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36)화 (136/151)

# 8.

로비엔은 로잘린에게 신문 기사나 외부의 반응에 대해 알려 줄 마음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운도 떼지 않았고, 아랫것들 역시 실수로 속닥거리다 로잘린에게 들키지 않도록 완벽히 입막음한 상태였다.

그러니 모든 여건상, 자연스럽게는 눈치챌 수 없는 상태였다. 로비엔에게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 거짓 기사들을 알고 있으니 얘기 좀 하자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폐하.”

그나마 피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만일 그랬더라면 정말로 난리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므로.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라나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식어 버린 찻잔을 눈짓하며 물었다.

로잘린이 머쓱한 얼굴로 짧게 웃었다. 날이 좋으니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자 먼저 제안해 놓고, 정신을 놓고 있었던 자신이 민망해서였다.

“차를 새로 내오렴.”

로잘린이 호출종을 흔들어 새로운 찻물을 내올 것을 명령했다.

“그냥 폐하께선 무엇 하고 계실까……. 그런 생각.”

“두 분께서는 정말 천생연분인가 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사이가 좋으냐는 기색이 짧은 문장 사이에서도 그득 묻어났다. 라나 역시 혼인하여 아이를 둘이나 낳은 경험이 있었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전 남편과의 사이 역시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글쎄. 나 때문에 폐하께서 피곤한 일을 많이 겪고 계시지 않은가 싶은데.”

로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민하게 알아차린 라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작게 고개만 저어 보였다.

“폐하께선 무엇이든 왕비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아하시는걸요.”

“…….”

“왕비님께서 폐하께 그러시듯이요.”

라나가 내뱉은 말은 진심이며, 진실이었다. 로잘린이나 로비엔이나,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처럼 기뻐할 수가 없었으니까. 귀물 같은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사소한 무엇이라도 상대에게 기쁨이 된다면 무척이나 흡족해했다.

“그렇게 들으니 무척 유난인 느낌이 드네요.”

로잘린이 민망하다는 듯 드러난 이마를 갉작였다. 하지만 거짓으로라도 아니라고 부인할 수는 없어 더욱 민망했다.

“유난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라나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로잘린의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두 분이 행복하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라나가 다 식어 빠진 찻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다정하게 덧붙였다.

로잘린은 로비엔을 제외한 사람과는 관계를 꾸리는 방법을 잘 몰랐다. 도움을 청하는 법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니 언제라도, 무엇이든 말하고플 때 편히 말씀하십시오, 폐하.”

“라나.”

“마음에만 담아 두면 속만 상할 뿐입니다.”

그래서 로잘린은 여전히 라나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라나가 기민하게 눈치를 살펴 알아차리고, 대강의 상황으로 파악한 것이 있어도 매한가지였다. 언제라도 제 주인인 로잘린이 도움을 청한다면, 라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데도 그랬다.

“그럴게요.”

로잘린이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도 제 속을 드러낼 생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분이니, 비께서 말씀하기 전까지는 아는 척이나 섣부르게 간섭하지 않도록.’

로비엔의 명을 떠올린 라나에게서 부드러운 한숨이 샜다.

“그나저나 왕실 소식지의 창간 축하연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로비엔의 명이 아니더라도, 제 주인이 드러내지 않는 마음을 속단하고 긁어 댈 생각은 없었다. 라나는 충실한 로잘린의 수족이었으며, 로잘린이 가진 종류의 고민은 쉽게 아는 척해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경험자이기도 했다.

“아. 맞아요.”

부드럽게 화제가 왕실 소식지와 기념식으로 옮겨 갔다. 내내 다소 어두운 얼굴이던 로잘린의 눈이 그제야 반짝임을 되찾았다.

“폐하께서 직접 참여해 주시겠노라 하실 줄은 몰랐지만.”

로잘린이 왕실 소식지 발간을 위한 목적으로 신문사를 하나 인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로비엔은 해당 신문사의 이름을 바꾸고 왕실 산하의 기관으로 편입시켰다. 왕궁의 벽을 넘어서 존재하는 유일한 왕실 기관이었다.

“하면, 그때 폐하께서도 개관식에 참석하실 겁니까?”

“폐하께서만 참여하실 확률이 높을 것 같네요.”

왕족이라곤 달랑 둘만 남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로잘린이 로비엔의 지지를 받아 몇 가지의 경우에서 예외가 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다. 거의 사문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귀족 여성들은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고 외출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존재하는 때였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거짓 기사를 뿌리지 말라 경고하는 일이라서, 굳이 나까지 움직일 필요는 없기도 하고.”

로잘린이 낯선 하녀의 손끝에서 내려 놓이는 찻잔과 티포트를 무심하게 넘기며 덧붙였다.

사회의 꽉 막힌 사고방식이 답답하거나 짜증스럽지 않다면 거짓이지만, 새삼스럽게 덤벼들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은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리 즐겁지 않았다. 또 후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다가 우울해지는 일은 질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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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거리의 골목길.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던 길버트가 후다닥 낡은 나무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거미줄이 쳐진 낡아빠진 건물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비록 청결하지는 못했으나 실내는 제법 넓고 튼튼해 보였다.

길버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대단하게 비밀스러운 공간은 아니었다. 스튜를 떠먹는 자들이 옹기종기 모인, 흔하디흔한 식당이었다. 길버트는 고작 식당에 입장하기 위해 긴장한 자신이 우스워 헛웃음을 터뜨렸다.

“올 줄 알았네.”

그러나 그 순간, 측면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피 하우스의 야외 테이블에서 길버트에게 말을 걸어 왔던 사내, 로저스였다.

“이쪽으로 따라오게.”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식당은 위장용인 모양이었다.

길버트가 로저스의 뒤를 따랐다. 주방 뒤로 이어지는 통로의 문을 열자, 촛불 하나만 켜고 삼삼오오 모여 있던 자들이 고개를 돌려 길버트와 로저스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동지야. 일전에 말했던 길버트.”

“어서 오게, 길버트!”

다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듯, 길버트를 환대했다. 길버트는 다소 어색한 얼굴로 로저스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각 자리에는 싸구려 술이 한 잔씩 놓여 있었다.

“그때 말했다시피, 우리는 자네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네.”

로저스가 씩 웃으며 운을 뗐다.

“왕실의 존립을 반대하는 자, 공화정을 지지하는 자, 그리고 아나키스트까지.”

로저스가 테이블에 앉은 열댓 명의 사람을 눈으로 훑으며 이야기했다. 주변인들에게 항상 몽상가니, 사상가니 하는 말로 생각을 폄훼당해 온 길버트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지금의 왕실은 자신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면서 의회의 혼란을 유도해, 완전한 공화정을 이룰 수 없도록 반대하고 있네. 그러면서도 왕실 소식지 따위를 내서 그들에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만들고 있어.”

“내 말이 그 말일세!”

길버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주변으로 둘러앉은 사내들이 신입 길버트의 열성적인 태도에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만나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거라면 그들 역시 한 번쯤은 해 본 일이었다.

“그래. 자네라면 동의할 줄 알았지.”

로저스 역시 웃는 낯으로 길버트를 추켜세웠다.

“짐작하겠지만, 이 자리에 우리가 모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야.”

“…….”

“사실 완벽한 목표는 모두 다르지만, 왕과 왕실이 없어야만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모두 같지 않은가.”

로저스가 나무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대고 상체를 조금 숙였다. 모두가 그를 향해 몸을 숙이고 그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내세울 후사도 없으니, 왕만 없어진다면 왕정 지지자와의 싸움도 끝이 날 수밖에 없어. 물론 잠시간의 혼란은 있겠지만 의회의 힘은 더욱 커질 테고, 스쿠안처럼 완벽한 공화정의 형태가 되겠지.”

로저스가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처럼 의회의 기능과 역할이 답보상태에 머무르는 이유에는 지주와 비지주의 갈등도 있었지만, 왕정 지지자와 공화정 지지자의 갈등에도 연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궁 안에서만 머무르는 왕족을 어떻게 없앤단 말인가?”

길버트가 물었다.

칼라브리아에 왕족이라고는 왕과 왕비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은 왕궁의 담을 넘지 않았다. 그나마 사냥제를 위해서 왕이 왕궁을 나와 동부로 가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경비가 삼엄해 따라다닐 수가 없었다.

특히나 왕은 이미 한 번 암살의 위협을 겪은 적이 있어, 궁 밖으로 외출할 때 더욱 예민했다.

“내가 이번에 아주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거든.”

로저스가 씩 웃으며 길버트의 질문에 대답했다.

“왕이 곧 수도로 나온다고 했어.”

“수도엔 왜?”

“그놈의 왕실 소식지 때문에. 신문사 하나를 사들여서 이름과 목적을 바꾸고, 개관 기념식을 한다더군.”

아무리 왕의 주변 경계를 삼엄하게 한다 하더라도, 그 일대를 전부 통제해 사람이 지나가지 않도록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분명 왕을 보겠다고 몰려드는 이들도 한둘이 아닐 터였다.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야.”

“…….”

“왕을 죽이기에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기도 했다. 로저스가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이려는 건가?”

“화약을 입수했어.”

자리를 지키고 앉은 모두의 얼굴에 전운처럼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 길버트 역시 매한가지였다.

“우리 중 몇은 군중들이 몰린 곳에 숨어서 혼란을 유도하고, 시선을 왕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해. 왕의 호위들이 방심한 틈을 타, 내가 왕이 있는 곳에 화약을 던질 계획이야.”

로저스가 그의 계획을 차분히 털어놓았다. 길버트는 참석자들의 숨에 의해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촛불을, 그리고 로저스의 단단한 진심을 번갈아 보았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모두 이 계획에 참여하리라고 믿네.”

“당연하지!”

로저스가 뿌듯한 얼굴로 동지들을 바라보다가 품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다들 여기에 이름을 적어. 배신자는 존재해선 안 되니까.”

가장 먼저 이름을 적은 로저스가 펜과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내들이 마치 먹이를 발견한 짐승처럼 달려들어 제 이름을 그 위에 새겨 넣었다.

참석자들을 모두 돌아, 마지막으로 종이가 길버트 앞에 놓였다. 모두가 길버트를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길버트는 무를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걱정 말게.”

길버트가 씩 웃으며 펜을 들어 제 이름을 종이 위에 써 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저스가 제 몫의 술잔을 들어 올렸다.

“왕의 죽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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