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33)화 (133/151)

# 5.

연회를 연 것은 칼라브리아의 국왕 내외였으나, 연회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칼라브리아에 방문한 스쿠안의 외교 사절단이었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한 피카르디 총리와 예를 갖추어 인사를 나누었다.

피카르디는 왕은 아니지만, 로비엔처럼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이므로 마땅한 예를 다할 필요가 있었다.

“평화 협약을 맺은 기념이면서, 환송을 위한 연회이니 모두 즐겨 주길 바라오.”

그렇다고는 해도, 연회장의 가장 상석에 왕과 왕비가 앉을 의자를 두지 않은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연회 참석자들 역시 단순 귀족 세력뿐 아니라, 의회 구성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선의에 감사드립니다.”

피카르디가 사절단을 대표하여 감사를 표했다.

“이 안에도 그대를 보고 싶어 하던 이들이 많을 테니, 자유로이 시간을 보내도 좋습니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피카르디가 자연스레 시간을 보내도록 연회 참석자들 사이로 보내 버린 로비엔이 돌아섰다. 반갑지 않은 귀부인들과의 짧은 인사를 마친 후, 평소와 같이 그의 곁을 지키고 선 로잘린의 시선이 회장의 면면을 훑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로비엔의 물음에 로잘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시선이 가네요. 구성원들이 색달라서인가.”

그러나 고개를 젓는 행동이나 무던한 말투와 달리, 샹들리에에 반사된 빛에 반짝이는 눈에는 미묘한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길거리에서 마주친 고양이처럼.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은데.”

“…….”

“솔직하게 말해 줘요. 어떤 것도 속이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순순하지는 않은 눈매가 고양이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로비엔의 손끝이 로잘린의 눈매를 의미 없이 더듬었다. 그제야 로잘린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저자, 왕실에 적대적인 기사를 내는 신문사를 후원하는 자예요. 왜 초대하신 거예요?”

그래서였나. 로비엔이 턱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사내에게 짧게 시선을 두었다.

“기사라도 쓰라고 들였어요.”

“긍정적으로 기사를 내겠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돌아왔다.

“오늘의 일을 어떻게 부정적으로 기사로 만들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만일 그렇게 되더라도, 왕실 소식지 초판이 큰일을 하면 될 일이지 않아요?”

로비엔이 고개를 숙여 로잘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커다란 손은 안심하라는 듯 로잘린의 등허리를 다독이고 있었다.

“물론이죠.”

당당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로비엔이 짧게 웃었다. 사랑스럽다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왕과 왕비의 친밀한 접촉과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을 발견한 이들이 흐뭇한 얼굴로 국왕 내외를 지켜보았다.

“폐하께선 제게 감사하게 되실 거예요.”

로잘린이 장담했다. 로비엔은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매 순간 감사하고 있어요.”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늘 로잘린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감사한 것을.”

그쯤 되자, 부끄러움은 로잘린의 몫이 되었다. 늘 로비엔 앞에서 제가 대단한 사람인 척 뻐기어 보다가도 포기하게 되는 것은 그의 반응 때문이었다. 로잘린의 장난은 늘 로비엔을 거치면 진심이 되어 돌아왔다.

물론 좋았다. 그렇지만, 익숙하지 않아 부담스럽기도 했다. 속절없이 붉어지는 얼굴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어서 더 그랬다.

“제가 잘못했어요.”

로잘린이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시선 역시 그의 어깨쯤으로 피해서 내려 둔 참이었다.

“비께서는 잘못한 게 없는데 무엇을 사과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로비엔이 빙긋 웃었다.

로잘린이 밉지 않게 로비엔을 흘겨보다가 시종을 불러 잔을 받아 들었다. 물처럼 술을 홀짝이는 자유분방한 제 비조차도 어여쁘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진실로 유난이다. 멀찍이서 제 부인과 함께 그들을 지켜보던 밀리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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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르디를 포함한 외교 사절단은 칼라브리아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위풍당당하게 스쿠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연회가 있던 밤에 관한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거기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궁인들의 입에서만 알음알음 퍼지던, 국왕 부부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소문을 모두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사이가 좋을까.”

일 년도 채 못 가서 파경을 맞이하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완전한 부부가 되었다. 직계 혈족들의 위협을 이겨 낸 둘은 완벽하게 서로의 반쪽이 되어, 근래에는 본보기가 되는 부부로 칭송받기까지 했다.

“그러니 처음에는 정부로라도 살겠다 하던 아젠타 부인도 포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이를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겠소? 몇 년 뒤라면 몰라도 지금은 절대 불가능하지.”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알폰소는 국왕 부부의 사생활에 그 이상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다른 하나의 이유인 왕실 소식지를 펼쳐 들었다.

“또 모르는 일이긴 하지.”

그 순간, 한 남자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폰소가 고개를 틀어 짧게 그를 보았다. 입에 시가 하나를 문, 대낮에도 술기운으로 벌건 사내의 얼굴이 다소 낯이 익었다.

“무슨 소리요?”

“당장 왕권도 예전 같지 않아 탄탄한 후계가 필요한데, 두 분 사이엔 아이가 없으니.”

커피를 마시던 사내들 사이로 의미심장한 시선이 흘렀다.

긴 세월이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있었다. 특히, 사내들이라면 제 새끼를 보는 일에는 집착하는 법이니.

“그날, 귀부인들이 속닥거리는 이야길 듣다 보니 남사스럽게도 매일 밤 침실도 같이 사용한다고 하던데.”

하지만 그렇다고 왕이 다른 비를 들일까? 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으나, 앞으로 그들 사이에 균열이 일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만큼 급하단 건데…….”

“처음 공주님은 그처럼 빨리 가지시더니, 어찌 이후로는 소식이 없는지.”

그들 중 누군가 혀를 찼다. 얼마쯤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평민 출신에서 완벽한 왕비가 되기까지 거쳐 온 로잘린의 고난에 마땅한 보상이 따르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혹시 첫아이를 잃으며 몸을 다치신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무슨 그런 소릴…….”

“여인들은 종종 아이를 잃은 뒤에 다시 임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모를 일이지.”

어쩌면 왕비가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쓸모없는 몸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무엄한 이야기였다. 곁에 둘러앉은 이들이 황급히 그의 몸을 툭 치며 눈치를 주었다. 알폰소는 그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자넨 어찌 그런 소릴 함부로 하나?”

“누가 들을까 무서운 소리 아닌가.”

이미 알폰소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내들은 급하게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끊었다. 왕과 왕비는 많은 사람에게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어, 듣는 귀를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속 시끄러울 일도 없고, 모두 진정이 되어 가니 곧 후사를 가지시겠지.”

로비엔과 로잘린 곁에 도사리던 직계의 위협은 모두 사라졌다. 타국과의 평화 협정까지 맺어, 안정을 기반으로 한 통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한 터였다.

“스쿠안과의 평화 협정 덕분에 경제적인 물꼬도 트였으니.”

“어제 자리에서 보니 스쿠안의 총리가 무척 흡족한 얼굴이기는 했지.”

사내들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넓게 펼쳐 둔 왕실 소식지로 향했다.

스쿠안의 사절단을 환송하고, 평화 협약의 성공적인 합의를 이뤄 낸 후 치른 연회가 얼마나 큰 수확이 있었는지가 주된 내용이었다. 스쿠안의 총리가 로비엔에게 얼마나 호의적이었는지, 칼라브리아의 사업가들에게 스쿠안은 언제나 열려 있을 거라는 말로 보인 긍정적인 반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따위가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러니 의회가 더 자리를 잡지 못하지.”

“자네도 행정 제안 기구에 있을 때는 국왕 폐하가 괜찮은 사람 같다 하지 않았나?”

“의회로 바뀌기 전의 얘기지.”

툭 내뱉는 불만의 소리에 알폰소가 작게 탄식했다. 얼굴에 불만이 덕지덕지 붙은 사내의 정체가 누구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서였다. 사상가 길버트. 의회 내에서도 유명한 자였다.

“생각해 보게. 의회의 구성을 왕이 요구했잖나. 어쩌면 그렇게 절묘하게도 지주와 비지주, 귀족과 평민들을 비슷한 숫자로 구성했는지, 아직까지도 쌈박질 중이지.”

“이보게.”

길버트는 어떻게든 화제를 끊으려는 친우들의 말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거야. 변화를 추구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손에 쥐고 가지고 놀려고. 왕족들은 사회에 도움이 될 수가 없다니까.”

“자네 제발 입 좀 다물 수 없나?”

“이렇게 트인 자리에서는 할 말, 못 할 말 좀 가리게.”

이제 길버트 주변에 있는 자들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히 길버트 곁에 머무르다가 자신들까지 오해받기 두렵다는 듯, 사내들이 마시던 커피잔도 내팽개치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겠네.”

“나도 딸아이 선물을 사다 주기로 해서.”

결국 주변인들이 모두 떠나고 길버트 혼자 테이블에 남았다. 길버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여전히 테이블 위에 펼쳐진 왕실 소식지를 노려보았다.

“왕실 소식지는 무슨. 어디 왕실이 사회 변화에 끼어드냔 말이야.”

대놓고 왕과 왕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사실 왕족은커녕, 정부조차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길버트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사회에 순응하는 주변인들이 저렇게 상대를 해 주지 않으니, 길버트는 길바닥에 버려진 마차 바퀴나 다름이 없었다.

“각자 생각은 다 다른 법이라지만…….”

알폰소가 짧게 혀를 찼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은 텅 비어 있었다. 알폰소는 그제야 자신이 계획보다 오랫동안 커피 하우스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알폰소는 그쯤에서 길버트에게 관심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폰소는 항상 바쁜 몸이었고, 오늘도 늘 그렇듯 만나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시오?”

“방금 전까지 하던 얘기에 대해서 더 들을 수 있을까 싶은데.”

하지만 만일 누군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길버트 곁에 붙어서 그따위 이야기를 더 해 보라 부채질할 줄 알았더라면.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이 어떠한 일을 초래할 줄 알았더라면.

“당신이 누군 줄 알고 아무 얘기나 입 밖으로 내뱉으라는 건지…….”

그처럼 보던 신문을 접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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