회임하셨다고?”
“불임이니 뭐니 헛소리하던 놈팡이들 주둥이가 이제 좀 조용하겠네!”
“어디서 그런 놈이 기어 나오거든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야.”
각자의 길을 가던 이들도 멈추어 선 채 은근히 대화를 엿듣다가 환호했다.
“여아일까 남아일까?”
“그게 뭐가 중요한가마는, 아무래도 뒤를 이으려면 사내아이가 좋지 않겠나?”
새로운 생명과 관련한 소식을 자양분 삼아, 건국제라도 열린 양 활기찬 기운이 이른 아침부터 시가지를 맴돌았다.
로잘린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기쁜 소식이지만, 꼭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로잘린과 로비엔, 둘 다 고려하지 못한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잘린은 입덧이 무척 심한 편이었다. 글로리를 가졌을 때도 그랬고, 두 번째 임신에도 그랬다. 그녀는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입덧을 시작했다. 사실, 이전보다 더 심해졌다.
“모두 물러나!”
접시를 든 하녀들이 문턱을 넘자마자 로잘린이 입을 틀어막았다. 라나가 황급히 손을 휘저어 하녀들을 물렸다. 하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라나의 눈동자에 가여움이 서렸다. 그녀 역시 두 아이를 가져 본 어미였지만, 이처럼 심한 입덧은 경험한 바가 없었다.
로잘린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테이블을 짚은 그녀의 가느다란 팔이 더욱 연약하게 보였다.
“이렇게 드시질 못하면 안 되는데…….”
라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였다. 로잘린 몰래 전달한 소식을 들었는지, 로비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잘린.”
“폐하.”
“왜 말 안 했어요?”
로잘린은 근 며칠간, 이미 식사를 했다는 말로 로비엔과의 식사 시간을 피해 왔다. 게다가 잠들기 전 침실에서 입덧할 일은 없으니, 로비엔은 로잘린이 심한 입덧을 경험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기진한 얼굴로 푹신한 소파의 쿠션에 푹 기댄 로잘린을 발견한 로비엔이 안쓰러운 얼굴로 한쪽 무릎을 굽히고 그 앞에 앉았다. 로잘린이 굳이 일으키려던 몸은 소파에 편히 기대도록 두었다.
“걱정하실까 봐요.”
이미 이전의 일로 라나가 로비엔에게 제 건강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게 된 로잘린은 즉시 라나의 입을 막았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것이 많은 로비엔을 그런 사소한 일로 오고 가게 하지 말란 뜻이었다.
“그대 걱정은 늘 해요. 아무 일이 없어도.”
로비엔이 한숨을 내쉬며 로잘린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비께서 이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으면 일찍이 일렀어야지.”
타박은 로잘린을 수행하던 아랫것들에게 향했다. 짧게 혀를 차며 자신들을 꾸짖는 소리에 라나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마세요. 제가 전달하지 말라 해서 그런 거예요.”
로잘린이 로비엔의 소매를 붙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그가 제 사람들을 더 질책할까 무섭다는 듯 기어이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근래에 비께서 조금이라도 드신 음식이 있나?”
“최근에는 물을 드시다가도 구역질을 하시는 터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 라나가 작게 항변했다. 며칠간 로잘린에게 여러 음식을 갖다 바쳤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을 뿐이다. 최근 로잘린은 물비린내를 맡고도 헛구역질을 했다.
“지난번에는 채소와 묽은 수프 정도는 드셨으니 식단을 그 위주로 꾸려. 고기와 이국의 향료가 들어간 음식은 모두 빼고.”
물까지 못 먹는다는 데에는 할 말이 없었다.
“먹고 싶은 건 없어요?”
로비엔이 속상한 얼굴로 로잘린을 올려다보았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당장 어떻게 해서든 구해 오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냥 쉬고 싶어요.”
기력이 달리니 잠만 쏟아졌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제 사내의 얼굴이 무력함에 젖어 든 것도 모르고, 로잘린은 저를 안아 달라며 그의 품을 졸랐다.
“모두 자리를 비워.”
로비엔의 명령에 모두가 자리를 떴다.
로비엔은 로잘린의 옆자리에 앉아, 소파의 쿠션 대신 제 가슴팍에 기댄 로잘린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어째서 생기는 아이마다 어미를 이렇게 고생시키는지.”
말할 때마다 조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로비엔의 품에 얼굴을 묻고 체향을 맡고 있으니, 속이 메슥거렸던 것도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태어나면 엉덩이를 한 대 때려 줘야겠습니다.”
푸념하는 듯한 목소리에 로잘린이 직전까지 힘들었던 것도 잊고 그의 목에 매달려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지 마세요.”
“왜요?”
“힘들게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엉덩일 때리면 속상하지 않겠어요?”
온갖 마음고생을 이겨 내고 얻은 소중한 아이였다.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도 태내에 그와 자신의 소중한 결실이 있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항상 로잘린, 당신이 먼저예요.”
“…….”
“그러니 이처럼 어미를 고생시키는 아이는 나자마자 엉덩이를 맞는대도 할 말이 없지.”
툭 던지는 말에도 애정이 한가득이었다. 로잘린은 깃털로 심장을 간질인 듯 간지러운 기분에 씰룩거리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굳혔다.
“그러니 적당히 하고, 뭐라도 좀 먹으라고 전해 줘요.”
로비엔의 커다란 손이 드레스 자락 아래, 아직 평평한 배를 덮었다. 그의 속마음처럼 따뜻한 온기에 로잘린이 더욱 편안해진 얼굴로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귀가 없어서 듣지도 못할 텐데요.”
“하지만 모체인 비와는 마음을 공유하고 있을 테니까 알 겁니다.”
로비엔이 톡, 배를 한 번 두드렸다. 아직은 콩알만큼 작아 그 존재감이 미미하고, 움직일 팔다리도 없을 아이를 타박하듯이.
“저는 더 고생해도 괜찮아요.”
“로잘린.”
“아이를 위해서라면요.”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는 듯 결연하게 입을 열려는 사내를 향해, 로잘린이 빙긋 웃었다.
“아니. 그런 고생이라면 차라리 내가 했으면 좋겠어요.”
로비엔이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둔 로잘린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올라가, 가느다란 팔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이런 팔목으로, 가느다란 몸으로 고생하다가 아이를 낳는다는 게 상상도 가지 않아요.”
그가 보기에는 그 가느다란 팔목은 사람의 팔이라기보다는 뼈에 가까웠다. 단도는커녕 부채 하나 정도나 간신히 들고 다닐 것처럼 보였다.
“글로리 때처럼,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때 살도 조금 올랐잖아요.”
로잘린이 머쓱하게 웃었다.
조금 쪘던 살은 글로리를 잃은 후 도로 빠진 지 오래였다. 로비엔도 그렇지만, 로잘린은 기본적으로 입이 짧아 무얼 오래 먹지를 못했다. 그러면서도 온 사방에 참견하고 다니기는 좋아하니, 기본적으로 살이 붙기 어려운 유형이었다.
“레이디 메르센데티가 알아서 하고는 있겠지만, 최대한 비께서 먹을 수 있는 음식 위주로, 지난번과 비슷하게 식단 구성에 신경을 쓰라고 이를게요.”
로비엔이 가는 손목 위의 살갗을 엄지로 문지르며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해요.”
로비엔은 혹시라도 또 자신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숨기거나 참지 말라고 속삭였다.
“엄청 피곤하게 할지도 모르는데요? 매일 밤 자는 폐하를 깨워서 먹고 싶은 게 생겼다고 닦달할지도 몰라요.”
로잘린이 고개를 올려, 드러난 로비엔의 목덜미에 짧게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그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어도 그런 소리를 하는지 두고 볼 작정이라는 듯이.
“얼마든지.”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무척이나 단단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에 후회가 없도록 하고 싶어요.”
“…….”
“로잘린. 당신이 서운하게 느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이 아이에게도 못 해 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원하는 것은, 좋은 것은 무엇이든 손에 쥐여 주고 싶다고. 그리하여 글로리 때처럼, 돌아보았을 때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로잘린이 로비엔의 품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 로비엔이 그녀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달라 청했던 날처럼, 그의 목소리를 빼고는 모두 평화로운 침묵에 가두어져 있었다.
자신에게 못 해 준 것은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때때로 이 사내의 깊은 마음을 마주치게 되는 순간마다 하릴없이 심장이 뛰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얼마든지요.”
로잘린이 상냥한 목소리로 그의 진심에 응답했다. 아직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조르는 일이 그처럼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면야.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