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지난밤, 로잘린과 로비엔에게 어떤 기억을 상기시켰는지 알지 못하는 피카르디가 웃는 낯으로 응접실에 나타났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군요.”
감회가 남다르다는 투였다.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여태까지 긍정적이었던 피카르디에 대한 평가가 어제부로 곤두박질친 터라, 그가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탓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 잠이 잘 오지 않아 고생했습니다.”
공화정으로 나라 전체가 뒤바뀐 건 스쿠안뿐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대내외적인 불안정성 때문에 평화 협약을 맺은 나라는 존재치 않았다. 새로운 형태의 스쿠안에서 외교적인 평화 협정을 맺게 된 것은 칼라브리아가 처음이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만 칼라브리아나 스쿠안이나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협력까지도 내다보고 맺은 협상이기는 했지만.
“칼라브리아를 떠날 생각에 아쉬우셨나 봅니다.”
어제보다는 조금 밝아진 안색의 로잘린이 빙긋 웃으며 농을 했다.
피카르디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얼마쯤은 그렇습니다. 타국에 머무를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는 총리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어, 외교적 목적이 없는 한 마음대로 여기저기 떠도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런 면에서는 사실 왕과 왕비라는 지위를 가진 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스쿠안으로 돌아가면 이전보다 더 환영받으실 테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왕비님께 또 한 수 배우는군요.”
피카르디가 능청맞게 대꾸했다.
“한데 의회에서 참석한 자는 없습니까?”
응접실을 훑어보던 피카르디가 그리 물었다. 물론, 바로 다음 순간 아차 하는 얼굴이 되기는 했다.
의회를 만들고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고는 하나 칼라브리아는 현재 왕정제 사회였다. 게다가 비등한 세력의 갈등으로 여태 총리 하나 뽑고 있지 못한 의회에서 대표 자격을 가진 자를 선출하여 내보내기도 우스운 실정이었다.
“의회에서 참석하는 자는 없지만, 오늘 평화 협정을 맺으면 이를 왕실 소식지에 낼 생각이에요.”
로잘린이 자연스럽게 침묵의 고리를 끊고 들어왔다. 피카르디가 흥미로운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얼마 전에 왕실 소식지를 이야기하시더니, 바로 행동에 옮기려 하십니까?”
“생각이 났을 때 움직이는 편이 나으니까요.”
“정말로 행동력이 빠르신 분입니다.”
피카르디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로잘린을 훑었다. 여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재로 보는 시선이었다.
추접스럽게 피카르디의 시선에 기분 나빠하는 대신, 로비엔은 로잘린 곁에 좀 더 근접하게 다가섰다.
“비께서 조금 그러한 면이 있지요.”
“응원하시는 거 맞지요?”
로잘린이 새침하게 눈을 뜨고 물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비엔은 바로 로잘린의 허리를 끌어안거나 이마에 입 맞출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로비엔도 타인 앞에서 왕족으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로잘린은 그 부분만큼은 궁중 교육을 담당하는 이만큼이나 보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로비엔의 대답에 로잘린이 오연하게 웃었다. 왕비로서 손색없는 오만한 태도였다.
“이리 잡담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해야 할 일을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또한, 로잘린은 잡담으로 그들의 대화를 꾸려 나가는 대신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키는 자세를 보였다. 주관자 중 하나로서 마땅한 태도였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들의 대화와 협상의 자리를 기사로 낼 생각에 들떠 있는 것이었겠지만.
로잘린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이에서 몇 걸음 물러섰다. 로비엔이 제 옆자리의 의자를 당겨 로잘린을 앉히고, 저 역시 착석했다. 피카르디와 그 수행원들 역시 시중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스쿠안의 사절단과 칼라브리아의 행정관이 정리한 평화 협정의 내용입니다. 모두 사전에 조율한 내용이니, 한 번 더 살펴보시고, 동의하신다면 서명하시면 됩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밀리언이 치고 들어왔다. 밀리언이 내내 들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총리께서 먼저 살펴보겠습니까?”
“아닙니다. 왕께서 먼저 살펴보시지요.”
피카르디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로비엔은 제 앞에 놓인 종이 위의, 이미 합의되어 특별할 것 없는 조항을 응시하다가 펜을 집어 들었다.
로잘린은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던 날처럼 유려한 필체로 제 이름을 새겨 나가는 그의 아름다운 손끝을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이 사내는 대체 어디까지 아름다울 셈인가를 새삼스레 곱씹는 사이, 로비엔이 자연스럽게 왕가의 문장을 집어 들었다.
낮에는 그렇듯 거칠 것 없는 두 나라 간 평화 협정이 이루어졌다. 저녁 시간에는 그러한 국가적 행사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비께서는?”
로비엔이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로잘린을 찾았다.
밀리언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로비엔은 밀리언이 어디까지나 로비엔의 부관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 듯했다.
“비께서 어디 계신지 알아 와.”
로비엔이 근처의 시종에게 명령하자, 그가 익숙하게 복도를 달려 나갔다. 왕이 왕비를 찾는 명령을 내리는 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있는 흔한 일이어서, 굳이 놀라서 눈을 굴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본분을 잊고 사절단을 따라 떠나실 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밀리언이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처럼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부디, 궁 안에서 갑자기 사라질 리 없는 왕비를 걱정하는 것 같은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듣고 보니 더 불안해지는군.”
그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 소리인지 빤히 알아, 로비엔이 장난으로 응수했다.
“비께서는 워낙에 자유로운 영혼이시니.”
하지만 완벽한 장난은 아니었다. 로잘린이 그처럼 자유로우며,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으므로.
“집착하는 사내는 매력이 없다 하시긴 하였는데.”
밀리언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미한 감정의 동요가 일었다. 로비엔은 그 이상 제 부관을 놀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특별한 일 없으면 그만 가서 로단테 부인이나 에스코트해. 계속 기다리고 있을 듯한데.”
대신, 그가 오랜만에 보는 아내를 만나 제 주군의 험담이나 맘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밀리언도 제 아내를 두고 주군과 쓸모없는 이야기나 나누고 싶지는 않았던지, 사양하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폐하. 왕비님께서는…….”
“조용히.”
다시 돌아온 시종이 로잘린의 행방에 관해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로비엔이 손을 들어 시종의 말을 멈추었다.
“기사에는 무조건 폐하께서 주관한 일이었다는 내용을 담아야 해요.”
긴 회랑 끝에서 그가 사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로비엔은 성의 없이 시종에게 가 보란 듯 손짓했다.
눈칫밥을 한두 해 먹은 게 아닌 시종이 후다닥 자리를 비켰다. 로비엔은 귀를 쫑긋 세운 토끼처럼, 바쁘게 걸어오는 발소리와 당당하게 명령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왕께서 얼마나 칼라브리아의 안정과 대내외적인 평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계시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야 하고요. 알겠어요?”
잠시 걸음을 멈추어 선 로잘린이 옆에 선 자를 향해 검지를 치켜들고 강조했다.
숨 가쁘게 손을 놀리며 로잘린을 따라잡던 사내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마 로잘린이 왕실 소식지의 초판본 인쇄를 위해 협상했던 신문사의 관계자인 모양이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해서 그 분위기에 대해서도…….”
요구사항을 쏟아 내던 로잘린이 회랑 끝에 선 로비엔을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저녁의 봄바람에 정원의 꽃향기가 담뿍 섞여 있었다.
“폐하.”
로비엔은 당연하다는 듯이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자를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로잘린은 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지만, 측면에서 불어온 바람에 드레스를 장식한 러플은 여전히 팔랑거리고 있었다.
“내내 어디에 있었어요?”
“왕실 소식지의 초안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요. 바쁘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찾으셨나요?”
로잘린이 말없이 사라져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늘 찾는 것을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 그런데도 굳이 그리 질문하는 얼굴이 요망했다.
“그대는 먼저 연회장으로 가 있어요. 폐하와 나눌 얘기가 있으니까.”
로비엔이 무어라 속삭이기도 전에, 로잘린이 저와 함께 걸어왔던 사내를 연회장으로 보내 버렸다. 아랫것들 역시 멀리 물러나 있었다.
보통의 왕과 왕비가 사용인들이 뒤따르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에 비해, 로잘린과 로비엔은 그들의 내밀한 시간에 누군가 끼어드는 것을 못 견디는 이들이었다.
“드레스도 갈아입었군요.”
“혹여라도 어여쁘게 갖추어 입은 여자들에게 시선을 주시면 안 되니까요.”
로잘린이 로비엔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두 손바닥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짚은 채,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 박동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그 여자들보다 폐하께서 더 아름다우시니 관심도 없으시겠지만.”
로비엔이 헛웃음을 지었다.
늘 단단하게 로잘린을 지켜 주던 팔이 길게 뻗어 와 로잘린의 허리를 등 뒤로 감아 안았다.
“이 얼굴을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아 기분은 좋지만.”
“좋지만?”
“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네요.”
콩, 부드럽게 부딪친 이마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어처구니없어하는 그의 마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눈에는 당신이 더 아름다운데.”
로비엔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속삭였다.
키들거리며 웃던 로잘린의 작은 웃음소리가 멈추었다. 첫사랑에 빠진 어린애처럼 양 볼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을걸요.”
로잘린이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로비엔은 말로 그의 진심을 강조하는 대신, 로잘린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여 마음을 전했다. 새가 부리를 쪼듯 닿는 연이은 짧은 입맞춤이 간지러웠다.
“아까 응접실에서도 이러고 싶었어요.”
“거짓말.”
“밀리언이 적당히 하라는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비께선 못 느꼈습니까?”
그랬나?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전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지독한 눈동자에 사로잡힌 로잘린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로비엔이 재차 얼굴을 기울였다. 가볍게 닿아 왔던 직전까지의 입맞춤과는 다르리라는 직감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밤을 보낸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그랬다.
“……!”
그러나 채 입술이 닿기도 전, 나팔 따위를 불어 대는 소리에 그들을 둘러싼 의미심장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졌다. 스쿠안의 사절단이 입장했다는 안내였다.
이처럼 연인 분위기나 잡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기억났다. 로잘린이 로비엔에게 기대어 키득거리며 웃었다.
“모두 기다리겠어요. 어서 가요.”
뜻밖에 깨져 버린 분위기가 아쉬운 듯 로비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잘린이 그의 손을 잡은 채 앞서 걸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드레스 아래로 은은히 비쳐 보였다.
이 밤, 로비엔의 마음대로 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비가 아름다워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