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로단테 가문은 이미 칼라브리아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밀리언 로단테는 영혼이 되어서라도, 당연히 그 군중들 가장 앞에 설 사람이었다.
“밀리언 로단테는 앞으로도 계속 국왕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로단테 가문은 칼을 들었던 적이 없으나, 그가 하는 맹세는 기사가 하는 맹세와 다를 바 없었다.
로비엔은 굳건하게 맹세하는 밀리언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보내 준대도 가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군.”
권력을 내려놓는다고 말한 주제에 우습게도, 밀리언이 재차 그에게 올리는 충성의 맹세가 마음에 들었다. 로비엔의 웃음에는 그런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감정도 얼마쯤 섞여 있었다.
“로단테 백작. 명하노니, 직속령의 영주세 폐지가 결정되는 즉시 귀족들과 평민 사이 갈등을 조장해라. 그리고 복수의 발길이 법원으로 향하게 해. 목표는 법원의 등기 권한 폐지에 있다.”
“명 받들겠습니다.”
밀리언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로비엔의 명을 받들었다.
“나가 봐도 좋아.”
로비엔의 말에 밀리언이 소리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잡이를 막 붙잡은 밀리언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로비엔을 향해 돌아섰다.
“분부하신 대로 선왕비의 시신은 양지바른 곳에 수습했습니다.”
로비엔이 개인적으로 내린 명에 대한 보고를 위해서였다.
선왕비의 시신은 본래대로라면 들판에 버려져, 까마귀 밥이나 되어야 했다. 감히 선왕을 시해하고, 현왕을 죽이려 한 역적의 당연한 말로였다.
그러나 로비엔은 밀리언의 예상과는 다른 명령을 내렸다. 처형장에 가기 전에는 선왕비의 맨발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발을 신기라 했고, 처형장에 다녀온 이후에는 시신의 수습을 부탁했다.
피베체 가문도 완전히 몰락하여 선왕비의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이 없으니,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대신 왕실 전용 사원과는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 달라 했다. 밀리언은 그 명에 따랐다.
“클로티 부인의 시신 역시, 클로티 가문으로 인계하였습니다.”
클로티 부인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재판이 있기 전, 궁 밖으로 나섰다던 클로티 부인의 행방이 한동안 묘연했다. 로잘린 역시 클로티 부인의 행방을 궁금해한다기에, 밀리언은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내보냈다.
‘폐하. 클로티 부인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밀리언은 그 소식을 전달하면서 얼마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밀리언도 로비엔을 수행하는 긴 시간 동안 클로티 부인을 봐 왔지만, 그녀는 지나치게 로비엔에게 맹목적인 점이 있었다. 로잘린에게 해를 끼친 것 역시 그중 하나였다. 아마 로비엔이 그토록 분노하지 않았더라면, 클로티 부인은 진실로 로잘린의 목을 조를 때까지 악행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자살이었나?’
물론 돌아온 소식은 단순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제법 잔혹했다.
클로티 부인의 시신은 다리 밑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절대로 그녀가 알 리 없는, 제 발로 걸어 다닐 일도 없는 빈민가의 굴다리에 버려진 시신 중 하나로. 누가 보아도 자살이나 실족사는 아니었다.
‘칼에 여러 번 찔린 후 버려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시신 역시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사망한 지 시간이 좀 지나, 시신의 상태 역시 그리 멀쩡하지 못하다고 했다.
범인이야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혹시라도 재판에서 또 쓸데없는 말을 할 수도 있는 클로티 부인의 입을 막고자 할 사람은 하나뿐이었으니까.
‘클로티 가문으로 시신을 넘겨줘. 마땅한 상을 치를 수 있도록 지원해 주도록 하고.’
‘예, 폐하.’
밀리언으로서는 역적들의 뒷수습에까지 자신이 나서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로비엔은 굳이 마음을 썼다. 이해할 수 없었다. 국왕은 냉정해야 한다. 로비엔 역시 마땅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로비엔은 여전히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밀리언은 그런 자신의 왕을 사랑했다. 그러니 그의 명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고생했다.”
로비엔이 담담한 목소리로 밀리언에게 감사를 표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왕의 얼굴을 목도한 밀리언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곧, 로비엔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고 싶은 사람처럼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어릴 적, 언젠가는 소란한 적도 있었던 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서우리만치 적막했다. 로비엔은 큰 유리창 너머로 어둠에 잠긴 후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왕족으로서 체통을 지키라는 말에도 신이 나서 뛰어놀던 어린 세 형제와 그들을 잡으러 뛰어다니던 각자의 유모들. 그리고 멀리서 양산을 쓴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왕비의 모습이 환상처럼 보였다.
이제는 모두 잃어버리고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덧없는 상실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스칠 때쯤 나타난 얼굴이 모든 미련과 상념을 지웠다. 마치 그가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나타나 웃어 주는 얼굴.
“……로잘린.”
로잘린이 어서 내려오라는 듯 그를 향해 손짓했다.
혼자가 아니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일었다.
로비엔은 망설이지 않고 후원을 향한 커다란 통창을 등졌다. 그러고는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성급하게 손잡이를 당기는 힘에 문이 열리자마자 로비엔의 발이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타닥타닥. 내달리는 발걸음 소리에 뒤이어, 묵직하게 닫히는 문 너머로 고요한 침묵과 외로움에 가라앉은 방이 모습을 감추었다.
행정 제안 기구의 새로운 이름은 왕이 명령한 대로 의회로 결정되었다.
300명의 구성원은 기존의 구성원 100명에 법률가, 의사, 과학자 따위의 평민, 하위 귀족들과 고위급 인사들을 더하여 완성되었다.
다만, 한때 성공과 영광의 이름이었던 보가트 가문과 큰 상단인 래비어트 가문은 거기에서 제외되었다. 누구도 그 결과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구성원 중에 토지를 가진 자들을 포함하다 보니, 그 신분과 이해관계가 각기 달라 짧은 시간 내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마침내 쓸데없는 논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일단 직속령 영주세 폐지의 건부터 논의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가장 먼저 튀어나온 의견은, 가장 의견이 합치하는 직속령 영주세 폐지 의제를 다루자는 것이었다. 로단테 백작가의 차남 밀레스가 빙글거리며 제안한 일이기도 했다.
밀레스는 밀리언과 의견이 달라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왕에게 직접적으로 대항할 수 없으니 동생을 내보냈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얘기가 암암리에 떠돌았다.
의회의 구성원들은 왕의 측근인 로단테 백작가에서도 그들을 지지하고, 왕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있었다.
“직속령의 세금을 걷는 일은 국왕의 재산권 행사이기도 합니다. 한데 영주세를 걷는 것을 우리가 반대한다면, 명분이 부족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미래를 봐야지. 본인이야 다스리는 주체가 똑같아 영지세든 영주세든 왕실세든 하나만 받아도 상관이 없지만, 우리네에게도 같은 조건을 요구하고 든다면 누가 책임질 수 있나? 잠시 잠깐 세금을 받지 않는 것도 큰 손해인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다고 생각해 보게.”
물론 왕의 재산권 행사라며 반발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일부에 불과했다. 그들은 땅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었고, 원칙은 다수결이었으므로 무참히 무시당한 의견이기도 했다.
“입장을 정하였으니 법원으로부터 인가만 받으면 되겠군.”
이는 조세의 변경과 관련된바, 왕의 일방적인 요구로 이루어질 수 없는 명령이다!
알폰소는 의회의 결정문을 들고 법원을 찾았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만큼, 최근 왕실의 변호사로 활동했던 알폰소를 그 전달자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귀찮기는 해도, 알폰소로서도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는 일이었기에 단박에 역할을 수용했다.
“조세를 낮추고 폐지하는 일은 왕의 직속령이라 하여도 의회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라.”
알폰소는 자신과 마주 앉은 파렌 로어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읊조리는 것을 흘끗 바라보았다.
파렌 로어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그가 의회의 결정문에 반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봐도 명확했다.
“당연한 얘기고, 당연한 권리지. 법원에서 인가를 내주지 못할 이유라곤 없지 않겠나?”
파렌 로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왕의 의지를 꺾었다는 데에서 오는 기쁨 반, 자신이 원하는 합의를 이끌었다는 데에서 오는 희열이 반이었을 것이다.
알폰소는 대답 없이 앞에 놓인 맹탕 같은 차를 예의상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다시 손이 가지 않았다. 그는 차보다는 커피 하우스에서 논쟁하며 마시는 커피의 맛을 더 좋아했다.
“다음 안건은 직속령 대리인 선정에 관련된 것이겠군.”
“예. 앞으로의 본보기가 될 테니까요.”
토지를 소유한 덕분에 의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부르주아들은 해당 안건 역시 의회에서 자신들의 뜻대로 진행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폰소 역시 그렇게 믿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의회에서 처리된 안건은, 이처럼 법원에서 합법적으로 인가를 받은 후 시행령으로 내려올 것이다.
신분에 상관없다는 구절이 들어간 시행령이라니. 이 얼마나 짜릿한 변화인가.
알폰소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다가, 파렌 로어가 발견하기 전 표정을 황급히 감추었다.
“흠. 그래. 의회에서 결정이 되면 찾아오게.”
무표정해진 파렌 로어는 가타부타 말을 잇지 않았다. 이후 그가 덧붙인 말은 의회의 태도가 정리되면 찾아오라는 말이 전부였다.
이미 암묵적으로 신흥 세력과 귀족 세력의 의제 교환이 이루어진 상태였으므로, 싫든 좋든 그들도 합의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알폰소는 그를 설득해야 한다는 어떠한 압박감이나 부담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다시 뵙지요.”
파렌 로어는 대답 없이 웃는 낯으로 떠나는 알폰소와 악수했다.
막 법원장실의 문을 닫고 나오던 알폰소는 긴 통로의 끝, 모습을 드러낸 밀레스 로단테와 귀족들 몇 명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들을 하늘같이 우러르는 감정은 아니었다. 알폰소는 귀족이 아니었거니와, 그들과는 의뢰인으로 마주칠 수 있는 사이였기에 마땅한 예를 갖춘 것이었다.
“알폰소.”
“다들 어쩐 일이십니까? 의회의 결정문이라면 제가 전달했는데…….”
“아아, 그 일은 아니고. 법원장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눌 일이 있어서.”
밀레스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제로도 그에게 큰 목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급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치들끼리 만나 대화를 하는 일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귀족 나리들이란 늘 그렇지.
알폰소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그것이 실책임을 알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도 시간이 제법 지난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