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41)화 (141/151)

# 13.

로잘린의 울음소리를 듣고, 혹시라도 로비엔이 잘못되었나 허겁지겁 달려온 아랫것들이 왕이 무사히 의식을 찾았음을 알렸다.

기쁜 소식은 궁 안팎으로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동시에 미리 찍어 두었던 왕실 소식지가 만방에 왕실의 건재함을 알렸다.

그사이, 로비엔은 차근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본래 한창인 나이대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식사를 챙기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평소의 몸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궁의 역시 로비엔의 회복력이 보통 사람보다 빠르다며 로잘린을 다독였다. 스멀스멀 새어 나오던 왕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프지는 않으세요?”

로비엔이 괜찮다는 듯 그저 웃어 보였다.

로잘린의 손끝은 이마 가장자리에 남은 딱지를 더듬고 있었다. 바닥에 부딪힌 탓에 여전히 약간의 둔통은 남아 있지만, 생활에 방해가 될 만큼 아프다거나 현기증이 이는 일은 없는데도 로잘린은 걱정을 덜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조금도 아프지 않고.”

로비엔의 부드러운 음성에도 불안한 모양인지, 거짓이 존재하지 않는지 그의 눈동자를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이 있었다.

로비엔은 로잘린의 허리를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로잘린이 거부감 없이 끌려왔다.

“비께선 언제쯤 걱정을 하지 않으실까.”

처음 의식을 찾은 후 힘없이 떨리던 손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로잘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는 손길 역시 평소와 같이 따뜻하고 안온했다. 로잘린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몇 년쯤 지나야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맙소사. 그건 너무 긴데.”

로비엔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어 그는 로잘린의 허리를 끌어안지 않은 한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넘어가며 젖어 드는, 한때 피로 얼룩졌던 머리카락은 선명한 백금색이었다.

“비께서 너무 걱정하면, 사내로서 자존심이 상해요.”

물방울이 턱 끝을 타고 똑 떨어져 그의 단단한 가슴 사이로 굴러 내렸다. 로잘린은 홀린 듯 그 물방울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다가 시선을 들었다.

“어째서요?”

“어떤 사내든 제 여자에게 가엾어 보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로비엔이 강한 힘으로 로잘린의 허리를 끌어당겨, 부드러운 몸을 제 허벅지 위에 얹어 놓았다. 몸이 움직이자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물에 젖어 쓸모없어진 얇은 옷감 아래로 몸의 굴곡과 피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지켜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늘 편안히 기대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고 싶을 테니까요.”

“폐하께선 충분히 그러고 계신걸요. 폐하 곁에서만 안심하고 쉴 수 있어요.”

로비엔은 매끄러운 피부가 손끝에 감겨드는 순간을 즐기며, 로잘린의 드러난 목덜미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로잘린이 흠칫하며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두 팔이 그의 목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다만 불안할 뿐이에요. 폐하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이나 무서웠거든요.”

겁이 났다. 혹여 로비엔이 잘못되어, 다시는 이처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막막해지기도 했다. 간신히 찾은 안정을 손끝에서 놓칠까 봐 부모 잃은 어린애처럼 달달 떨어야 했다.

로잘린이 속삭이는 말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잃은 후의 감정도 채 회복하지 못한 로잘린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 준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일었다.

“폐하께서 의식을 찾지 못하시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

“이전엔 서로의 배신을 제외하고는 서로를 떠나는 순간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갈라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죠.”

로비엔의 양팔이 로잘린의 몸을 감아 안았다. 조금이라도 안정감을 주었으면 해서였다.

“하지만 조심하는 것만으로는 갑작스러운 사고를 막을 수 없을 거예요. 내가 먼저 떠날 수도, 당신이 먼저 떠날 수도 있을 거고요.”

“……로잘린.”

“당신이 없다면 따라 죽을 정도로 대범하진 못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울면서 마지못해 살아가고 싶지도 않아요.”

로잘린이 로비엔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그렇게 하면 제 흔적이 남기라도 하는 것처럼.

“왕인 당신은 더욱 그렇겠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까, 나를 따라서 죽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내게는 당신의 흔적이, 당신에게는 나의 흔적이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혹시나 내가 잘못되더라도 당신은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당신이 나보다 먼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로비엔과 로잘린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아이를 갖고 싶어요.”

로잘린의 고백을 덤덤히 듣고 있던 로비엔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로잘린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바짝 붙어 있던 몸을 떼어 내며, 잠시 사고가 정지해서 눈도 깜빡이지 못하던 사내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로잘린, 갑자기 그게 무슨.”

“혹시나 내가 죽더라도 당신이 외롭지 않도록. 당신이 먼저 떠나더라도 내가 이승에 미련 한 조각을 남겨 두도록.”

절망에서 허우적댈 자신들을 이 땅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존재는 하나였다.

“많이 놀란 건 알겠어요. 시간이 지나면 차차 진정이 될 테니까…….”

“라나와도 많은 얘기를 했어요. 덕분에 제가 가진 공포와 죄책감은 제가 만든 감옥일 뿐이란 것도 깨달았고요.”

아이. 그와 자신의 피를 이어받고, 똑 닮은 얼굴로 웃어 줄 단 하나의 희망.

사실 로비엔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수록,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 아비를 닮은 백금발을 빛내며 웃는, 젖비린내가 나는 아이를 품에 안아 어르고 싶었다. 그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었고, 글로리에게는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속삭여 주고 싶었다. 그 아이가 아장아장 걸을 때는 곁에서 발을 맞춰 걸어 주고 싶었고, 잠들기 전에는 자장가를 불러 주고 싶었다.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아직도 글로리를 잃은 게 슬프잖아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로비엔은 이번 일은 후사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아직 극복하지도 못한 상처를 성급하게 극복하려고 하지 말라고도 했다.

로비엔은 늘 로잘린이 최우선인 사람이었고, 그의 방식이 아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방식대로라면 로잘린은 영원히 발을 물린 채 내딛지 않을 터였다.

“맞아요. 아직도 슬퍼요.”

“거봐요, 로잘린. 성급하게 굴지 말고…….”

“그러니 폐하께서 안아 주세요. 달래 주시고요.”

로잘린이 물기로 젖은 손을 들어 로비엔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름답고 애처로운 사내의 시선은 오로지 그녀에게 집중해 있었다.

“숨기지 말고 같이 슬퍼해요.”

“…….”

“제가 잘못될까 신경 쓰느라 슬퍼하지 못했잖아요.”

상처는 로잘린만의 몫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부모가 벌인 일이라, 로비엔은 로잘린 앞에서 함부로 죄책감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로잘린은 그의 눈동자 안에서 요동치는 수십, 수백 개의 감정을 서글프게 지켜보았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로비엔의 목에서 잠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글로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였으니까요. 얼마든지 그래도 돼요.”

로잘린이 눈물이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눈을 느끼며 웃었다. 확신이 들었다. 이 결정은 옳다. 이제는 인생의 한 페이지를 다시 넘길 때였다.

“같이 극복해요.”

로비엔이 강한 힘으로 로잘린을 다시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로잘린을 끌어안은 채 떨리는 팔은 얼마 전 의식을 차렸을 때처럼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게 꼴 보기 싫다거나 연약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간 격정을 내리누르던 로비엔이 불쑥 욕탕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 위에 앉혀 두었던 로잘린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끌어안은 상태였다.

로잘린이 놀라 로비엔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아 놀람을 숨겼다. 갑작스레 몸이 젖은 채 나타난 주인들을 발견한 아랫것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걷는 자리마다 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힘주어 문을 열고, 침실의 문턱을 넘은 로비엔이 침대 위로 로잘린의 몸을 내려놓았다.

“…….”

시선이 마주쳤다. 침실을 가득 메운, 공기 중에 요요히 맴도는 나른한 달빛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직은 서늘한 밤 온도에 젖은 몸 위로 소름이 돋았으나, 몸 안에서부터는 희미한 기대감이 맴돌았다. 로비엔의 손끝이 천천히 젖은 옷감을 밀어 내리며 피부에 닿는 순간마다, 그 자리에 가늠할 수 없는 열기가 흘렀다.

“……읏.”

로비엔의 입술이 젖은 목덜미에 닿았다. 질척한 성애의 표현에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로비엔은 잘게 몸을 떠는 로잘린을 애정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새하얗게 드러난 로잘린의 나신을 경배하고픈 심정이라는 걸, 로잘린은 평생이 가도 알지 못하리라.

“로잘린, 당신은 내가 어떤 방해도 없이 당신을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를 겁니다.”

언젠가 데이트랍시고 그를 불러내어 커피 하우스에서 시간을 가졌던 날, 로잘린이 앨런의 비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머리에 찬물을 쏟아부은 듯 마음이 차게 식어 버렸던 순간이 기억났다.

“당신이 앨런의 비가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든 당신을 빼앗았을 거예요.”

그건 단순히 로잘린이 앨런의 편에 서서 자신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대한 불안이 아니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마음에 담아 둔 여자를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는 것을.

“저도 매한가지예요. 가정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만일 폐하께서 리만 양과 약혼을 유지하고, 제가 2왕자의 약혼녀로 서게 되었다면.”

“…….”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든 곁에 맴돌며 그 시선을 빼앗았을 거예요.”

로잘린이 매끄럽게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어느 날, 그가 로잘린에게 감겨들고 말았던 순간처럼.

“그리고 어둠을 틈타 접근했겠죠.”

“……그 후엔?”

로비엔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목을 긁듯이 터져 나온 목소리는 짐승의 그르렁거림 같기도 했다.

“내 남자가 될 때까지 유혹해야죠.”

로잘린이 팔을 뻗어 로비엔의 목을 끌어 내렸다. 부딪친 입술 사이로 흐르는 숨결이 델 듯 뜨거웠다.

로비엔이 고개를 기울이며 로잘린의 입술에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말랑한 가슴을 단단한 가슴으로 짓누르며 한 몸처럼 겹쳐졌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심장 박동을 공유하는 순간이 기분 좋았다.

“이 얼굴이 이처럼 쓸모가 있다니, 감사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떨어진 입술 사이로 로비엔이 낮게 속삭였다. 로잘린이 작게 웃음을 터뜨린 순간, 로비엔의 입술이 무도하게 몸 위로 흘러내렸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로비엔의 머리통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긴 밤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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