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로비엔의 명을 받은 밀리언은 해당 기사를 낸 신문사를 추적했으나 꼬리를 잡는 데는 실패했다. 그럴 것을 알기나 한 것처럼, 신문사의 문을 닫고 야밤에 도주했다는 소식만이 돌아왔다.
기사의 여파는 파동을 그리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실제로 유산이나 사산을 경험한 후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위태롭던 때에도 그처럼 쉽게 임신했는데, 오히려 모든 것이 안정된 지금은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니냐는 주장도 튀어나왔다.
“폐하께서 영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무슨 영광을 누리자고 손에 쥔 것을 내려놓자 마음먹었지?
로잘린의 마음속에 남은 깊은 상처를 눈으로 목격했던 기억은 드문드문 일상 속에 찾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로잘린을 자신의 품 안에서 온전히 지킬 수 없게 된 것만 같아서였다.
“다른 생각을 하시는 모양입니다.”
밀리언은 차라리 자신이 고자라고 떠들었더라면 이처럼 기분 나쁘진 않았을 거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던졌던 제 주군을 흘끗 살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로잘린이 묘한 눈으로 밀리언과 로비엔을 번갈아 보았다.
이미 로비엔에 의해 입이 막힌 밀리언은 이전처럼 말을 전달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로잘린의 시선을 피했다.
“폐하.”
“…….”
“폐하?”
평소 같으면 입만 열었어도 무슨 말을 할지 주의를 기울일 사람이었다. 그러나 로비엔은 제 비가 두 번이나 부를 때까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아.”
로잘린이 손을 뻗어 오른쪽 얼굴에 갖다 대고 난 후에야 반응이 돌아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시고.”
“신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신문? 로잘린이 의아한 얼굴로 로비엔을 응시했다. 로비엔은 신문에 실린 저에 대한 헛소문쯤은 차를 넘기듯 가볍게 넘겨 버리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불쾌함을 감추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왕실 소식지를 발간하자던 비의 혜안에 대해 감탄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깊어지기 전, 로비엔의 온화한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어째서요?”
그 방법은 적당히 효과적이었다. 그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즉시 화제를 돌려 줄 만큼 효과적인 대화 소재였기 때문이다.
“왕실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로비엔의 인정에 로잘린의 얼굴에 뿌듯함이 비쳤다.
“왕실과 백성들 사이에 매체가 없는 지금 같은 때에는 그만한 방법이 없죠.”
제 말이 맞지 않느냐고, 칭찬해 달라는 듯 저를 지켜보는 시선이 반짝이고 있었다.
“비께서 언제 틀린 적이 있던가요.”
우아하게 칭찬이 돌아왔다. 로비엔이 언제 로잘린을 비난한 적이 있기는 했냐마는, 이럴 때마다 면역 없는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한 듯 두 귀가 발긋해지곤 했다. 나직한 목소리에 담긴 애정이나 신뢰를 마주치는 순간은 늘 그랬다.
“초판으로 끝내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그 신문사를 사들이기로 했거든요.”
“그건 처음 듣는 소식인데.”
로비엔이 예상치 못한 소식에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로잘린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사실 이야기라기보다는 말썽을 부린 아이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매번 협상하고, 기계를 빌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아예 인수했다.”
어쩐지 물음표를 단 듯 끝 음이 높아지는 문장에 로잘린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직전까지 그의 시선을 제게 돌리려고 했던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은 기색이었다.
“나중에 왕실 소식지가 아니라 그냥 신문사로 운영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러면 의외로 수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변명하듯 생각을 털어놓던 로잘린이 멈칫했다.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턱을 손에 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비엔의 입가에 비치는 희미한 웃음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놀리시는군요.”
“내가 왜 비를 놀리겠어요.”
그 속을 모를 리가 없는데, 로비엔은 일단 발뺌하고 보았다.
쓸데없이 아름답게 생겨선, 눈이 마주치면 마음이 사르르 녹아 화도 맘대로 낼 수가 없다. 로잘린이 밉지 않게 제 반려를 흘겨보았다.
“비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
“게다가 부가적인 이익도 있다고 하니 더욱 끌리는군요.”
로비엔은 왕실 소식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언질 한번 없이 신문사 하나를 통 크게 사들인 아내의 행동을 칭찬했다. 또 일을 벌였다며 자신을 걱정하는 소리를 할 거라 예상했던 로잘린은 뜻밖의 상황에 눈만 깜빡이게 되었다.
“대신 무리하지 않도록 해요.”
“안 해요. 절대로.”
로잘린이 맹세했다. 혹시라도 로비엔이 제 보람을 빼앗을까 무서운 사람처럼, 무척이나 빠르고 가벼운 맹세였다.
아마 지켜지지 않으리라. 로비엔은 이미 반 이상 확신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나를 써먹어도 좋아요.”
그러니 차라리, 자신을 내주는 수밖에.
“폐하를요?”
“왕실 소식지를 발간한다고 신문사까지 사들였는데, 기념식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질문을 빙자한 권유였다. 일 벌이기 좋아하는 제 비가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건넨 제안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로비엔을 응시하는 로잘린의 눈동자가 좋은 생각이라는 듯 은근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로 창간 기념식을 해도 될까요?”
“비께서 원하시면 직접 참여도 해 드릴 겁니다.”
로비엔이 얼마든지 개회자가 되어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제법 끌리는 제안이었다. 로잘린은 왕실 소식지를 최대한 크게 키우는 방법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말 바꾸시면 안 돼요.”
로잘린의 얼굴에 개화한 꽃망울처럼 화사함이 퍼져 나갔다.
로비엔은 몇 번이고 그러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뭐가 되었든 로잘린의 관심을 제 생각이나 표정에서 거두었으니 성공적이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것은 로비엔의 착각에 불과했다.
로잘린은 그처럼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자신을 제외한 일에는 그다지 감정 변화가 없는 사내가 감정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로 짜증스러운 일이라면 더욱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로비엔은 결코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밀리언을 불러들일 수밖에.
“궁금한 게 있어요, 로단테 백작.”
밀리언은 이미 로잘린이 무엇을 물을 건지 대충 예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두워진 안색과 슬슬 피하는 시선이 그랬다.
“무엇을 궁금해하시는지…….”
“폐하께서 숨기고 계신 일이 뭔가요?”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밀리언은 올 게 왔다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절대 왕비님께 말을 전달해선 안 된다 명령하셨습니다.”
“로단테 백작에겐 어떠한 해도 없을 것을 약속해요.”
로비엔이 입을 막았을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로잘린이 즉시 조건을 덧붙였다. 애초에 비밀을 두지 않기로 약속해 놓고, 제게 무언가를 숨기는 로비엔이 잘못된 거라 생각하면서.
“폐하께선 오전에 몇 가문과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한데?”
“평민들과 권한을 나누어 갖기 싫은 이들이 기존의 질서로 복귀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폐하께선 명백히 거절하고 계시지만, 그들은 후사를 갖게 되면 달리 생각하게 되실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또 후사에 관한 이야기였구나. 하긴, 로비엔이 그녀와 관련되지 않은 일로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로잘린과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후사에 관련된 얘기였을 거고.
“무어라고 했기에 폐하께서 그처럼 화가 나신 거죠?”
마음 깊숙이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지만, 어리석게도 다른 일이었기를 바랐다. 기운이 빠졌다.
“솔직하게 말해요. 그대가 말하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밀리언이 아니더라도 사실을 알아낼 방법은 많았다. 궁 안에는 듣는 귀가 많았으니까.
로잘린의 명령에 밀리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비님께서 불임이 아니냐는 불경한 언사가 있었습니다. 폐하께선 본인을 종마 취급 한다며 화를 내고 모두 쫓아내셨습니다마는, 그래도 계속 마음이 언짢으셨던 모양입니다.”
혹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왕비를 향한 총애 때문에 권력이고 뭐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어쩌면 후사를 볼 수 없는 왕비를 언제까지 끼고 돌 거냐며 내치라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고.
“폐하.”
“나는 괜찮아요.”
밀리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부르자, 로잘린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로잘린이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이럴 때마다 이미 죽고 없는 클로티 부인 생각이 났다. 아마 그녀가 살아 있었더라면, 제 말이 맞지 않느냐고 소리를 높였을 거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설마 아이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보가트 양은 곧 왕세자비가 될 테고, 언젠가는 왕비가 될 수 있는데도 말인가요?’
그른 말은 아니었다. 클로티 부인이 했던 말대로 로잘린은 왕세자비에서 왕비가 되었다.
‘궁 안에서 보가트 양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무기는 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요.’
그러는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무기는 뛰어난 능력이나 책략이 아니라 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얼마나 열심히 살건, 로비엔을 도와 어떻게 나라를 꾸려 가건 사람들에겐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로잘린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후사를 잇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나가 봐요. 폐하께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은 절대로 알리지 말고.”
밀리언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섰다. 홀로 응접실에 남은 로잘린에게서 작은 한숨이 샜다.
로비엔에게는 늘 고마우면서 미안했다.
로잘린은 바보가 아니었고, 왕비의 자리에 요구되는 의무를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로잘린과 관련된 헛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로비엔의 피로함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어서 의무를 다하는 게 좋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하지만 아이를 사산했다는 충격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계단에서 떨어지기 바로 직전까지 배 속에서 움찔거리던 어린것의 박동이 선명한데, 정작 세상에 내놓은 아이는 나자마자 숨이 끊어졌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괴로웠다.
욱신거리도록 가슴을 조이는 것은 공포이면서 죄책감이었다.
겉으로야 평화로워 보이지만, 다시 누군가 자신이나 아이를 해치려고 하지는 않을까? 낳게 될 아이가 건강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을까? 또 섣부르게 몸을 풀어 글로리처럼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이렇게 마음이 약했었나.”
로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남들에게도 종종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다시 극복하지 못할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멈칫거리는 스스로가 한심하게도 생각되었다.
하지만 직면하기보다는 오랫동안 외면하기만 한 걱정과 공포는 끈덕지게 뒷덜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로비엔의 사랑을 방패로 비겁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걸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