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
얼굴 앞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에 로잘린이 눈을 떴다.
침대 근처를 두른 연약하고 얇은 소재의 커튼이 열어 둔 창문 너머로 불어와 근처에서 살랑거리고 있었다. 코끝에는 약간 건조하지만, 꽃향기가 섞인 바람의 냄새가 났다. 바람도, 햇살도, 늘어지는 몸도 완연한 봄을 맞이했다.
“로잘린.”
푹신한 베개에 재차 머리를 묻으며 다시 잠을 청하려던 로잘린을 깨운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무런 뜻도 없이 이름만 불렀지만, 그 속에 담긴 다정함과 온기만은 숨겨지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
“폐하.”
로잘린이 잠투정하는 아이처럼 로비엔을 돌아보았다. 창문을 열어 놓은 범인이 그였던 모양인지, 로비엔이 창가에서부터 걸어왔다. 그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침대의 가장자리가 아래로 조금 가라앉았다.
“더 자면 준비할 때 서둘러야 할 텐데.”
아래로 몸을 기울인 로비엔이 로잘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이제 막 자다 깨서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게 무어 그리 예쁘다고, 그의 눈동자에 가득한 애정에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로잘린이 제 얼굴을 베개에 묻어 숨기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작게 웃는 소리가 붉어진 귓가로 새어 들었다.
“갑자기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진 걸까.”
“부끄럽지 않아요.”
“그래요. 비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로비엔은 순순히 로잘린의 반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잘린의 드러난 귓바퀴를 더듬는 그의 손길은 몸이 보이는 정직한 반응과 말의 괴리를 지적하고 있었다.
결국, 로잘린이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로비엔은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잠옷을 정돈하여 올려 주었다. 매끄러운 피부 위로 점점이 새겨진 반점은 햇빛 아래서 보기에는 지나치게 선정적인 감이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신혼이기는 했으나, 낮에도 침대 위에서 하염없이 머무르기에는 체면을 아는 부부였다.
“어차피 며칠이면 되니까. 조금만 견뎌요.”
로잘린은 더는 평민 때처럼 상단 일에 목을 매느라 밤늦게 잠이 들거나, 아침에 잠이 드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오며 밴 습관은 어디 가지 않았다. 일이 없어도 밤늦게 잠드는 날이 많았고, 어김없이 아침에 눈 뜨는 일을 힘겨워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하던 로잘린이 고개를 들었다. 완연하게 잠에서 깬, 연약한 이파리를 닮은 녹빛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제 잠 깼어요. 준비할게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 세상에 유일한 빛깔은 여전히 선명했다.
법원을 점령한 평민들이 법원의 등기권 포기 각서에 서명을 받아 내고 1년 뒤. 세상의 논리는 바뀌었다.
왕실은 명목적으로나마 갖던 절대권을 잃었고, 법원은 평민들의 성장을 법적으로 구속할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귀족 작위는 수여 및 세습이 불가능해졌으며, 인두세도 신분에 따른 차등 없이 모두에게 부과되었다.
그러나 변화로 가는 길은 끊임없는 진통을 겪었다. 왕인 로비엔이 법원과 의회에 협력하고, 등기권을 빼앗긴 법원이 재판에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는 때에도 의회는 시끄러웠다. 로비엔이 문제없이 칼라브리아를 받치고 있기에, 왕정을 지지하는 세력과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의 싸움이 팽팽했다.
“의회에서 의견을 표명할 농민들이 적다 보니, 아무래도 그들의 의견을 대변하기가 어렵군요.”
로비엔이 세 번째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게다가 경제적인 가치가 쉽게 포기되지 않는 모양인지, 지주 세력들은 법원에서 등기권을 빼앗자마자 말을 바꾸었다. 인신 예속적인 봉건적인 요소들은 당장 폐지하되, 비봉건적인 요소들은 경제적인 해결이 이루어진 이후에 폐지할 수 있다고 나선 것이다.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사실상 봉건적 요소와 비봉건적 요소를 명백히 선을 갈라 나누는 일은 불가능했다. 모든 일은 그처럼 지지부진하게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욕심을 부리다간 법원처럼 혼쭐이 날 텐데.”
로잘린이 혀를 찼다. 고작 이런 진통이나 겪자고 그가 의회를 키우려던 것이 아니기에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순히 따라오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기에 그 사실이 딱히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변화를 만들어 가는 자가 이처럼 건재하지 않은가.
“누구한테 혼쭐이 나요?”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주제에 로비엔이 능청스럽게 물었다.
로잘린이 가느다란 손끝으로 로비엔을 가리켰다.
“폐하께서 혼내 주시겠죠. 법원을 날붙이와 총으로 후려친 것처럼.”
끝내 로비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비께선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시는군요.”
“누가 없으니 한 소리랍니다.”
로잘린이 잔에 든 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신문사들이 활발하니, 앉아서도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좋기는 하네요.”
로잘린의 시선이 로비엔이 테이블 가장자리에 접어 올려 둔 세 부의 신문 쪽으로 향했다. 낫이나 곡괭이와 같은 날붙이, 그리고 로비엔이 흘린 무기고의 무기들로 법원이 등기권 포기 각서에 서명하게 만든 날 이후로, 신문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짓 기사만 없다면 더 좋을 테지만.”
왕실에서도 제재하지 않으니 가짜 기사며, 각자의 진영을 옹호하는 기사들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대량 인쇄가 가능하며, 신뢰를 받는 신문사는 두어 개에 불과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 차차 정리되리라 믿었다.
“오늘도 이상한 기사가 있지 않던가요?”
로잘린의 물음에 로비엔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비의 시녀와 눈이 맞았다던데.”
로비엔의 대답에 로잘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잘린의 시녀는 여전히 라나 하나였다.
“라나와 언제 그런 사이가 되셨어요?”
“세상에.”
로비엔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웃음을 터뜨렸다. 꽃망울이 터지듯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로잘린도 그를 따라 입을 비죽거리며 미소를 걸었다. 그러나 눈만은 새침하게 로비엔을 흘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테이블 위로 다 마신 잔을 내려놓으면서도, 로잘린의 시선은 줄곧 제 맞은편에 앉은 로비엔에게 향해 있었다.
따뜻한 햇볕과 그 아래 해사하게 웃고 있는 미인. 세상을 다 가진 왕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누가 메르센데티 자작가에 줄을 설지 궁금하다는 게 주제였겠네요.”
“맞아요.”
로비엔에게도, 라나에게로 얼토당토않은 거짓 기사였다.
왕의 정부에게 당치도 않은 비난과 욕설을 퍼붓던 사람들이, 정작 왕이 정부를 두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얍삽하게도 마련해 두었더군요.”
“어떻게요?”
“익명의 궁인이 밝혀 왔지만, 믿거나 말거나.”
로비엔이 기사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옹졸한 작태였다. 어쨌거나 칼라브리아는 여전히 왕정제를 유지하고 있고, 갑자기 로비엔이 왕을 모욕했다며 잡아들이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상황이련만. 몇몇은 당장 손에 잡힐 듯 어른거리는 자유의 그림자에 눈이 멀어 있었다.
“왕실과 관련해서 헛소문을 퍼뜨리는 신문사에 반박할 수 있는 매체가 있으면 좋을 텐데.”
로잘린은 그런 망동으로 그녀의 사내를 할퀴는 자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 정도쯤은 어차피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저 소문이고, 가십에 불과할 뿐이니까.”
“나중에라도 폐하께 해가 될까 걱정스러워요.”
로잘린이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인생에는 여러 사건과 생각지도 못한 악역들이 존재했었고, 그 모든 것을 이겨 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 이전에 대비하고 싶어 기민하게 날을 세우는 것이 잘못은 아니었다.
“비께서 좋아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여전히 사내가 정부를 둔다고 하는 일은 사회에서 큰 문제는 아니니까요.”
로비엔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정부라는 단어를 가볍게 꺼내기에는 여러모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론 내가 정부를 두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러시겠죠. 그러면 지금 당장 궁을 박차고 나가서 혁명의 붉은 깃발을 흔들 거니까.”
로잘린이 앙칼지게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매는 곧 다시 유순해졌다. 모두 가정에 불과한 얘기였으니까.
“농담이에요. 하지만 최소한 폐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유명무실한 그들의 첫 계약을 생각하면, 한 가지의 대안이 있기는 했다.
“무서운 소리네요.”
로비엔이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게, 왕을 지지하는 힘을 잃어 무섭다는 이야기가 아님은 로잘린도 잘 알고 있었다.
“왕비님. 이제 준비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입장을 허가받은 후 들어온 라나가 로잘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 잠시 준비하고 올게요.”
“그래요.”
소파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던 로잘린이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로비엔이 의아한 얼굴로 제게 가까워지는 로잘린을 응시했다.
로잘린은 로비엔에게 가까이 다가와 몸을 기울이고,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사실 그 전에 펑펑 울 것 같긴 해요.”
짧게 속삭인 로잘린이 언제 그런 달콤한 소리를 했냐는 듯 팽 돌아섰다. 로비엔의 시선이 요망한 아내의 뒷모습에 따라붙었다.
“폐하.”
밀리언이 이처럼 곁을 지키고 있으니, 당장 저 등을 끌어안고 키득거릴 수 없다는 허탈함과 패배감에 젖어 있는 시선이었다.
“준비는 마쳤나?”
“예.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로비엔은 로잘린이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리며 밀리언과 대화를 나누었다.
밀리언은 이후 일정의 준비 사항에 대해 로비엔에게 상세히 안내해 주었다. 로비엔은 모두 가만히 듣고 적당히 반응했다. 다만, 한 가지의 예외는 있었다.
“다음부터는 가급적 오전 일정은 피해. 오전 중에는 비께서 힘들어하시니까.”
밀리언의 표정에 얼마쯤 유난이라는 기색이 비쳤다. 그러나 곧 표정을 수습한 그는 순순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의 주군은 제 비에게 있어서만큼은 상황과 시기를 가리지 않고 유난이었다. 밀리언도 제 아내에게는 헌신적인 사내였으나, 로비엔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폐하, 왕비께서 준비를 마치셨다고 합니다.”
들려오는 소식에 로비엔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리 없이 열린 문 너머로 로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국의 총리와 공식적인 자리를 갖는 것 때문인지, 평소와는 달리 꾸민 차림이 제법 화려했다.
“잘 어울리네요.”
로잘린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며 로비엔이 칭찬했다.
아닌 게 아니라, 분홍색과 빨간색 사이의 화사한 색상으로 만들어진 드레스, 틀어 올린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진주 귀걸이, 가느다란 목을 장식한 세 줄짜리의 목걸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로잘린과 맞춘 듯 잘 어울렸다.
물론, 그의 여자는 단 한 번도 아름답지 않았던 적이 없지만.
“폐하께서도,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로잘린의 칭찬에 로비엔이 작게 웃었다. 그에게 함부로 아름답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로잘린뿐이었다. 감히 누가 미인이다, 혹은 아름답다 따위의 수식어로 왕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로잘린의 칭찬 역시 나쁘게 생각하려면 한없이 나쁘게 생각할 수 있었지만, 로비엔은 이것이 로잘린의 애정임을 알았다.
로잘린은 모든 예쁜 것을 아끼고 사랑한다. 로비엔은 자신이 그 범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