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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27)화 (127/151)

# 127.

별이 뜬 밤. 구름 하나 없이 유난히 깨끗한 하늘 아래로 많은 부분이 자늑자늑한 어둠에 가라앉고 있었다.

로비엔은 기척 없이 자박자박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으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궁 안에서 그럴 수 있는 존재야말로 한정적이었기에.

굽이 있는 신발을 즐겨 신지 않고, 향수 냄새가 아닌 향긋한 비누 향이 나는 사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뒤에서 끌어안아 올 수 있는 사람.

“놀라지도 않으시네요?”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로잘린이 보였다.

로비엔은 제 가슴팍에서 교차된 로잘린의 팔을 풀고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리 소리 없이 다가오는 자가 비 말고 또 있겠습니까?”

“갑자기 끌어안아도 가만히 계시더라는 소문이라도 나면, 이름 모를 계집이 폐하의 품에 안기고 싶어 달려들지도 모르지요.”

로잘린이 새침한 얼굴로 로비엔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떠보려고 일부러 꾸며낸 얼굴이었다.

“그런 소문은 비께서 내지 않는 이상 나지 않을 텐데.”

“…….”

“내가 질리면 그런 소문을 내서 다른 여자에게 넘기기라도 하시려고?”

능청스럽게 되묻는 로비엔의 물음에 로잘린이 헛웃음을 지었다. 로비엔을 당황하게 만들어 보려다가, 괜히 저만 한 방 먹은 꼴이 되어서였다.

“글쎄요. 저는 이 얼굴만큼은 다른 여자에게 넘길 생각이 없는데.”

“…….”

“저는 수집욕이 강해서,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것들은 제 손에 있어야 하거든요. 레이첼 후작저에 있던 그 조각상도 언젠간 꼭 사들이고 말 거예요.”

로비엔이 빙긋 웃는 얼굴로 로잘린의 이마에 드리운 잔머리를 손으로 걷어 주었다. 그 다정한 접촉이 좋아, 조금 전까지 새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로잘린이 허물어진 얼굴로 작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요?”

로비엔이 물었다. 로잘린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로비엔의 이마에 닿았다. 그는 굴곡 있는 이마부터 보기 좋게 솟은 높은 코를 스치는 부드러운 손끝의 감촉을 즐기며 눈을 감았다 떴다.

“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데?”

“미인이죠. 미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걸요.”

하물며 여자였어도 홀릴 것 같은 얼굴임에랴.

로잘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직전까지 그가 시선을 두고 있던 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의회가 새롭게 사용하는 건물이 있는 방향이었다.

“소란스럽네요.”

어두워진 하늘 아래, 소요가 일었다. 그들은 의회에서 정당한 과정을 통해 다수결로 채택한 ‘신분에 제한 없는 대리인 선정’이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의 권한은 왕도 인정한 것인데!

하지만 그들이 더 화가 나는 지점은, 의회라는 기관에 편입되어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쁨이 박살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그럴 권리와 권한이 있는 것처럼 달짝지근한 소리를 해 대더니, 결국 너와 나는 다르다 선을 긋고 밀어내는 귀족 세력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이 어떨까?

“아마 한동안은 계속 그럴 겁니다.”

로비엔이 등 뒤에서 로잘린을 자신의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로잘린은 거부감 없이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며, 단단하게 저를 끌어안은 로비엔의 팔을 손으로 잡았다. 따뜻한 체온과 안정감, 그리고 규칙적인 심장 박동은 곧 벌어질 일과는 무척이나 상반되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부르주아들은 또 다른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해당 안건에 합의하여 법원으로 보낸 귀족 역시 법원장인 파렌 로어와 은밀한 협상을 통해 안건 폐기에 동조했음을.

여전히 그들의 힘만으로는 지독하도록 유구한 가치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없음을.

“저들이 궁 밖에 나서는 순간 소문을 퍼뜨릴 거예요.”

“무슨 소문을?”

“왕명으로 영주세를 폐지하라 했으나 의회에 의해 꺾였다고요.”

나라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왕실이 뜻밖에도 세금 중 하나의 폐지를 운운하는 동안, 지주들은 제 밥그릇을 챙기겠다고 왕의 제안을 엎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온갖 세금을 챙겨야 했던 평민들로서는 솔깃한 제안이 엎어졌다는 사실에 분노할 수밖에 없으리라.

로잘린이 소란스러운 서쪽에 여전히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이미 귀족과 부르주아 세력 간의 합의는 깨졌고, 마지막이 평민과 귀족의 싸움이 되려면 농민 역시 판에 가담해야 할 테니까요.”

“역시 비께선 모르시는 게 없네요.”

로비엔이 작게 웃자, 로잘린의 귓가에 한숨과 뒤섞인 웃음소리가 스쳤다.

“싸움이 커지려면 더 많은 머릿수가 필요하니 도움이 되겠군요.”

한 나라의 군주가 그의 영역에서 싸움의 규모를 키우겠다는 말을 하면서도 담담하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로비엔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일이 잘못되면 어쩌려고 이렇게 태평하세요?”

“비께서 도와주시는데 잘못될 리가.”

로잘린 역시 그에게 큰 위기가 미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갑작스러운 불똥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이지 않은가.

“경제적으로는 귀족들과 다를 바 없는 부르주아들이 과연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할까요?”

게다가 경제적인 요소가 걱정으로 남았다. 그러나 로비엔은 태평한 얼굴이었다.

“제가 가진 것을 내려놓는 일이니 시일은 좀 걸릴지도 모르죠. 하지만 똑똑한 자들이니, 세상을 바꾸는 일은 자기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영원토록 모르진 않을 겁니다.”

변화는 적당한 규모의 머릿수와 어느 정도의 폭력이 필요하다.

목전에 두고 있었던 권리를 잃은 부르주아들은 농민들을 선동하여 법원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처음 자신들이 동조했다는 사실은 빼놓고, 농민들의 분노와 변화에 대한 염원을 동력 삼아.

“날이 좋은 날, 무기를 몇 개 흘려 둘까 해요.”

“무기는 왜…….”

“…….”

“설마 법원을 물리적으로 위협하려고요?”

로잘린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비엔이 짧게 웃으며 보드라운 볼에 입을 맞추었다.

“목숨이 경각에 있지 않은 한 법원장이 등기권 포기 각서에 서명할 것 같지가 않아서.”

“……정말 어떤 아쉬움도 남지 않으세요?”

그렇게 되면 정말로 세상은 재판을 담당하는 법원과 입법을 담당하는 의회, 그리고 언젠가는 대체될 행정을 담당하는 왕실로 나뉘게 될 것이다. 로잘린은 여전히 그가 진실로 그것을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만일 그에게 어떠한 서운함이나 아쉬움이라도 비친다면 여기서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다. 많은 피를 보더라도 그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평민 로잘린 보가트가 아니었고, 왕의 비였다. 그녀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니 이전에 믿던 가치가 얼마쯤 부서지더라도…….

“그때쯤 귀족들이 내 진짜 의지를 알게 되었다 해도 큰 의미는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비겁하게 말을 바꾸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들려온 단호한 목소리가 생각을 끊었다.

“비록 이것이 절실히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된 염원이 아닐지라도.”

“…….”

“지금은 이게 맞는 일이라는 걸 알아요.”

그의 진심이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부드럽지만 강한 사람. 시시때때로 그가 쓴 왕관을 바라보며 잊곤 하지만, 로비엔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 아비의 피를 타고난 자가 왕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도록 만들어 선왕비의 복수를 완성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당신을 만나서 알게 된 것도 있어요.”

로비엔이 로잘린의 가슴팍 위로 둘러서 끌어안았던 두 팔을 거두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내내 기대어 있던 몸이 멀어졌을 뿐인데 이상하게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알게 되었는데요?”

로잘린의 물음에 로비엔이 손을 들어 그들이 선 자리를 둥글게 그렸다.

“여기까지가 딱 내가 알던 세상이었어요.”

왕세자였던 시절. 로잘린을 만나기 전, 딱 그 시절까지의 경계선이었다.

“가끔 궁 밖으로 시찰을 나가긴 했지만, 별세계를 보는 기분이었어요. 그들은 내게 다스려야 할 무엇에 지나지 않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로잘린은 어느 날을 회상하듯 흐려진 그의 물빛 눈동자를 홀린 것처럼 응시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난 이후로 확실히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생명으로도 여기지 않았던 모든 인간에게도 각자의 욕망과 생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개인이 모두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 세상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보다 훨씬 더 넓다는 걸.”

“…….”

“자신의 힘으로 이루지 않은 것은 늘 위태롭다는 걸.”

그러니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타인 위에 군림해야 하는 그의 자리도, 다른 누구의 자리도 그랬다. 왕비가 되기 전 로잘린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로잘린은 그들이 딛고 있는 땅, 그리고 아주 먼 어딘가에 시선을 두었다.

“생각보다 더 빨리 왕이 아니게 되면 어쩌시려고요?”

그의 의지가 명확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이 진행되거나, 혹은 더 느린 속도로 진행되면? 그는 감당할 수 있을까?

로잘린이 시험하듯 질문했다. 왕비나 그의 아내보다는 시험관에 가까운 태도였다.

“글쎄. 뭐가 나랑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당황한 건 오히려 로잘린 쪽이었다.

“예술 쪽엔 사실 별로 조예가 없고. 그나마 할 줄 아는 건 정치와 경제뿐인데.”

로비엔은 진지하게 고찰하는 태도로 저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다.

“의회엔 자리가 없을지도 모르겠고. 조폐를 찍어 내는 은행을 사들여 운영하는 건 어때요?”

“돈은 어떻게 구하시려고요?”

“염치없지만 아마도…….”

로비엔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로잘린이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가 빌려 드린다던가요?”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인 로잘린이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먼저 등을 돌려 언덕을 내려갔다. 로비엔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로잘린.”

“네?”

로잘린이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어여쁜 남편이 환심을 사려고 노력한대도 안 도와줄 건가요?”

로잘린은 반반한 그의 낯짝을 바라보며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는 말을 곱씹었다. 문득 기억이 어느 날에 멈추었다.

‘돈이 필요하시거든 제 환심을 사려는 노력이라도 하세요. 저는 상인의 딸이라,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다고 배웠거든요. 또 모르죠, 남편이 어여쁘면 시가에 돈벼락이라도 떨어뜨릴지.’

그때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둔 것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로비엔을 바라보았으나, 그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유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믿기지 않게도 교태를 부리는 것이었다.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로비엔의 품에 안겨서도 멍한 눈을 깜빡이던 로잘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평소와 같은 양순한 얼굴인데 붉게 달아오른 양쪽 귀를 발견한 순간, 어찌할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문 모를 상황에, 멀찍이서 관찰하는 아랫것들은 이유 모를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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