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왕실 소식지의 정규 발간과 기념식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했다. 로잘린의 경제적인 지원에, 로비엔의 행정적인 지원과 묵인까지 따르고 있었으니까.
“로잘린.”
그 덕분인지 최근 로잘린은 배부른 사자 같은 꼴을 자주 하고 있었다. 물론 방만하다고 부를 만한 자세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벌인 일이 흡족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정말로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로비엔의 물음에, 아침나절부터 커피를 홀짝거리던 로잘린이 긍정의 미소를 보였다.
“모든 일은 비께서 했는데 공치사는 내가 한다니 꼴이 조금 우습지 않은가 싶은데.”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은 로잘린이 가벼운 걸음으로 사뿐거리며 다가와 로비엔의 타이 모양을 정돈해 주었다. 물론 시중드는 이들이나 할 일이지, 일국의 왕비가 할 만한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비엔의 타이에 손을 댄 로잘린, 그 손길을 받고 있는 로비엔,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랫것들은 모두 담담했다. 처음에야 당연히 기겁하며 제가 하겠노라 나섰지만, 이제는 이 사소한 접촉이 그들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로잘린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왕족 중 하나는 궁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오늘의 역사를 자랑하는 역할을 맡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로비엔이어야 했다.
“다녀오세요.”
물론 로잘린은 내조나 하는 역할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로비엔에게는 무엇이든 퍼 주고 양보해도 아깝지 않았다. 제 목숨줄처럼 쥐고 싶은 상단을 넘기는 일도 아니니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그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다는 점은 좋기까지 했다. 마치 인생의 보람처럼.
“음. 잠자리가 좀 사나워서?”
“안 좋은 꿈을 꿨어요?”
“조금요. 몸을 좀 사리는 편이 좋겠다 싶었어요.”
로잘린의 순순한 대답에 로비엔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꿈이었기에?”
“별건 아니고, 그냥 조금 싱숭생숭한 꿈이었어요.”
로잘린이 그에게 고민을 주고 싶지 않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니 폐하께서도 조심하시고요.”
로비엔이 물끄러미 제 안위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아내를 내려다보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작은 머리통에 든 이야기를 해 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럴게요.”
로비엔이 그러겠노라 대답하며 두 팔을 벌렸다.
로비엔을 올려다보는, 언제나처럼 여름의 숲을 닮은 눈동자가 생기로 반짝였다. 로잘린이 살포시 웃으며 망설임 없이 그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바로 돌아올게요.”
“급한 일은 없으니 천천히 오셔도 괜찮아요, 폐하.”
익숙하고 따뜻한 체온을 품에 그러안은 로비엔이 고개를 숙여, 로잘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타인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로잘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이 휘어질 정도로 즐겁게 웃었다.
비밀스러운 주인 내외의 속삭임에 아랫것들은 속도 모르고 비죽거리며 따라 웃었다.
“쉬고 있어요.”
로비엔이 아쉬운 얼굴로 로잘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몸을 뗐다.
접촉은 잠시였는데도 멀어진 체온이 이상하게 아쉬웠다. 로잘린은 웃으며 손을 들어 로비엔을 배웅했다.
“간식거리를 조금 내올까요?”
로비엔이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라나가 하녀에게 찻잔을 치울 것을 명령하며 물었다.
“아니, 괜찮아요.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제 남편이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로잘린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라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잘린을 응시했다. 어젯밤, 로비엔과 따로 잠들었던 로잘린은 또 악몽을 꾸었다. 무슨 꿈이냐 물으니 로잘린은 그저 입을 다문 채 웃어 보이기만 했다. 죽은 공주와 관련된 꿈은 아니라고 했지만…….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주위를 정리하겠습니다.”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말해 줘요.”
로잘린의 말에 라나가 아랫것들을 모두 물리고, 마지막으로 저도 자리를 비웠다.
마침내 홀로 남게 된 로잘린은 창가 근처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여름에 가까워진 정원을 관조하듯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데, 지나치도록 평화로워 어딘가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티 내지는 않았지만, 지난밤의 꿈도 그랬다.
‘폐하?’
길 위에는 로비엔을 찾아 걷는 자신뿐이었다. 어디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돌아보는 바람에 드레스 자락이 펄럭거리는 순간이었다. 세상천지 홀로인 듯, 아득한 외로움이 찾아들었다.
‘……헉!’
갑작스레 불길이 달려들었다. 폭풍처럼 불어온 바람과 함께 머리 위로 갑작스럽게 쏟아진 화마가 우악스러웠다. 모든 것을 불태울 것처럼,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게 만들 것처럼.
물론 잠에서 깨서는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 순간 느꼈던 깊이를 모를 외로움과 끔찍한 불길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폐하.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별일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말하면 괜한 일을 부를까 봐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게 됐다. 오늘 로비엔과 동행하지 않은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던 불길이 지나치게 생생하여, 혹여라도 외출했다가 자신에게, 그리고 로비엔에게까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났다.
별일 아니겠지. 그저 의미 없는 악몽일 뿐이다.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떨리는 손을 가슴 위에서 감아쥐었다. 등에 기댄 푹신한 쿠션마저 불편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려 애쓰면서.
로비엔이 탄 마차가 왕궁의 문을 벗어났다.
로비엔은 창문 너머로 흘러가는 광경을 무심하게 흘려보냈다. 익숙하고 대단할 것 없는 광경이었고, 외출할 때마다 마차 창문에 바짝 붙어 구경하기 바쁜 제 비가 없어 의미 없는 광경이기도 했다.
듬뿍 수분을 섭취한 꽃처럼 싱그러운 그의 비, 로잘린.
입으로 로잘린의 이름을 굴릴 때마다 어쩐지 노래하는 듯한, 내지는 극의 배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요. 몸을 좀 사리는 편이 좋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오늘은 평소처럼 기분이 즐겁지 못했다. 품에 끼고 나오지 못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어쩐지 불안해 보이던 기색 때문이었다.
로잘린은 감정적이기는 해도 대범한 사람이었다. 고작 꿈 따위로 그처럼 불안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무척이나 생생한 꿈을 꿔서 불안했나 싶어 귀여웠다가도 조금 걱정이 됐다.
“오늘 일정은 창립 기념식만 마치면 끝인가?”
“그렇습니다.”
로비엔의 질문에 밀리언이 긍정했다. 이 일정만 마치고 나면, 이후의 일정은 없었다. 돌아가는 대로 품에 꼭 끌어안고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돌아오면 같이 목욕을 할까요?’
‘……네?’
‘비께서 곤하신 듯하니, 심신 안정을 위해 목욕 시중을 들어 드릴까 하고.’
로비엔의 능청스러운 제안에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던 로잘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톡 터질 꽃망울처럼 풋내가 났다. 그처럼 설익은 나이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것은 그의 콩깍지에서 비롯된 일이긴 했다. 그 누구도 로잘린에게서 풋내를 느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나마 로잘린을 풋내기 애송이로 여겼던 자들은 이미 다 스러지고 없지 않은가.
“기념식은 어떻게 진행할 예정이지?”
“건물 외부에서 짧게 군중들을 향해 인사하고, 실내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간단한 축사 후에 관계자들과 잠시 담화를 가진 뒤에 마무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밀리언이 짧게 설명했다. 그는 기념식에 무리가 될 만한 일정이나, 로비엔이 불쾌하게 느낄 만한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피력했다.
마차는 한참을 더 달려, 대로변에 들어섰다. 왕의 행차를 위해 대로변은 행인이 없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다들 비켜!”
눈치 없이 그 길에 발을 딛는 자들은 근위병들에 의해 여지없이 밀려났다. 물론, 근위병들이 경비하여 서 있는 위치 밖으로는 왕의 존안을 구경하기 위해 바글바글 모여든 군중들이 있었다.
혹여나 로비엔이 싫어할까, 마차 안에서 커튼을 치려던 밀리언이 로비엔의 손짓에 행동을 멈추었다. 그 순간, 속도를 낮추던 마차가 완벽히 멈추어 섰다.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로비엔의 발이 땅을 딛기도 전, 마차 문 앞에 선 이들이 인사를 올렸다.
로비엔은 그들에게 짧게 인사한 후 계단을 올랐다. 로비엔의 뒤로 따르는 걸음이 제법 많았다.
“폐하!”
“국왕 폐하!”
마침내 층계 끝에 올라선 로비엔이 자신을 연호하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훑었다. 우글우글 몰려든 인파 속에 모자를 휘두르거나, 양손을 펼쳐 손을 흔드는 이들이 제법 보였다.
이전에는 한심한 왕가였어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존중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동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로비엔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마치 얼굴이나 한번 구경하러 왔다는 투로 삐딱하게 그를 노려보는 존재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
로비엔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군중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 바람결에 흐트러지는 꿀타래 같은 금발, 그 아래로 빛을 받아 뒤섞인 새벽의 여명처럼 보이는 푸른 눈. 온화한 표정으로 가릴 수 없는 미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세상에.”
멀리서도 선명한 미색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억 소리를 냈다. 동시에 근위병의 허리 아래로 빼꼼히 몸을 내민 아이들이 로비엔의 얼굴을 보고 헤에, 입을 벌렸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
어린것들이 감히 불경한 소리를 했다. 근위병이 그 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기도 전, 작은 몸이 누군가가 밀친 것처럼 앞으로 튕겨 나갔다.
아이가 나동그라지기 직전에 근위병이 그 몸을 붙잡았다. 흐트러진 저지선의 간격을 몇 명이 벌리고, 저지선 밖으로 튀어 나갔다.
“잡아!”
놀란 듯 누군가 소리쳤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고 로비엔과의 거리를 제법 좁힌 사내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국왕 폐하를 보호해라!”
근위병들이 막고 있다고는 해도 로비엔의 신체는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었다. 코멧이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소리치며 다급하게 로비엔의 몸을 감싸 안았다.
모든 것이 하나의 장면, 또 다른 장면으로 흐르는 듯 느렸지만, 몸의 움직임은 그보다 더 느렸다.
‘혹시 모르니 폐하께서도 조심하시고요.’
로비엔은 그 순간, 괜히 불안해하던 로잘린의 얼굴에 비치던 불안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능적인 직감이었으리라.
순간이었다. 사내가 품고 있던 물건이 로비엔과 코멧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지독하도록 매캐한 화약의 냄새와 함께 폭발음이 광장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