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왕은 사흘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왕의 피습 사실과 피습범의 취조 결과를 찍어 낸 모든 신문이 동이 났다. 단 한 가지의 소재만 속보로 났을 뿐인데,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모두가 그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니, 이 막돼먹은 새끼가.”
칼라브리아의 아름답고 선한 왕을 사랑하는 이들은 기사를 보고 이를 으득 갈았다.
“이 반역자 새끼의 목을 베어야지!”
왕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저 제가 추구하는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려 하다니!
“방법이야 격하기는 했지만 이게 세상의 흐름인 게지.”
물론 로저스가 취한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왕족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제정신 아닌 놈 좀 보게? 그래서 죄도 없는 왕을 죽이려 들어? 일반인도 그리 죽이면 천벌을 받겠다!”
“이보게.”
“그리고 왕이 죽으면, 갑작스럽게 벌어질 소요와 혼란은 어쩌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나?”
노천 커피 하우스가 이른 아침부터 시끌벅적했다. 공화주의자와 왕정 지지자 사이 갑론을박이 점점 수위를 높여 가고 있는 탓이었다.
“자네도 국왕을 죽이려는 일에 가담한 거 아냐?”
“아니, 무슨 그딴 소리를 하나!”
뜻밖에도 국왕 시해의 공범으로 몰리게 된 자가 파드득 떨며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주변에는 그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로비엔은 생각보다 광범위한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자는 그저 극단적인 공화주의자일 뿐이야. 나와는 노선이 분명히 달라!”
당황한 얼굴로 어름어름 물러서던 사내가 명백히 선을 그었다. 그는 이번 사건은 그저 열성적인 혁명파 내지는 공화주의자의 단독적인 범행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누가 그 속을 알겠나?”
그러나 왕정 지지자들은 의지하던 왕이 무력적인 힘 앞에 의식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에 이미 눈이 뒤집혀 있었다.
“말이 심하지 않나!”
공화주의자가 항변했다.
“나도 이자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대들과 같아. 죄를 짓지도 않은 왕을 가장 불법적인 방법으로 시해하려 하였으니 마땅한 벌을 받아야지.”
이전처럼 단순히 항변하거나 화만 내는 대신, 잔뜩 성이 난 왕정 지지자들을 얼러 보려고 노력했다. 과격한 혁명을 추구하는 자를 넘어, 공화정을 주창하는 이들을 모두 예비 범죄자처럼 보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만 왕실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이야기했을 뿐이야.”
그러자 당장이라도 그를 찢어 죽일 듯 나섰던 이들이 다소 누그러진 기색으로 조금 물러났다. 다만, 여전히 미운 오리를 보듯 흘겨보는 시선은 그대로였다.
로비엔이 눈을 뜨건 뜨지 않건, 왕궁 안의 삶은 평소와 같이 돌아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물수건을 치우렴.”
로잘린이 로비엔의 얼굴을 닦아 주던 물수건을 침대 위 협탁에 올려 두기가 무섭게 라나가 하녀에게 명령했다. 호다닥 달려온 하녀 아이가 급히 물이 담긴 대야와 젖은 수건을 들고 방을 나섰다.
“폐하, 발은 괜찮으십니까?”
라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로잘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로비엔이 밀리언의 등에 업혀서 의식 없이 돌아온 날, 맨발로 내달린 탓에 로잘린의 발에 상처가 났다. 정신이 없어 본인도 다친 줄 몰랐던 상처였으나, 그리 작은 것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 상처가 제법 깊어, 뒤늦게 주인의 상처를 발견한 라나는 기함했다.
즉시 궁의를 불러 상처를 살피게 하고 치료했지만, 로잘린은 내내 담담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괜찮아요. 로단테 백작에게서 온 소식은 없나요?”
“없습니다.”
실제로도 로잘린은 제 상처 같은 건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로비엔이 의식을 잃은 지 사흘째. 로잘린은 로저스를 반쯤 죽여서 실토하도록 만들었고, 공범자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기사로 제공하여 나라를 온통 그 소식으로 시끄럽게 했다. 모두의 시선이 로비엔에게 쏠려, 의식불명인 로비엔에게 누구도 허튼짓을 할 수 없도록. 오히려 극단적인 공화주의자들의 입지를 좁게 만들기까지 했다.
“다만…….”
라나의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로잘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눈동자는 평소와 달리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폐하의 친정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간신히 명목만 유지한 보가트 가문에서 온 서신이라면 발신자는 빤했다. 로잘린은 발신자가 드마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버려요. 태워 버려도 좋고.”
로잘린의 담담한 목소리가 명령했다. 로잘린이 조금쯤은 제 친정을 그리워하리라 생각했던 라나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가족은 폐하뿐이에요.”
로잘린에게 진정한 가족이라고는 로비엔뿐이었다. 보가트 가문의 일원들에게 남은 정은 없었다. 드마셸도 그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 서신을 보내온 것이 우스웠다. 로비엔이 쓰러졌다 하니 마음이 약해져 그들에게라도 기대고 싶으리라 생각했던가.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늘 고마워요, 라나.”
라나가 양순하게 대답하자 로잘린이 의미 없이 웃어 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모두 제 영광입니다.”
“…….”
“다만 조금이라도 그 말씀이 진심이라면, 부디 폐하의 식사를 준비하게 하여 주십시오.”
라나는 로잘린이 예의상 던진 감사의 인사라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로잘린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도 사흘째였다. 그러잖아도 마른 몸인데, 예민하기까지 해서 살이 도통 붙지를 않는 체질이었다. 그런 사람이 며칠째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 살이 더 내리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지 않은가.
“폐하께서 눈을 뜨시면 왕비님을 보고 놀라실 겁니다. 왕비님을 살찌우려고 폐하께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라나의 말에 로잘린이 움찔했다.
로비엔은 끼니때마다 굳이 옆에서 먹는 걸 챙기고, 간식을 입에 밀어 넣어 주고, 일을 줄이게 하고, 그의 품 안에 끌어안아 느긋하게 쉬도록 만들었다. 로잘린을 살찌우기 위한 일환이었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분명 로잘린이 여물어 가는 것은 그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라나.”
“말씀하세요, 폐하.”
“폐하께서 곧 눈을 뜨시겠죠?”
로잘린의 목소리에 불안이 물씬 묻어났다.
하루면 일어나겠지, 이틀이면 일어나겠지 하던 것이 벌써 사흘째 되니 불안이 극도로 치밀었다. 다행히도 큰 외상은 없으나, 머리를 다쳤다는 이야기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으므로.
“그럼요. 폐하를 두고는 멀리도 못 가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로비엔은 분명히 제힘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라나의 확신 어린 목소리에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딱지가 앉은 로비엔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폐하께서 눈을 뜨기를 기다리다 보니 별생각이 다 들더군요.”
라나의 시선이 얇은 캐노피 너머, 빛을 등진 로잘린에게로 향했다.
“만일 폐하께서 일찍 후사를 보셨더라면, 좀 더 입지가 탄탄했을까?”
“…….”
“최소한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핏덩이라도 그것도 왕족이니까. 폐하께서 돌아가시기만 하면 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그러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테고.”
나지막하지만 후회가 섞인 목소리였다.
라나는 로잘린의 목소리에 섞인 후회가 낯설었다. 그녀는 마리처럼 로잘린을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아는 것들은 있었다. 로잘린은 어느 순간에도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결정은 늘 옳았으니까. 라나도 그리 믿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만일 그런 마음으로 아이를 가지고 낳았다면 후회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이전 그녀의 결정을 부정하는 일은 어떠한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바꾸는 것은 미래이지 과거가 되어선 안 될 일이었다.
로잘린이 고개를 돌려 라나를 응시했다. 명백히 진심이라는 듯, 라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의 적막 끝에 로잘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후회했을 것 같아요.”
긍정의 표시였다. 글로리를 가졌을 때보다 더 겁에 질려 있었고, 마음가짐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아이를 가지고, 낳고, 기르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사실 라나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비밀일 수는 없었다. 로잘린은 라나에게 말할까 말까, 수없이 고민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우습겠지만, 나는 충격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어요. 라나가 아는 것처럼 사산한 날의 꿈을 꾸는 건 물론이거니와, 계단에선 유난히 조심하게 되고, 내게 반감을 품은 사람이 보이면 무척이나 예민해지죠.”
담담한 목소리가 속에 숨겨 두었던 진심을 낱낱이 털어 냈다.
“근본적으로는 두려움이에요. 누군가가 나를 해치지는 않을까? 또 아이를 해치려고 하지는 않을까? 낳은 아이는 오래도록 건강할까? 다시 잃지 않을 수 있을까?”
“…….”
“새로 태어난 생명과 행복하면, 모자란 어미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린 아이는 어떡하지?”
두려움이며, 동시에 죄책감이기도 했다.
로잘린은 첫아이를 잃은 후에도 여러 큰일을 겪었다.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하려면 그저 묻어 버려야만 했고, 상처를 외면해야 했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졌다.
지금 행복한데 굳이 파헤쳐야 할까? 지금 이처럼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 굳이 그늘을 드리워야 할까?
그러나 동시에 죄책감이 켜켜이 쌓였다.
로비엔의 품 안에서 머무른다면 그저 두려움이기만 한 과정쯤은 무사히 거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다만 새로이 만나게 될 생명과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 날이면 매번 글로리가 죽은 날의 꿈을 꾸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 역시 첫아이를 사산하고 두 번째 아이는 병으로 잃었습니다.”
저 혼자 만들어 낸 죄책감과 두려움에 가라앉는 로잘린을 잡아챈 것은 라나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늦은 밤, 아이를 재우기 위해 동화를 읊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첫아이는 사내아이였어요. 낙상으로 이른 출산을 했는데, 목에 탯줄이 감겨 있어 출산 중에 사망했지요.”
라나의 첫아이에 대해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로잘린이 놀란 눈으로 라나를 올려다보았다. 라나와 자신의 삶이 비슷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무척이나 비슷하다는 점에서 놀라고 말았다.
“아시다시피 처음에는 그리 슬프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니 적당히 슬퍼하는 척만 했지요. 하지만 딱 한 계절이 지나자 그 위선이 저를 집어삼켰습니다. 슬프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것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덕분이었을까?
로잘린이 해답을 바라듯 간절한 얼굴로 라나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