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30)화 (130/151)

# 2.

“어젯밤에 도착했으니 아직도 여독이 있겠네요.”

“아마도. 그래서 일부러 연회를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는 날에 해도 충분하죠.”

늘 그랬듯이,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걸음을 맞추어 걷는 동안 둘은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다. 매일 얼굴을 보고, 매일 밤 대화를 나누는 데도 신기하게도 할 말이 많았다.

“스쿠안의 총리는 도착해 있나?”

“예. 안에 들어 계십니다.”

공식적으로 응접실에 들어서기 전, 로비엔이 물었다.

로비엔이 눈짓하자 묵직한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정돈된 응접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비엔을 향해 인사했다.

“국왕 내외께서 드십니다.”

로비엔과 로잘린은 배열한 그들을 스쳐 지나 가장 상석의 자리로 향했다.

상석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머리가 조금 희끗희끗해진 낯선 사내가 보였다. 로잘린은 그가 바로 스쿠안의 총리, 피카르디임을 알았다. 로잘린이 그와 서신을 나누며 교류해 온 지는 제법 되었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스쿠안의 총리 피카르디 로튼이 칼라브리아의 국왕 내외를 뵙습니다.”

피카르디가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군요.”

로비엔 역시 그에게 환대의 인사를 건넸다. 악수로 대신한 인사는 짧게 끝이 났다. 로비엔이 착석을 권함과 동시에 피카르디와 그를 따라온 수행인들이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얼굴을 뵙게 되었군요.”

로잘린의 말에 피카르디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실 로잘린과 피카르디는 이제 나이를 뛰어넘은 친구에 가까웠다.

“저 역시 마침내 칼라브리아의 왕비님을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로잘린은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귀족이 아니었던 탓인지, 타국과는 달리 공화정인 스쿠안에 이렇다 할 악의나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고, 피카르디는 나이에 비해서 트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로비엔이 추구하는 변화, 그리고 미래의 우방국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사이가 나빠야 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오는 데 힘들진 않았습니까?”

“길이 많이 다듬어져 있어서 편안했습니다.”

로비엔의 물음에 피카르디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칼라브리아는 여태 시가지를 제외하고는 도시 구획이나 길이 그다지 깔끔하지 못했다. 그가 그나마 편안히 올 수 있었던 건, 도로 정비 사업에 나선 덕분이었다.

“스쿠안은 어떻습니까?”

“비슷합니다. 다만 저희는 수도에 큰 폭발 사고가 한 번 있었던 터라, 땅을 다지는 일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칼라브리아보다는 다듬어지고 정돈된 느낌이 강하지요.”

피카르디가 스쿠안의 이야기를 상세히 털어놓았다.

최근 스쿠안의 안정세, 새로운 국가사업과 성장 등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스쿠안에 방문할 수 없게 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현재 칼라브리아 왕실에 구성원이라고는 왕과 왕비뿐이니, 동시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스쿠안에 한번 방문해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지 않아 아쉬웠어요.”

“최근 복잡한 상황을 겪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 초대해 주심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피카르디는 얼마든지 초대할 수 있다며, 아쉬워하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그는 복잡한 칼라브리아의 상황에 대해 약간의 염려를 표시했다.

“잘 알고 있군요.”

“전환기의 혼란은 스쿠안도 지나온 일이니까요.”

피카르디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스쿠안은 갑작스러운 공화정의 전환을 맞이하며 봉건제와 신분제가 한순간에 폐지된 나라였다. 어떠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한 전환기를 맞이한 나라는 당연히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도움을 드릴 수 없다는 점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봉건적 요소가 단번에 폐지된 만큼 그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 여지는 없었다. 이번 일에서만큼은, 완곡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칼라브리아에게 스쿠안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도움을 청하고자 초대한 것이 아니니 걱정은 내려놓아도 됩니다.”

어차피 해결은 타국이 아닌 그들의 몫이었다. 로비엔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피카르디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도 없었다.

“그대들을 초대한 것은 알다시피, 협약을 맺기 위함이니까.”

로비엔이 웃으며 실제로 그들이 만난 이유를 다시 한번 밝혔다. 물론 만나서 할 수 있는 얘기는 그보다 많았지만, 그들이 나눌 대화의 본질적인 주제는 평화 협약이었다.

물론 스쿠안과 칼라브리아는 국경을 접하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에 대비하여 쓸데없는 병력의 낭비를 막을 필요는 존재했다.

협정을 맺은 국가끼리는 위기 상황에도 무력으로 국경을 넘지 않으리라는 약속 내지는, 스쿠안이나 칼라브리아 중 하나가 습격을 받았을 때도 습격한 나라의 편을 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먼저 그러한 협정을 제안해 주셨음에 무척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피카르디가 온화하게 웃었다. 그는 본래 완벽한 정치인이었지만, 동등한 위치에서 맺는 평화 협약에서까지 정치를 논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재밌기는 했다. 칼라브리아에 아직 총리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지만, 아마 총리가 있었더라도 이 자리에는 참석할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이.

변화가 온건한 탓일까. 칼라브리아의 의회는 제 밥그릇을 위한 이권 다툼만 하고 있어 신뢰를 받지 못하고, 여전히 총리조차 선출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왕은 여전한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기존의 관습과 권위가 꺾이고 버려지는 전환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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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이 작게 하품을 했다. 대화를 마친 피카르디는 칼라브리아의 수도를 구경하고 싶다며 잠시 궁을 떠난 지 오래였다.

“비께선 여전히 잠이 덜 깨셨나 봅니다.”

로비엔이 놀리듯 내뱉은 말에 로잘린이 입을 비죽였다.

“어쩔 수 없어요. 어젯밤엔 폐하께서 자꾸…….”

로잘린이 로비엔을 흘겨보며 말을 흐렸다. 오늘 아침, 그처럼 온몸이 얼룩덜룩하고 유독 혼몽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으므로. 그러나 원인 제공자는 무척이나 뻔뻔한 태도였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종잇장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로비엔은 그게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는 듯 대꾸했다.

“저야말로 어쩔 수 없어요. 이전처럼 돈만 벌면 된다고 나설 수가 없는걸요.”

아무래도 왕실의 일원이 운영하는 사업이라, 이전처럼 공격적으로 수익만 추구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 이유로 로잘린은 더욱 바빠졌다.

왕실이 사익만 추구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각종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구빈원의 설립, 왕립 병원의 민간 개방 등은 모두 그 일환이었다.

“사실 도시 개발 문제도 그래요. 스쿠안처럼 도시 구획을 완전히 새로 하려면…….”

“로잘린. 여기는 침실이고, 나는 그대가 좀 쉬었으면 좋겠어요.”

로비엔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절대로 로잘린이 거절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결국 로잘린이 순순히 항복하고, 침대 위에 누워 두 팔을 벌린 로비엔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무리하고 있지 않아요.”

“…….”

“정말로요.”

로잘린이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변명했다. 로비엔이 하도 감싸고 돌아서, 이전처럼 체력을 깎아 가면서 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너무 심심해요. 그런 삶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아시잖아요.”

“비께서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괜찮아요. 하지만 나를 돕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로비엔의 말에 로잘린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어서였다.

그저 상단의 관리 역할만 맡으면 될 것을, 그 이상의 일에 손을 대고 있는 건 로비엔을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어느 날 위기를 맞닥뜨린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싫어요. 폐하께서 저를 위해서 다 했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할 거예요.”

“로잘린.”

“폐를 끼치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요.”

로잘린의 말에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를 끼치는 게 다 무얼까. 로잘린이 하는 일들은, 상단 일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왕실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의회가 일 년이 지나가도록 지지를 받지 못하고, 왕과 왕비를 향한 지지가 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신 도시 개발 사업은 분명히 넘길게요.”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나?

해당 사업에는 로잘린이 손을 대려고 한다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로비엔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로비엔의 품에서 고개를 든 로잘린이 배시시 웃었다.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으니, 괜히 웃는 얼굴로 그를 달래 보려는 거였다.

“꼭 외부에 넘길 겁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또 지고 말았다. 눈웃음을 치며 안겨 드는 로잘린의 얼굴에는 여전히 면역이 생기지 않았다. 로비엔이 힘을 주어 로잘린을 끌어안고 드러누웠다.

하나뿐인 가족. 그 이름은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한 만큼, 다른 어떤 것보다 그 무게가 무거웠다. 그러니 그 걱정이 유난이다 싶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그 한 가지는 약속해요.”

“한 가지만?”

로비엔의 물음에 마주 보고 누운 로잘린이 말없이 씩 웃었다.

“로잘린.”

로비엔이 대답을 채근하듯 부르자, 결국 로잘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피카르디 총리를 만나면서 생각한 건데요, 폐하.”

“말해요.”

“왕실 소식지를 발간하는 건 어떨까요?”

뜻밖의 제안에 로비엔이 한쪽 눈썹을 기울였다.

“거짓 기사들에 해명할 수도 있고, 폐하께서 이룬 성과에 대해서 알릴 수도 있으니까요.”

갑작스럽게 생각난 소재이기는 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기사는 제가 쓸 일이 없으니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대로 무리할 일도 없고, 왕실의 지지율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누가 왕실에서 발간하는 신문을 사서 읽겠어요?”

“자선 사업인 셈 치죠.”

로잘린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사실상 왕실의 지지율 관리에 도움이 된다면 자선 사업도 아니죠. 마땅한 투자예요.”

로비엔은 제 아내의 반짝이는 눈을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이처럼 의견이 명확하다면 그가 안 된다고 얘기해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말릴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그렇게 당당하게 웃고 있는 거죠?”

로비엔의 물음에 로잘린이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리며 그의 품에 얼굴을 숨겼다.

신하라면 모를까, 아내를 혼낼 수는 없는 남편이 못 이긴 듯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가 내 버릇을 나쁘게 들이고 있다는 걸 알아요?”

“제가요?”

로잘린이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비엔은 예의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과거의 선왕비처럼 이것저것 사 달라거나 무언가를 해 달라고 로잘린에게 요청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자꾸 당신의 도움에 기대게 되잖아요. 건네오는 손길에 자꾸 의지하게 돼.”

“…….”

“언젠가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담담하게 속삭이는 진심이었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대고 젖은 한숨을 흘렸다. 그가 그런 일을 걱정하지 않았으면 했다.

“나도 그런걸요.”

“…….”

“우리는 기대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괜찮아요.”

로잘린은 그것이 여전히 홀로 서는 것이 익숙한,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이 익숙한 그들에게 주어진 다음 과제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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