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변화의 바람은 느리게, 하지만 분명하게 불어왔다.
경제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의 생각보다 더 견고했다.
처음 부르주아들은 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는 했으나 농민들의 힘을 빌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기 하나 없이 벌이는 시위는 무력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왕궁과 붙은 법원을 보호하는 병사들을 이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손에 쥐었다가 뺏긴 것과 다름없어 더욱 약이 올랐다. 감히 의제를 교환하자 해 놓고 법원과 결탁해 그들의 사다리를 밀어 버리다니,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러나 그들을 농락한 귀족들은 사과는커녕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법원에서 거절한 걸 어쩌겠느냐고 하더니, 법원과 결탁했다는 증거를 보여 주자 신분은 사회의 유구한 가치라 주장했다.
경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선이 기어코 그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들이 속한 기관이 입법의 권리를 갖게 되었더라도, 귀족들은 법원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뭉개 버리리라. 어쩌면 영원히.
‘그들은 언제까지고 귀족의 권리만 옹호할 거요! 우린 들러리가 될 뿐이고!’
지주로서 권리 사수에 더 열정적이었던 부르주아 세력의 눈에 불꽃이 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법원에서 법을 등기하는 권리를 빼앗고, 그 잘난 사회적 가치를 부수어 버리자. 우리가 올라갈 수 없다면, 같은 곳으로 끌어내려서라도.
때마침, 영주세를 폐지하려던 왕의 의지를 의회가 꺾어 버렸다는 소식이 퍼져 나가며 농민들의 소요가 커지고 있었다. 부르주아 세력은 농민들의 귀족들에 대한 반감과 움직임에 주목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은 일은 하나였다.
그리고 바로 오늘…….
“폐하.”
스쿠안의 헌법이 적힌 책을 내려다보던 로비엔이 고개를 들었다. 로잘린이 그를 향해 매끄럽게 웃고 있었다.
로비엔은 홀린 듯이 그 미소를 따라 웃었다. 봄의 기색이 완연한 탓인지 로잘린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산책하러 갈까요?”
로잘린이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했다.
로비엔은 익숙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정원을 향해 나섰다. 보드라운 햇빛이 늘어져 드러난 피부를 간질였다. 지독하도록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뭘 보고 계셨어요?”
“스쿠안의 헌법. 나중에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요.”
둥그렇게 난 길을 따라 돌며 로비엔이 대답했다.
법원이 위협에 휩쓸려 등기권을 포기하게 된다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여태 귀족들의 칼로서 왕의 활동을 제한해 온 법원의 역할은, 말 그대로 소송과 관련된 재판을 판결하는 역할에만 머무르게 될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로비엔은 입법 활동의 주 역할을 맡게 될 의회에 헌법을 제정하도록 부추길 예정이었다. 모든 권력의 활동 영역을 법으로 제한하고,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여 썩지 않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한 선언은 왕의 권한 역시 규제하겠다는 말과 같으므로, 법원은 로비엔이 막아 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비엔은 철저히 모르는 척할 예정이었다.
귀족들은 왕이 그러기 위해 모든 판을 짜고, 민란까지도 주도한 것임을 그때가 되어서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왕의 손과 발을 자르기 위해 했다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는 일이었음도.
“신기한 일이에요.”
“무엇이?”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로비엔이 자리에 멈춰서 로잘린의 귀걸이에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주며 물었다.
“어떻게 권력을 내려놓으려는데 더 단단해 보일 수가 있어요?”
“현명한 비를 만나 시류에 편승하는 법을 배웠을 뿐인데.”
로비엔이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로잘린은 그것이 그의 힘이고 능력임을 알았다. 고통과 슬픔이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로비엔이 진짜 정통한 왕의 후계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은, 한때 그의 약점이며 고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그 약점이 그가 시대의 변화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안배한 무엇 같았다.
그가 남달리 앞서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왕정제가 저물어 가는 시대에도 왕의 권위를 조각내는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작게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크게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결정했다. 그 결정이 그를 세상의 변화를 유하게 받아들이는,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을 가진 왕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폐하는 정말 저랑 반대인데. 폐하께선 욕심도 별로 많지 않으시고, 늘 여유롭고…….”
누군가는 급진적이라거나 개혁적이라 말하는 왕 밑에서 칼라브리아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혼란 없이 분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변화는 추구하되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사회에 혼동을 초래하지는 않아야 한다던, 그가 추구한 방식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답답하게 느껴지진 않아요. 이상하게도.”
“비께서 내 방식을 존중해 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느린 게 아니라 여유롭다고 받아들이는 것인지, 아니면 우아한 동작으로 걸어오는 사내의 미모를 보다 보면 그마저도 좋아지고 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사업 이익으로 구빈원을 설립하고, 왕립 병원을 지원해 주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로비엔의 콕 집은 공치사에 로잘린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익이 많이 났거든요. 도시 개발 건도 그렇고.”
그러고는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해진 볼을 하고선 제가 벌어들인 수익이 얼마인지를 조잘거렸다. 사업 이익에 관해 이야기하는 속물적인 모습은 모두가 기대하는 우아한 왕족 혹은 왕비로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만큼 왕관과 미들 네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변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해지는 궁 안에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인 사람. 그게 바로 로잘린이었다.
“욕인가요?”
로잘린이 좋은 분위기를 부수었다는 듯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그래서 좋아해요.”
뜻밖의 고백에 로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수줍은 어린애처럼 배시시 웃었다.
“모두 잠시 물러나 있어.”
로잘린이 기분 좋게 웃는 얼굴로 사용인들을 멀리 떨어뜨렸다.
“1주년 선물로 보내 주신 커피 감사해요. 덕분에 당신이 로잘린 보가트의 욕망과 자유분방함까지 사랑해 주시는 거, 잘 알게 되었어요.”
“…….”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나,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보다 더.”
사용인들이 모두 멀어지자, 로비엔 곁으로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선 로잘린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저 반짝이는 눈을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영악한 아내. 그 영악함마저 사랑스러운 그의 여자.
‘……저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는 보가트 공작 가문의 일원으로서 앨런 3세 폐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왕세자비로서 왕세자 전하를 보좌할 것을 신께 맹세하는 바입니다.’
어쩐지 낯선 이름들을 곱씹던 로비엔은 문득 혼인 서약서를 나누던 날을 떠올렸다. 부부가 아닌 신하의 맹세를 하던, 아름답지만 뾰족하게 날이 섰던 여자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로잘린 보가트입니까,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입니까?”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 당신의 비인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이기도 하고요.”
로잘린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다르다고 해도, 그게 중요한가요?”
“나는 신하를 비로 두고 싶진 않아서요.”
로비엔의 대답에 로잘린이 상상치도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꽃망울이 터지듯 자연스럽고 생기 있는 웃음소리에 주책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왕 앞에서는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가 될 것이고, 남편 앞에서는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가 되겠지요.”
“로잘린.”
로비엔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름을 불렀으나, 로잘린은 그를 놀리듯 빙글거리며 돌아섰다. 산책로를 따라 앞서 걸어가는 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그가 따라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서명한 이름과 결혼 후에 새로이 얻은 이름을 어쩌겠어요?”
로비엔은 홀린 사람처럼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 일인지 풀어 내린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너울거리고, 흔들리는 매끄러운 붉은 드레스는 흩날리는 꽃잎 같았다.
사실 당신은 언제고 왕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구나.
새삼스러운 감탄이 일었다. 그의 여자는 여전히 왕관과 미들 네임에 갇히기에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욕망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폐하?”
따라오지 않는 그가 이상해, 경쾌한 걸음으로 앞서 걷던 로잘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반응이 없다는 게 머쓱한 듯, 빛을 받아 흰빛으로 반짝이는 귀걸이의 모양을 손으로 덧그리면서.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세찬 봄바람이 불어왔다. 솨아아, 바람 소리에 하릴없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지워졌다.
“이미 서명한 서약서의 이름은 지울 수 없어요. 나도 그건 알아.”
이상하도록 선명한 그의 목소리만 제외하면 그랬다.
“그런데 나는 진짜 당신을 원해.”
“…….”
“그러니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라는 신하가 아니라, 로잘린 보가트.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를 내게 줘요. 그러면 나는 늘 당신이 로잘린 보가트로 살아가도록 무엇이든 할 테니.”
로잘린이 에메랄드빛 눈을 깜빡였다. 물 아래 잠긴 녹빛 보석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로비엔은 짧은 순간 그 눈동자에 다양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언젠가 로비엔의 위선이 자신을 상처 입히던 날. 그리하여 여자가 아닌 신하로서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던 순간. 그의 품에 처음으로 안긴 밤.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날 눈부셨던 홀과 샹들리에. 아이를 잃던 날의 끔찍한 고통. 그의 처절한 사랑을 알게 되었던 밤의 달빛. 모든 진실을 알고 무너진 그를 끌어안았을 때 느껴졌던 미지근한 체온과 미진한 박동. 그가 위협을 스치고 제게로 달려왔던 역모의 밤. 왕으로서의 권위를 내려놓겠다 선언하던 순간 그저 지지하고 싶었던 마음.
고통스러웠던 모든 날에 그가 곁에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을 괴롭히던 순간조차, 그 사실이 자신을 버티게 했다는 것도.
“그럴게요.”
로잘린이 희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손으로 더듬어 닦으며 대답했다. 그저 웃으려고 했는데 어쩐지 울음이 났다.
사실 언제나 로잘린 보가트로 사랑받고 싶었다. 그 자체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로 로비엔은 로잘린이 원하는 바를 들어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럴게요…….”
로잘린은 자신을 끌어안는 로비엔의 품에 엉겨 붙으며 몇 번이고 대답했다.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뜨끈한 이마에 자잘하게 와 닿는 그의 입술이 좋아서 울면서도 웃었다.
“요새 눈물이 너무 많아진 것 같아요.”
한참 뒤에야 로잘린이 진정된 얼굴로 자책했다.
로비엔은 어느 순간부터 그의 비가 눈물을 비치는 날이 많아졌다는 걸 알았다. 울고 싶을 땐 그래도 된다는 걸, 그의 앞에서 늘 강해 보일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로비엔은 말없이 로잘린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틈새 없이 맞잡았다. 그가 산책을 이어 가려는 듯 천천히 걸음을 뗐다.
“아무도 못 봤으니까 괜찮아요.”
능청스럽게 말하는 로비엔을 로잘린이 붉어진 눈가로 흘겨보았다.
“폐하 때문이에요.”
“그래요. 내 잘못이에요.”
잠시 머쓱한 얼굴이던 로잘린은 어느새 그의 팔에 몸을 바짝 붙이고,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몇 가지 이야기했다.
별것 아닌 말에도 로비엔은 그녀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붉어진 눈과 코, 민망함에 튀어나온 입까지도 귀엽다는 듯이.
그렇게 걷다 보니 산책로의 끝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즐거운 시간은 끝이 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달갑지 않은 순간의 깨달음이 있었으나, 로잘린은 곧 아쉬움을 깨끗하게 지웠다. 어차피 산책길의 끝은 그들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고,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 이제 연애 결혼인가요?”
로비엔이 말을 잃은 얼굴로 로잘린을 보았다.
“연애 결혼?”
“연애는 할 만큼 했고, 청혼은 방금 새로 하셨으니 연애 결혼 아닌가요?”
로잘린이 짓궂은 아이처럼 웃으며 농담했다.
로비엔이 못 이기겠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훈풍이 불고, 나무 아래로 드리워진 그늘 사이사이로 비치는 빛이 모래알처럼 반짝였다.
날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더욱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해요.”
커다란 손이 두 볼을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기울어진 로비엔의 얼굴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입술이 닿았다. 여전히 웃고 있어 당겨 올라간 입술이 그대로 느껴졌다. 포슬거리는 부드럽고 간지러운 숨결도.
로잘린이 로비엔의 목에 팔을 넝쿨처럼 감은 채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서로를 끌어당겨 안고 입술을 부딪치는 일에 골몰하는, 이제 막 탄생한 열렬한 연인처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