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하지만 아이를 갖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아이가 하룻밤 만에 쉽게 생겼기에 또 그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더는 피임을 하거나 관계에 대해 계면쩍어하지도 않는데 아이 소식은 찾아오지 않았다.
의회의 개싸움을 보다 못한 로비엔이 총리를 직접 지정한 후, 봉건적 공납의 폐지 방법을 논하라 이야기한 후 일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그랬다. 로잘린은 조금 초조해졌다.
“둘째 아이를 가질 때 오래 걸렸나요?”
로잘린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로잘린의 말 상대가 되어 주던 라나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갖는 일을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람이라, 이런 얘기를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서였다.
“다시 임신을 생각한 이후로는 그리 오래 걸렸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라나의 대답에 로잘린의 얼굴이 이전보다 더욱 어두워졌다.
“폐하께서도 마음먹으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혹 불안하시면 궁의를 부를까요?”
라나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 같던 로잘린이 초조해하고 있었다. 로비엔에게 큰 위험이 있었던 이후, 몇 달 사이에 그에게 후사를 압박해 올 무도한 자는 아무도 없었는데도 그랬다. 아무래도 그의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이미 머릿속에 수십 번은 그렸을 아이를 품에 안고 싶은 소망 때문일 터였다.
“아니. 괜찮아요.”
로잘린이 고개를 저었다.
“내 마음속에 남은 일말의 머뭇거림 때문일까, 아니면 사산 경험 때문일까. 온갖 생각이 다 들어서 자꾸 초조해지네요.”
길게 한숨이 샜다. 라나는 로잘린이 두 손에 얼굴을 묻는 것을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그리고 사산한 경험 때문은 아닐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요. 이미 꽤 지난 일이고, 두 분 모두 건강하시니까요.”
라나는 그저 아직은 아이가 찾아올 시기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게 지금 그녀가 유일하게 로잘린을 다독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레이디 메르센데티의 말이 맞아요.”
라나의 말을 흘려듣던 로잘린이 다른 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폐하.”
로비엔이 자신을 향해 포스스 웃는 얼굴을 향해 걸어왔다.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던 로잘린이 라나를 향해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라나는 두 주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이제 고작 일 년 지났어요.”
가까이 다가와 로잘린의 보드라운 얼굴에 손을 뻗은 로비엔이 일찍이 실망하기엔 이르다고 이야기했다. 다정하게 어르는 목소리를 듣자, 로잘린이 울상을 했다.
“비도 나도 아직 젊고, 아이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데 이처럼 불안해하시다니요.”
왕비인 로잘린이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안해한다는 소문은 쉽게 퍼져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비가 아이를 사산한 이후 진실로 불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불온한 짐작이 더욱 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이후부터 초조해져요.”
“……왜?”
“하루빨리 품 안에 안고 싶고, 예뻐해 주고 싶고, 엄마 소리를 듣고 싶어요.”
로잘린도 그런 일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젖비린내가 나는 말랑한 몸을 끌어안고 행복함을 느끼고 싶었다. 땅에 묻힐 때까지도 한 번을 안아 주지 못한 글로리 대신, 온종일 끼고 있고 싶었다.
물론, 로비엔에게도 하루빨리 안정감과 행복을 주고 싶었다.
로비엔의 표정이 다소 착잡해졌다. 로잘린은 한 가지에 몰두하고 파고들면 다른 생각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아이를 갖기 전까지는 계속 이처럼 불안해하고, 초조해할 거였다.
“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네?”
“나는 아직도 비와 둘인 편이 더 좋은데.”
로비엔이 로잘린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얼떨결에 소파에서 일어난 로잘린이 로비엔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품에 안겼다.
“사실 죽을 때까지 아이가 없대도 상관없어요.”
“폐하.”
“비께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평생 아이를 갖지 않겠다 했대도 그대로 살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이제 와 아이가 생기는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정하기 짝이 없는 위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로잘린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저는 싫어요.”
“로잘린.”
“불안정해 보이고 싶지 않아요. 영원히 잃은 아이만 그리고 싶지도 않고요.”
로잘린의 미약한 반항에 로비엔이 밀려났다. 그는 동시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로잘린을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없다고 해서 불안정한 건 아니잖아요.”
“저는 불안정해요! 불안하고! 언제까지 이럴 순 없잖아요!”
로잘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감정적이 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감정적이 되는 자신이 싫은 탓도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혹시 진짜 내게 문제가 생겼으면 어떡하지. 또 누가 후사를 운운하지 않을까. 후사가 없으니 당신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참에 나를 갈아 치우라고 하지는 않을까.”
“…….”
“그런 불안을 당신이 알아요?”
로비엔에게 화낼 일이 아니었다. 그는 죄가 없었다. 로잘린도 매한가지였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대를 불안하게 했어요?”
로비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물었다. 로잘린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로비엔은 그게 대답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다시 뻗어 온 손이 로잘린을 품 안으로 당겼다. 로잘린이 미약하게 반응하며 자리에 버티고 섰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로 거절의 의미가 아니었다.
로비엔이 한 걸음 더 다가와 로잘린을 끌어안았다. 바로 직전에 제 손으로 그를 밀어낸 주제에, 로잘린은 몰염치하게도 그 품에 가만히 기댔다.
“미안해요.”
등을 다독이는 커다란 손, 머리통을 기댄 단단한 가슴, 상냥한 목소리는 로잘린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었다. 이 품 안에서는 무엇이든 보호받고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그제야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바짝 날이 섰던 감정이 몸을 눕혔다.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안온하기 짝이 없는데 홀로 불안해하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내가 자꾸 비를 힘들게 하네요.”
“……아니에요. 폐하의 잘못이 아니에요.”
로잘린이 풀 죽은 목소리로 그의 사과를 거부했다.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했으니까. 마땅한 태도였다.
“아직도 너무 미숙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남 탓이 더 익숙한데도요?”
로잘린이 고개만 빼꼼 들고 물었다. 눈치를 보느라 벽 너머로 눈만 슬그머니 드러낸 고양이 같은 사랑스러운 모양새였다.
“어쩔 수 없지. 내가 그렇게 버릇을 들였으니까.”
로비엔이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히 정리해 주며,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로잘린이 눈을 감았다 뜨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마치 부모처럼 이야기하시네요.”
“다를 것도 없지. 내가 비의 보호자인걸요.”
로잘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로잘린의 마음이 그제야 완전히 풀렸다는 것을 알게 된 로비엔이 툭, 이마를 부딪쳐 왔다.
“비께서도 유일한 내 보호자이고.”
“…….”
“그렇지 않아요?”
당신과 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서로가 전부이지 않으냐고. 그 사이에 둥근 교집합이 한 개 더 생기는 것은 즐겁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 존재가 없다 하여 우리가 불안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맞아요.”
내뱉은 말보다 생략된 말이 많았다. 하지만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덜 괴로워하기로 약속해요.”
어쩐지 숙연해진 로잘린의 반응을 확인한 로비엔이 그 틈을 타 약속을 받고자 했다. 앞으로 계속 이런 태도를 보인다 해도 그는 결국 다 받아 주고야 말 테지만, 그렇다 해도 로잘린이 과한 압박감에 자신을 해치지 않았으면 했다.
“어쩌면 아직은 혼란스러운 때라 세상에 등장하기를 꺼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절 닮았다면 알아서 몸을 사릴 녀석이라.”
로잘린이 에둘러 대답했다. 그러겠노라 확답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여간 사람은 변하지 않고, 그중 로잘린은 다른 누구보다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로비엔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사실을 곱씹으며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게 즐겁게 느껴지는 걸 보면, 로잘린과 자신은 거짓으로라도 인연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로 오셨어요?”
로잘린이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로비엔은 빤히 보이는 수작을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요.”
선물? 로비엔을 올려다보는 로잘린의 눈이 반짝였다.
“들어와.”
로비엔의 명령에 응접실 문이 열리고, 하인 몇이 커다란 의자를 들고 들어왔다. 로잘린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리넨 천으로 쿠션을 감싼 의자를 따라 이동했다.
“흔들의자네요?”
내려놓자마자 혼자 기우뚱거리면서 움직이는, 그러나 절대로 넘어지지는 않도록 튼튼히 만들어진 흔들의자였다.
“창문 근처에서 편안히 햇살을 즐기고 싶다고 했잖아요.”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창문에 걸어 둔 커튼이 살랑거리고, 그 아래 놓인 의자로 빛이 쏟아졌다. 햇빛 쐬기를 유난히 즐기는 로잘린에게는 가장 적합한 자리이며, 가장 적합한 가구였다.
“저기서 책을 읽어도 좋고, 그냥 쉬어도 좋고, 잠을 자도 좋고. 최대한 편안하게 제작하라 했으니 안락할 거예요.”
광대를 따라 움직이는 어린애처럼 품에서 뽀르르 빠져나간 로잘린이 의자 근처에서 기웃거렸다. 로비엔은 생일 선물을 받은 어린애같이 구는 로잘린을 즐거운 마음으로 관찰했다.
로잘린이 곧 조심스럽게 의자에 몸을 놓았다. 푹신하게 등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를 받쳐 주는 쿠션감을 느낌과 동시에 의자가 기우뚱거리며 앞뒤로 흔들렸다.
“마음에 들어요?”
대답을 굳이 듣지 않아도 얼굴에 떠오른 즐거운 기색이 분명히 대답하고 있었다.
“네. 감사히 사용할게요.”
로잘린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이처럼 무척이나 간단했다. 대단히 값비싸고 희귀한 물건이 아니라도 괜찮았다. 그저 흘리듯이 갖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것들을 손에 쥐여 주면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로비엔이 흐뭇한 얼굴로 선물한 보람이 있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잠시.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고 잠이 든 로잘린, 그리고 그 품에 안긴 어린것과 평화로운 나날이 눈앞을 스쳤다.
로비엔은 그것이 그리 머지않은 시일 내에 찾아올, 그들의 미래일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러니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