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31)화 (131/151)

# 3.

로잘린은 왕실 소식지 발간에 진심이었다.

로비엔은 이틀 뒤에 이미 피카르디 총리와 협의한 평화 협약에 대해 서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로잘린은 그날 꼭 기사를 작성해서 외부에 그 사실을 퍼뜨려야 한다는 열망에 불타고 있다 못해, 벌써 신문사 하나와 신문을 찍어 내는 일을 협상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인쇄소 하나를 차려 왕실 소식지를 정기적으로 발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탓이었다. 일단은 신문사 하나와 협상해, 평화 협약을 주제로 초판을 내 볼 모양인 듯했다.

이미 로잘린이 하고픈 대로 하라고 말한 적이 있는 로비엔은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말릴 수 있는 단계는 지났고, 로잘린을 막아 봤자 오히려 울망한 눈으로 그를 원망하며 올려다볼 게 뻔했다. 로비엔은 제 비가 그러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스쿠안 정부에서 발간하는 신문은 따로 없나요?”

“저희는 따로 없습니다.”

피카르디가 스쿠안에는 행정부가 주관해 발행하는 신문 같은 건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게 있다면 좋기는 하겠군요.”

그러나 피카르디도 끌리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대책 없이 거짓 소문에 얻어맞으며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을 감수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세력 싸움이나 견제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는 구조였으니까.

“왕비께서는 항상 공사다망하시군요.”

피카르디는 이제 로잘린에 대한 호감이 최고치를 찍은 것처럼 보였다. 충고를 할 수 있으면서도, 충고를 들을 수 있는. 다분히 정치적인 친구는 생각 이상으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총리께서도 보셨다시피, 현재 칼라브리아에는 손이 많이 필요해서요.”

로잘린의 대꾸에 피카르디가 벙긋 웃었다. 손이 필요하다고 해도 보통 왕비가 나서지는 않을뿐더러, 왕 역시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가 본 모든 예외는 칼라브리아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피카르디가 도와드려야지요.”

그러니 이 변화와 예외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기 위해 도울 수밖에. 어찌 되었거나 아직 서명만 하지 않았을 뿐, 우방국이 아닌가.

“도시 개발 건은 일반적인 개인이 다루기에는 너무 큰 예산이 필요하지요.”

피카르디가 머뭇거림 없이 말을 꺼냈다.

한 곳에서 건물을 철거하고, 다시 짓고, 판매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그들의 예산으로 해야 한다면 도시 개발은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들의 자비로 모든 것을 충당한 후에야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로잘린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보가트 상단에서 모든 것을 감당하겠다고 나서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칼라브리아 내에서 최고의 거부인 보가트 상단의 주인인 로잘린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면 다른 이들도 매한가지일 터였다.

“특정 너비에 대한 금액을 책정하고, 개발자에게 딱 그 정도의 금액만 지원하면 됩니다.”

로잘린이 흥미로운 얼굴로 경청했다.

일정 너비에 대한 금액을 지불, 초반 철거와 재건축의 비용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게 해 주면 된다는 얘기였다.

“만일 재건축에 그 이상의 금액이 소요된다면요?”

“만일 그 이상의 금액이 들어간다면, 초과한 금액만큼 그 건물의 전체 내지는 일부의 소유권을 그에게 주면 됩니다. 완공이 된 이후 갖게 된 건물에 손해분을 붙여 팔거나, 세를 받아 충당하면 되니까요.”

피카르디의 제안은 무척이나 그럴듯하게 들렸다. 왕실에서 그 예산을 전부 지원할 수 없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랬다.

“주인이 있는 경우, 주인과 그처럼 협상을 봐도 되니……. 괜찮은 생각이네요.”

“사실 스쿠안에서 했던 방식도 이와 같았습니다.”

로잘린의 긍정적인 반응에 피카르디가 무척 큰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이 소곤거렸다.

“덕분에 쉬운 길로 갈 수 있겠네요.”

“시간이 나고, 마음이 여유로워야 후사도 보실 수 있을 테니까요.”

피카르디가 손주가 보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시부처럼 이야기했다. 정작 로잘린의 시부인 선왕은 처음으로 볼 뻔했던 손녀도 죽이려고 했다는 점에서 우스운 비유이기는 했지만.

로잘린과 로비엔은 별다른 말 없이 가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은 피카르디의 설렘을 마치 타인처럼 관조했다.

왕가의 안정, 탄탄한 후계.

그 두 가지의 단어는 로비엔의 형제들이 모두 처형당하고 난 이후, 마치 꼬리표처럼 젊은 부부에게 따라붙었다. 로잘린이 안타깝게도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그저 지난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피카르디가 눈치 없는 노인네처럼 물었다.

로잘린이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비엔의 눈동자가 급격히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로잘린을 따라 기민하게 움직였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얼굴이 붉습니다.”

로비엔의 물음에 피카르디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인정했다. 식사 내내 와인을 홀짝거리고, 이후 대화 자리에서도 술잔을 내려놓지 않던 피카르디의 얼굴에 희미하게 붉은 기가 비쳤다.

“비께서도 피곤하신 듯하니, 이만 돌아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로잘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화를 나누는 동안 즐거웠어요. 푹 쉬고 이튿날 뵙지요.”

로잘린의 인사에 피카르디가 딸의 인사를 받아들이는 아비처럼 푸근하게 웃으면서도 격식을 차려 인사했다. 취했다기에는 정신이 말짱했다.

물론, 쫓아내는 것 같아 얼마쯤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피카르디가 꺼낸 화제가 그들 사이의 금기였음을 생각하면 그리 미안할 일도 아니었다.

“눈이 붉어요, 로잘린.”

로비엔이 가만히 손을 뻗어 로잘린의 보드라운 볼을 손끝으로 훑었다.

“잠이 부족한가 봐요.”

로잘린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총리가 방문한 뒤로, 비께서 내내 아침잠을 설치고 계시니 죄를 지은 기분이 드는군요.”

로비엔의 고백에 로잘린이 작게 웃었다. 직전까지 불유쾌했던 얼굴이 그의 장난에 금세 허물어졌다.

제 비의 기분에 무엇보다 예민한 로비엔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가 돌아간 후에 다시 늘어지게 자면 되니까요.”

“오늘은 일찍 쉬는 편이 좋겠어요.”

로비엔이 로잘린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대며 속삭였다. 로잘린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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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엔의 시선이 로잘린에게로 향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곤히 잠든 얼굴은 마치 어린애처럼 맑기만 했다.

그동안 계속 괜찮다고 하더니 역시 괜찮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랬다.

여러 일을 진행하면서 피곤하지 않다던 것은 당연히 거짓말이거니와, 아이를 잃은 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역시 거짓말이었다. 로비엔은 그걸 모를 만큼 천치가 아니었다.

“…….”

로비엔의 손끝이 흘러내린 머리를 둥그런 귓바퀴 뒤로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마치 실크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여전히 손끝을 맴돌아 쉽사리 손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로잘린의 단잠을 깨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미련이 남아 맴돌던 손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연약한 귓바퀴에서 떨어져 나왔다.

‘두 분께서 같이 주무시지 않는 날에는 악몽을 꾸시는 것 같습니다.’

로잘린의 하나뿐인 시녀인 라나는, 오래도록 로잘린을 모셨던 하녀 마리만큼이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했다. 그러니 로비엔이 종종 그녀를 불러 로잘린의 상태를 묻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이 신문에 오르내리는 계기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무슨 악몽을 꾸셨는지 알고 있나?’

로비엔의 물음에 라나가 머뭇거리는 얼굴로 그를 보다가 입을 뗐다.

‘……아뢰기 송구하나, 잃어버린 아기씨에 대한 꿈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아기씨. 나자마자 숨이 끊겼던 어린것. 딱 한 번 품에 안고, 이름을 불러 준 게 전부였던 그들의 첫아이. 눈동자 색깔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던 작고 연약했던 딸, 글로리.

며칠 전에 들었던 라나의 대답에 아연했던 기분을 떠올린 로비엔의 눈동자가 무거운 색조로 깊게 가라앉았다.

로잘린이 최근 그처럼 악몽을 꾸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왕가에 로비엔을 제외하면 남지 않은 직계 후사와 그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다.

종종 신문에는 그들의 후사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로 올랐다. 엄연히 왕정제를 유지하고 있는 한, 아이를 낳는 것은 로잘린의 당연한 의무라는 것이 논지였다.

물론, 로비엔은 그날의 신문을 당장 폐기하여 버리도록 하고, 궁 안의 그 누구에게도 로잘린에게 후사 따위를 언급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로잘린이 쓸데없는 괴로움을 끌어안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로잘린, 이게 무슨…….’

그러나 누가 입을 떼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들이 있었다. 겉으로야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발밑에서 계속 밟히는 조약돌 같은 것이 그랬다.

로잘린처럼 천성이 예민한 사람은 무형적이고 심리적인 압박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처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듯, 입으나 마나 하게 생긴 잠옷을 입고 그를 맞이했을 터였다.

‘폐하께는 후사가 필요하잖아요.’

로비엔은 얼마 전, 입은 것 같지도 않은 차림으로 침대 위에서 자신을 맞이한 로잘린을 기억하고 있었다. 몸을 처음 섞는 것도 아닌데 희게 질린 얼굴이나, 차게 식은 손끝은 절대로 유혹이 아니었다.

로비엔은 그 입술을 덮어 유혹 같지도 않은 유혹에 응하는 대신, 로잘린의 어깨에 가운을 둘러 주고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이렇게는 필요 없어요.’

‘폐하.’

‘로잘린, 나는 그대를 이처럼 힘들게 하면서까지 아이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로잘린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왕과 선왕비에게 대적해야 했던 탓에 로잘린은 제때 정신적인 회복을 이루지 못했다.

사랑했던 아이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하고, 애도하지도 못한 채 흘러간 시간은 여전히 로잘린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로잘린은 여전히 죽은 글로리를 묻은 땅에도 한 번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아.’

로비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로잘린을 얼렀다. 로잘린이 품 안에 깊게 얼굴을 묻었다. 우는 것은 아니었으나, 안도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 이후로 로비엔의 믿음은 더욱 강화되었다.

‘대화를 나눠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밀리언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

하지만 상처를 들춰선 안 된다. 절대로 로잘린 앞에서 글로리를 화제로 꺼내서는 안 된다. 로잘린이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한, 후사에 관한 이야기로 심리적인 부담감을 줘서도 안 된다. 남들이 남우세스럽다는 말을 하건 말건, 침실은 늘 함께 사용하여 외롭고 어린 아내를 혼자 둬서도 안 될 일이었다.

로비엔이 로잘린 곁에 몸을 뉘었다. 제 옆자리가 조금 묵직하게 가라앉자, 로잘린이 습관처럼 잠결에 칭얼거리며 그의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로비엔은 그 가느다란 몸을 품에 안고, 목덜미에 조용히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체온이 손끝에 감기자 노곤해졌다.

이렇게 살아가면 된다. 특별히 바랄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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