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25)화 (125/151)

# 125.

왕이 미쳤다!

뜻밖의 소식에 모두가 콧김을 뿜었다. 절대 놓쳐선 안 될 기회다! 그들은 같은 마음으로 외쳤다.

기존 행정 제안 기구의 구성원이었던 100명을 제외한 200명의 선정에 대한 문제는 있었으나, 대다수가 왕의 제안에 동의했다.

사실 이제 영주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왕이 무려, 몇 세대에 걸쳐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 입법의 권리를 일개 기관에 부여하겠다고 한 것이다.

“왕이 미쳤군.”

“미쳤지. 아마 어미가 저를 해치려고 했다는 게 무척이나 충격이었던 모양이야.”

피베체 공작가, 카를로스 백작가, 리만 후작가가 모두 몰락했다. 이제 칼라브리아 내에 남은 고위급 인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귀족들에게는 새로운 구심점, 그리고 왕과 귀족들 사이 기울어진 축을 되돌릴 기회가 필요했다.

왕이 그 기회를 제공하겠다 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세가 꺾인 왕가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시대가 변하며 세상이 변했다. 왕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 것이다.

“반역으로 세 가문이나 모가지가 날아가서 걱정했더니, 어수룩한 왕이 떠먹여 줄 줄이야.”

그들은 자신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조금도 맞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대대로 내려온 명예와 왕가에 대항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리란 것이 중요할 뿐.

“영주세 폐지에는 부르주아들도 반대할 테니, 일단 되는대로 모두 끌어모아야지.”

그리고 왕에게 이는 귀족들만 반대하는 명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것이라며, 이름 모를 백작이 웃었다. 멋스럽게 기른 그의 수염조차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알폰소는 그를 따라 웃어 보였다. 왕이 어수룩해? 천만에.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왕가의 재판을 준비하는 동안, 알폰소는 로비엔과 로잘린을 몇 번 만났다. 그러는 동안 알폰소는 국왕 내외가 소문과 무척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로잘린은 소문처럼 연약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가 아니었다. 한 대 맞았다고 구석에서 울고 있을 유형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오만하게 알폰소를 내리눌렀다.

로비엔 역시 잘난 게 얼굴밖에 없는 무던한 왕이 아니었다. 로비엔은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자로 교육을 받아 왔고, 선왕의 마지막 치세 중 2년에서 3년가량은 그의 몫이었다. 혼인 동맹으로 말미암았다고는 하나, 미약하게 왕가의 회복기가 이루어지던 시기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행보에 의문을 품고 멍청하다고 비웃지만, 그런 왕이 갑작스럽게 멍청하게 군다는 일이 가능이나 한 일인가? 알폰소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그렇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만큼은 알폰소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심사가 뒤틀리거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던 왕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모두가 울고, 고성을 지르는 때에도 그는 침착하게 말 한마디로 쐐기를 박았다.

재판은 모두 그가 맞춰 둔 방향대로 흘러갔다. 뒤늦게야 알았지만, 아마 알폰소가 아닌 그 누구였어도 그 재판에서는 승리했을 것이다. 그의 직업적 자부심에 흠이 생기긴 했지만, 인정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일단 법원에서 해당 명령을 등기하고 공표할 예정이라니, 최대한 빨리 구성원을 꾸려야지.”

“알폰소 자네도 참여하겠지?”

알폰소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소는 새로운 기관에 참여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귀족 세력 역시 끌어들이고 싶은 자였다. 땅을 가진 자, 지식인 계층, 게다가 법률가이니 법령 제정 시 주장에 힘을 실을 수도 있었다. 알폰소 본인 역시 법을 만들고 사회를 변화시킬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직속령 영주세 폐지와 같은 명령을 먼저 폐기하는 것으로 하고, ‘신분과 상관없이 능력 있는 자’를 직속령으로 선출하여 보내는 것은 받아들여 주고받으면, 반대하는 신흥 세력들에게도 충분한 보답이 되지 않겠나?”

알폰소는 마치 은혜라도 베푼다는 듯한 태도의 귀족들을 보면서도 온화한 낯으로 웃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만큼 우스운 소리였다.

이미 귀족들은 많은 땅을 팔아 치웠다. 고위급 인사라면 몰라도, 대다수는 원래 가지고 있던 영지의 반이나 지켰다면 다행일 정도로.

애초에 영지가 없는 귀족들도 왕의 의견에 찬동할지 의문인데 신흥 세력에 대한 보답이라니? 아직도 그들을 뼛속 깊이 무시하는 태도였다.

“등가 교환이 될 만한 조건이 있다면 합의를 이끌기 좋겠지요.”

그러나 알폰소는 지금 당장 제 지갑을 채워 줄 고객 앞에서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미래의 일은 미래의 일이고, 지금은 지금이지 않은가.

게다가 그가 방금 내뱉은 개떡 같은 말이 그들 모두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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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서 왕의 명을 받들어 행정 제안 기구의 이름 및 목적 변경을 공표했다.

말이야 왕의 명을 받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왕의 명을 검열한 후 귀족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여 받아들인 셈이었다.

“암묵적으로, 대리인의 선정 조건과 영주세 폐지 거부 조건을 등가 교환한 듯합니다.”

“그리고?”

“넓은 땅을 소유한 것은 귀족들이 많기는 하지만, 땅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파가 갈린다고 하더군요.”

밀리언이 담담한 목소리로 의회에 붙여 둔 세작이 언급한 내용을 고해 올렸다. 로비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흥 세력 중에도 땅을 가진 자들이 있고, 귀족 중에도 땅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있으니까.”

어차피 그 둘 중 한 세력을 그의 지지 기반으로 흡수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로비엔은 제 생각대로 매끄럽게 흘러가는 모든 일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립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둬. 대신 의제의 순서를 분명히 해.”

“어떤 식으로…….”

밀리언이 물었다. 로비엔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선결 의제는 무조건 직속령의 영주세 폐지를 막는 일이어야 한다고. 가장 공통적인 문제가 처리되면, 각자의 이익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기 마련이니까.”

그쯤 되자, 로비엔을 바라보는 밀리언의 시선에 묘한 감정이 뒤섞였다.

“……무엇을 하고 싶으신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직속령의 영주세를 존속시키면, 의회를 만들기 위해 뭉쳤던 지주들의 갈등은 다시 귀족과 평민들의 것으로 돌아가겠지.”

“…….”

“그렇게 되면 귀족들은 ‘신분과 상관없이’라는 구절에 재차 거부감을 느끼게 될 거야. 다시 그들 사이에 명백한 선을 긋고 싶어 하겠지.”

신분과 명예가 주는 마땅한 지위는 그들의 자긍심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그것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귀족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아도 빤했다.

“귀족들의 가치를 대변하는 법원이 허락할까? 당연히 거절하겠지.”

교환을 위한 물건을 먼저 받은 자가, 제가 마땅히 건네야 할 물건을 파훼해 버린다면, 그 물건을 받아야 할 자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제가 이미 건넨 물건은 빼앗아 부술 수 없으니, 다른 것이라도 부수려 할 것이다. 그때 시선을 집중할 만한 장소와 여건을 마련해 준다면, 다른 이의 손을 빌려서 그가 원하는 바를 행할 수 있었다.

“나는 타인의 손을 빌려 법원에서 등기권을 빼앗을 거야.”

밀리언이 눈을 크게 떴다. 법원이 가진 등기권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그들만의 가치였다.

“그렇게 되면 입법의 권한은 평민과 귀족으로 이해관계가 각자 다른 이들이 뒤섞인 의회에 존재하게 되겠지.”

그저 주군이 하는 일이니 옳은 일이겠거니, 맞는 일이겠거니 하며 따랐지만 제 권위를 내려놓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로비엔이 이상했다.

“폐하. 왕의 명이야말로 절대적입니다.”

“그대가 나보다 더 고루하네.”

밀리언의 호소에 로비엔이 작게 웃었다. 키득거리는 얼굴이 얼핏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밀리언.”

“예, 폐하.”

“당연히 여기지 말아야지, 권력을 탐내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말아야지.”

로비엔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비를 만난 후에, 어미라 믿던 자에게 배신을 당한 후에, 그녀가 선왕으로부터 당한 배신을 알게 된 후에 그리 생각하게 되었다.”

뼈 아픈 상처를 되짚는 로비엔을 바라보는 밀리언의 시선이 어둑했다. 그의 시선에서 괜히 주군의 상처를 긁어 댔다는, 얼마쯤의 죄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려는 것은 내 권력과 권위를 내려놓는 게 아니야.”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거나, 그래야만 하는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거나.

“주변국들만 봐도 뻔하지 않나.”

로비엔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의 머리 위에 놓인 왕관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수많은 왕가가 꺾이고, 죽임을 당하고, 버려졌어.”

“…….”

“다음은 칼라브리아일 수도 있지.”

로비엔은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왕국 구석구석에 숨은 부패와 착취의 그림자가 머지않은 시일 내에 그의 목을 죌 무엇이 되리란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또 다른 권력의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왕이라는 자리로부터 권력을 여러 곳으로 분배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였다.

“시류를 거스르려다간, 왕관이 아니라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지도 몰라.”

“폐하!”

밀리언이 놀란 얼굴로 로비엔을 불렀다.

“내 대에선 아닐지도 몰라. 첨예한 갈등을 줄이고 흐름을 조정하는 만큼 변화는 천천히 올 거야. 그래도 미리 준비하려는 거야.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칼라브리아가 흔들리지 않도록, 후세의 아이가 하릴없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

“싫든 좋든, 내 결정에 달린 목숨이 수많으니 왕으로서 대비할 수밖에.”

무겁다고 해서, 벗어 버리고 싶다고 마음대로 벗을 수 있는 왕관이 아니란 것은 진즉 알았다. 그러니 합당한 책임을 져야지. 로비엔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밀리언. 그대가 이해할 수 없다면 강요하지는 않아.”

“…….”

“어쩌면 나는 그대에게 왕실을 지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한심한 왕으로 보일 수도, 권력욕이라곤 전혀 없는 한량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로비엔이 담담히 덧붙였다.

“어떤 주군을 선택할지는 그대의 몫이지. 모실 수 없는 주군이라 생각한다면 떠나.”

말리지 않겠다는 듯, 그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밀리언은 여전히 무참히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가리키는 방향에 선 로비엔이, 현실보다는 미래를 보는 그가 여전히 왕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의 말이 실체화되어 왕의 자리가 없어지는 순간이 와도,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고 사랑하리라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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