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여름밤의 기운이 막 물러날 즈음이었다. 어렴풋이 새벽빛이 어두운 하늘을 깨뜨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로비엔의 품에 안긴 채 잠을 자던 로잘린의 혼몽한 눈이 눈꺼풀 아래로 드러났다. 여전히 눈에는 잠기운이 가득 차 있는데 잠에서 깬 이유는 단순했다.
“……더워.”
더웠다.
로잘린이 고개를 뒤로 조금 틀어, 달빛을 닮은 로비엔의 머리카락을 흘끗 보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감싸듯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로비엔의 헐벗은 상체가 제 등과 닿아 있는 탓이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은 없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후끈거리며 더운 느낌이었다.
로잘린이 제 허리를 끌어안은 로비엔의 팔을 풀고, 더운 자리를 벗어나 침대 가장자리에 편하게 누웠다. 그제야 다시 편안한 잠이 사르르 쏟아졌다.
“……?”
그러나 그와 동시에 로비엔이 눈을 떴다. 내내 품 안에 안겨 있던,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체온이 사라지자 헛헛해진 탓이었다. 잠이 덜 깨서 흐릿한 시야에,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잠이 든 로잘린이 보였다.
“로잘린.”
작게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는 게 이미 곤히 잠든 것 같았다. 로비엔은 가만히 몸을 일으켜 모로 누운 로잘린의 등 뒤로 움직였다. 가느다란 몸을 품에 안고서야 다시 마음이 평온해졌다. 깨 버렸던 잠기운도 다시 돌아왔다.
“으응.”
하지만 품에 안긴 사람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나마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타인의 체온 없이 편하게 잠이 들었던 로잘린이 다시 불편하게 눈을 떴다. 언제 온 건지 저를 다시 끌어안은 로비엔의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로잘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다. 더 몸을 움직여 피할 공간도 없었고, 침대 위에서 움직이려면 아예 일어나 로비엔의 등 뒤로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로비엔의 잠까지 방해할 가능성이 있어, 선택지에 두고 싶지 않았다.
로잘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옆으로 굴러 로비엔의 품에서 제 몸을 빼냈다. 굴러떨어지기 직전 무릎과 손바닥으로 땅을 디딘 로잘린이 걸음을 옮긴 곳은 로비엔이 선물해 준 흔들의자가 있는 곳이었다.
“하암…….”
작게 하품한 로잘린이 흔들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의자가 안락하게 몸을 감싸며 흔들거리자, 조금 깼던 정신이 다시 혼몽해졌다. 이대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로잘린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편안한 잠이 누군가에게는 수면의 방해가 된다는 점이었다.
또다시 포르르, 제 품 안에서 벗어난 존재를 느낀 로비엔이 눈을 떴다. 한 번 깬 이후, 옅게 잠들었던 정신이 완전히 깨어 버린 탓이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로잘린을 찾아 움직였다.
“…….”
그리고 로비엔의 눈동자가 마침내 자신이 새로 선물한 흔들의자 위에서 편안히 잠든 로잘린을 찾아냈다. 제 품에 안겨 있을 때보다 더 곤히 잠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 로잘린은 항상 그의 품에서 벗어나 잠이 들었다. 언제는 저를 안아 주는 체온이 없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더니. 사랑이 변한 걸까.
‘사랑이 영원할 수는 없지요.’
문득 단호히 대답하던 밀리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들은 아닐 거라고 이야기했던 자신의 모습도 기억이 났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여도, 상대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저택의 다락방에서 겨우 만난 로잘린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하염없이 불안했던 마음이 다시 찾아들었다.
로비엔은 당장 로잘린의 몸을 달랑 들어다 침대로 끌어다 놓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변심한 것이 틀림없는 아내를 복잡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원망할 사람을 찾아볼까도 생각했지만, 그 순간에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은 로잘린에게 저 편안한 흔들의자를 사다 준 본인뿐이었다.
“……이러니 매일 무서울 수밖에 없지.”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난 로비엔이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잠든 로잘린 근처로 다가간 로비엔이 공기 중에 가림막 하나 없이 드러난 매끄러운 어깨 위로 얇은 이불을 둘러 주었다.
예쁘지나 않으면 말이라도 않지.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이 만족스러운 양 웃는 얼굴이 얄미우면서도, 그 이상으로 어여뻤다.
“밀리언.”
내내 다른 생각을 하는 듯 생각에 잠겨 있던 주군의 부름에 밀리언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예, 폐하.”
수심에 잠긴 미인의 얼굴은 비련한 맛이 있었다. 물론 밀리언에겐 로비엔의 미색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객관적으로는 그랬다.
“그때 사랑이 영원할 수는 없다고 말했지.”
뜻밖의 화제에 밀리언이 눈을 껌뻑였다. 언제, 어디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앞뒤를 전부 자르고 물으니, 스스로가 그런 말을 했던지 아예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밀리언은 뒤늦게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을 부여잡고 간신히 대답했다.
“그대와 그대의 아내도 그런가?”
밀리언은 그제야 제 주군의 얼굴에 떠오른 속상함을 읽을 수 있었다. 분명 왕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저희 역시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로비엔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밀리언은 평상시에는 늘 우러르는 그의 주군에게서 비치는, 그저 사랑에 빠진 청년의 모습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한심하기보다는 그것으로 그의 평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랑을 설렘으로만 계산한다면 그럴 테지요.”
고요하지만 선명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이 밀리언에게로 향했다.
“사람이란 곁에 있는 모든 것에 익숙해집니다. 아무리 아끼고 사랑한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
“…….”
“부부도 매한가지입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껴도, 서로의 존재가 익숙해지고 설렘은 작아지는 순간이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밀리언이 담담한 얼굴로 그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형태가 변한 것처럼 보일 뿐,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밀리언이 말을 이어 갈수록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던 눈동자가 제빛을 찾았다.
“익숙함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랑을 잃는 날은 요원하겠지요.”
그가 조금 변하고, 로잘린이 조금 변하더라도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당연한 이야기가 이상하게도 울림이 있었다.
“그대의 말이 옳은 듯해.”
로비엔의 얼굴에 끊임없이 드러나던 걱정이 모습을 감추었다.
밀리언은 제 대답이 옳은 방향이었다는 점에서, 들키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비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니. 혼자 서운했을 뿐이야.”
로비엔이 여상히 대답했다. 실제로도 로잘린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가 속 좁게도 로잘린이 제 품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일 뿐.
“폐하, 베르타 궁에서 사람이 들었습니다.”
홀로 상한 마음을 막 털어 냈을 때였다. 왕비인 로잘린이 기거하는 궁에서 사람이 들었다는 이야기에 로비엔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밀리언이 황급히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로잘린의 하녀 마리였다. 로잘린이 곁에 끼고 놓아주지 않는 대표적인 수행원이 마리와 라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비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마리가 채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기도 전, 로비엔이 질문했다. 마리가 어정쩡한 자세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를 굴렸다.
“칼라브리아의 국왕을 뵙습니다.”
일단 다급하게 인사를 먼저 올린 마리가 굽힌 다리를 폈다.
“갑자기 몸살 기운이 있으셔서 궁의를 불렀습니다. 레이디 메르센데티가 폐하께 전달하라 하셔서 찾아뵈었습니다.”
라나는 로비엔이 로잘린의 일이라면 무조건 촉각을 곤두세우고 보는 것을 잘 알았다. 애초에 로비엔이 로잘린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예외 없이 그에게 알릴 것을 명령한 이유도 있었다.
“궁의를 불러? 몸 상태가 얼마나 좋지 않으신 거지?”
“계속 오한이 든다고 하셔서요. 폐하께서 괜찮다 하시기는 하였지만, 궁의에게 한번 보이는 것이 좋겠다 싶었습니다.”
마리가 오해가 없도록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생각에 잠긴 듯 책상 위를 노려보던 로비엔이 밀리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밀리언, 오늘 일정은…….”
“더 없으니 가 보셔도 됩니다.”
어차피 있다 한들 로비엔은 로잘린의 일로 정신이 팔릴 게 분명했다. 밀리언은 기다렸다는 듯 로잘린에게 가 볼 것을 종용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로비엔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찬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문이 닫혔다. 졸지에 언질 하나 없이 덩그러니 남은 마리와 밀리언만 당황스러운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로비엔은 그의 뒤에 남겨진 이들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하인들 역시 무심하게 지나쳤다.
“로잘린.”
궁의와 대화를 나누던 로잘린이 놀란 얼굴로 문턱에 선 로비엔에게 시선을 두었다.
“폐하, 이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로…….”
“궁의를 들라 하였다기에.”
로잘린의 시선이 궁의와 라나에게 짧게 머물렀다. 로비엔에게 그 말을 전달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성큼 걸어 들어온 로비엔이 로잘린이 앉은 소파 옆자리에 앉아, 가느다란 허리를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비께서 근래에 덥다고 계속 침대에서 벗어나 주무셨다. 그 탓인가? 건강은 어떠시지?”
로비엔이 이어 묻는 말에 궁의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늘 제 비의 일에는 바짝 곤두서 있는 왕이었다. 대답을 머뭇거렸다간, 그의 목을 치기라도 할 것 같았던 것이다.
“몸살은 아닙니다. 오한이 든다고 하시지만, 오한보다는 계속 더위를 느끼고 계시고요.”
로비엔이 의아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하면 이유가 무엇이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폐하. 이러한 증상을 느끼신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한 2주 정도 된 것 같은데.”
“피로함도 자주 느끼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로잘린이 문득 머리를 스치는 직감에 눈을 크게 떴다.
“자주 피곤하기도 했고, 근래에 입맛이 잘 돌지 않았어.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갑자기 화를 내는 일도 잦았고.”
묻지 않아도 알아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쯤 되자, 로비엔도 로잘린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도 한 번 경험해 본 적 있던 상황이었다.
“혹시 달 손님이 끊기지는 않으셨는지요?”
궁의가 땀을 삐질거리며 질문했다. 괜히 섣불리 질문했다가 임신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질책을 당할 것 같아 두렵기는 했으나, 의사로서 그의 사명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끊기지는 않았지만, 이번 달에는 딱 하루 정도만 겪었네.”
로잘린은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이처럼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비엔이 그녀의 허리 뒤로 두른 손을 움직여 다소 차게 느껴지는 손등을 움켜잡았다.
궁의로부터 듣게 될 소식을 예감한 듯, 같은 박동으로 뛰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맞닿은 손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