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34)화 (134/151)

# 6.

기억이 어느 날로 돌아가 있었다.

클로티 부인을 앞세워, 로잘린을 찾아온 선왕비가 언성을 높였다. 로잘린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모든 오해가 발생한 이유는 로잘린 탓이라고 이야기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과거의 그녀는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해! 듣지 마!’

자존심이 상해서, 수치스러워서, 그리고 로비엔의 진심을 가늠할 수 없어서.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아는데.

그때, 그런 협잡에 말려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흥분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이를 품은 몸이라 그저 방어하기 바빠 눈이 어두워졌다.

로잘린은 무언가에 빨려들 듯이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과거의 자신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로잘린!’

절박하게 달려온 그녀의 사내가 벽에 부딪혀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상황을 간신히 막았다.

로비엔은 희게 질린 로잘린을 보며, 아프지는 않으냐고, 괜찮으냐고 몇 번이고 물었다. 그의 등과 어깨가 단단한 벽에 부딪히면서 무언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는데도 아픈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배가, 배가 아파요.’

가느다란 두 팔로 부른 배를 감싸 안은 로잘린이 통증을 호소하자, 로비엔이 다급하게 궁의를 부를 것을 명령했다. 이내 로잘린의 몸을 들어 안은 로비엔이 황급히 계단을 올랐다. 망연하게 그 꼴을 지켜보던 선왕비와 그 시녀들이 몸을 비켰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안은 로비엔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로잘린의 침실로 내달렸다. 로잘린은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 뒤를 따랐다.

침대 위, 하얀 이불보가 붉게 젖어 들고 있었다.

‘비께서는 어떻지?’

‘이르게 출산을 하실 것 같습니다. 어서 산파를 불러야 합니다.’

곧이어 달려온 궁의가 산파를 불러올 것을 요청했다. 마리가 엉엉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통과 서러움, 그리고 당황스러움으로 흐린 기억에도 그가 곁을 지키는 것만은 남아 있었다.

달려온 산파는 사내가 산실에 있어선 안 된다며 로비엔의 등을 떠밀었다. 마지막까지도 차마 마음에 걸려 발을 떼지 못하던 로비엔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끔찍한 고통이 제대로 시작되었다.

‘흐윽, 흐아악!’

마치 영혼처럼 제삼자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데도, 차게 식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를 낳는 일은 직접 겪었다. 로잘린은 그 순간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하. 힘을 주십시오!’

산고로 눈앞이 노랗게 변해 가는데도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걸 아는지 배 속에서 움직이지 않던 아이.

‘아이를 밀어내셔야 전하께서 삽니다!’

그 아이를 어떻게든 밀어내고, 살고 싶었던 자신.

로잘린이 기억하는 트라우마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처럼 일찍 태어나도록 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는 무사했을지도 모른다는 무의미한 가정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했다.

기어코 그 작은 아이를 사회로 밀어낸 로잘린이 기진맥진한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이가 우는지, 손가락과 발가락은 멀쩡한지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일어나서 아이를 봐. 안아 주란 말이야!’

로잘린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기절해 버린 과거의 로잘린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막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는 게 이상하지도 않다는 것처럼.

하녀들과 함께 뒤처리를 마친 산파가 착잡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내내 앞에서 서성이던 로비엔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여쁜 공주님이셨습니다.’

산파의 통보에 로비엔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굴려, 강보에 싸인 아이를 바라보았다.

‘태어난 직후부터 숨을 쉬지 못하셨습니다.’

산파는 무척이나 단호하게 아이의 죽음을 통보했다.

로비엔이 흔들리는 걸음을 떼, 로잘린을 지나쳐 아이 앞에 섰다. 늘 호수 같다고 생각했던 그의 눈에 진짜 호수처럼 물기가 가득 고여 있었다.

로비엔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얼굴로, 그의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아이를 들어 올렸다.

‘……글로리.’

이마를 마주 댄 채 그가 아이의 이름을 속삭였다. 뚝 떨어진 그의 눈물이 아이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글로리.’

로비엔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부르던 로잘린은 입을 틀어막은 채 서럽게 눈물을 터뜨렸다.

“로잘린.”

아이의 죽음, 그리고 그의 고통마저 아이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져서였다.

“로잘린!”

“허억.”

로잘린이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놀란 얼굴로 그녀를 잡아 흔들던 로비엔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그녀의 몸을 달랑 들어 안았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마른 등을 도닥이고, 부드러운 입술로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면서 그저 괜찮다고 속삭였다. 로잘린은 그제야 현실의 자신도 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폐하.”

“듣고 있어요.”

로잘린이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로비엔을 불렀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다정한 목소리로 응답해 왔다.

“글로리가 태어나던 날의 꿈을 꿨어요.”

“…….”

“한 번도, 안아 주지를 못해서……. 미안해서…….”

로비엔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로잘린이 중얼거렸다.

로잘린을 끌어안은 로비엔의 팔에 작게 힘이 들어갔다.

“요새 자꾸 글로리의 꿈을 꿔요.”

축축하게 젖은 로잘린의 숨결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왜 그럴까.”

잠시 멈칫했으나, 로비엔은 다시 규칙적인 손길로 로잘린의 등을 두드렸다.

“나를 원망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착한 아이라 그대를 원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로비엔은 최대한 무던하게 로잘린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그도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랬으리라고 믿으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

“자꾸 왜 이럴까.”

로잘린이 허탈한 목소리로 자조했다. 어쨌거나 자신은 로비엔의 아내로서, 그리고 한 나라의 왕비로서 아이를 낳아 후사를 이을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연약해 빠진 정신머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괜찮아요.”

“폐하.”

“당신도 나도 아직 젊으니.”

로비엔이 온유하게 로잘린을 얼렀다.

“당신이 두렵지 않을 때 아이를 낳아도 상관없고. 아이를 낳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가 살아가겠노라고 마음먹은 것은 로잘린의 곁이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 모습에 굳이 아이를 그려 넣은 적은 없었다.

“언젠가 이 자리가 필요 없는 자리로 여겨지면, 없어지길 바란다고 했잖아요.”

차라리 어느 날, 그런 순간이 왔을 때 부담 없이 털어 내기에는 그의 자식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부담감 느끼지 않아도 좋아요.”

그러니 로잘린이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트라우마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모두가 당신처럼 생각해 준다면 좋을 텐데.”

로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느끼는 부담감을 인정하듯이.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목을 칠까요?”

로비엔의 물음에 로잘린이 직전까지 눈물바람이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

“그럴 수 없잖아요. 법원도, 의회도 왕의 것이 아닌데.”

악몽을 꾸느라 잔 것 같지도 않은 몸이 피곤해 다시 눈이 가물가물 감기는 모양이었다. 작은 목소리가 그의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이처럼 그 결정을 후회하는 날이 올 줄 알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거라 이야기하는 대신, 로비엔은 제게 모든 것을 맡긴 아내의 몸을 좀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로잘린.”

그의 체온에 기대어 다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무렵, 로비엔이 작게 로잘린의 이름을 불렀다. 로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제 아내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확신한 로비엔이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로잘린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젖은 눈을 문질러 닦았다.

“왜 그럴까.”

라나의 말에 따르면, 자신과 함께 잠들지 않을 때만 꾸는 악몽이었다. 그러나 이제 로비엔이 곁에 있어도 로잘린은 악몽을 꿨다. 제때 치료받지 못한,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셈이었다.

정말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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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잘린과 로비엔이 같이 아침 식사를 하는 일이 더욱 드물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혼자 식사를 마친 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로비엔의 얼굴에 드리운 언짢음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늘 왕을 모셔 온 아랫것들은 확신했다.

“밀리언을 불러와.”

게다가 이렇듯 불쾌한 목소리로 그의 부관을 찾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로 볼 수 없었다.

식사 후, 그의 몫으로 커피잔을 내려놓던 하녀가 움찔하며 고개를 주억이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밀리언입니다.”

“들어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로비엔이 응답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완벽하게 갖춘 차림의 밀리언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도 그 주인과 비슷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일견 딱딱하게도 들리는 고저 없는 목소리는 이미 그가 들을 말을 예상한 듯 보였다.

“기사, 읽은 모양이지.”

밀리언이 짧게 인정했다.

로비엔이 손에 든 채, 언짢은 얼굴로 들여다보던 신문을 바닥에 던졌다. 펼쳐진 종이 위로 불쾌한 기사 제목이 선명히 드러났다.

“어떻게 생각하지?”

밀리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실의 권위를 어떻게든 끌어내리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왕의 유일한 약점이 왕비라는 사실은 이미 궁 안팎으로 소문이 난 지 오래였다. 그러니 그와 반대되는 세력이 늘 머리채를 잡는 것 역시 로잘린이었다. 같은 주제로 로비엔을 공격해 봐야 별 소득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내게 생식 능력이 없다 주장했으면 이처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거야.”

자신을 고자라 주장했어도 기분이 이렇게 나쁘진 않을 거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감히 황당함을 표시하기에는 주군의 기분이 무척이나 저조했다.

로비엔이 서늘하게 웃었다. 시선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 기사의 제목으로 향해 있었다. 악의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제목에 이어지는 내용은, 로잘린이 아이를 잃은 후 몸을 다쳐 불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감히 비가 불임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

“기사를 쓴 자, 그리고 이 기사에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를 지껄인 자를 모두 찾아와.”

로비엔이 비틀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엇을 하려 하심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대신 목을 칠 것이 아니라면 묻지 마.”

“폐하!”

밀리언이 놀란 듯 로비엔을 불렀다. 로비엔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지.”

밀리언이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넘겼다. 그의 주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다행이라는 듯이.

“그렇다고 비께서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를 후벼 파는 놈들을 가만둘 수는 없어.”

“…….”

“최대한 조용히, 왕실을 모욕한 죄로 법원에 넘겨.”

로비엔이 차게 명령했다.

“잡아들이기 전에 저항하는 경우, 불가항력으로 몸 다툼 정도는 있을 수 있겠지.”

죽이지만 않으면 잡아들여 족치는 것까지야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란 듯이 이야기하는, 낯선 사내의 얼굴을 지켜보던 밀리언이 몸을 숙여 명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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