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그리고 그 결과는 실제로 예상한 바와 같았다.
법원은 그들이 왕의 명령을 등록하는 일을 거부한다면 왕의 명령은 그 효력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왕이 자신들에게 해당 영지를 배분해 줄 것을 바랐다. 충성이라면 얼마든지 맹세하며 엎드릴 수 있으니, 추가적인 세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영지를 갖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신분과 상관없는’이라는 조건은 그들이 거절하기에 안성맞춤인 무엇이었다.
“평민들이 영지를 경영하는 일의 무엇을 알겠느냐…….”
로비엔이 법원장이 보내온 반려문을 읽으며 작게 웃었다. 바로 직전까지도 제 영지들은 내팽개치고 수도로 올라와 사치 생활을 했던 치들이 영지 경영을 운운하는 것이 우습다는 얼굴이었다.
로잘린은 덤덤한 얼굴로 구빈원의 설립 취지와 책정된 예산의 목록을 훑어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신흥 세력을 깎아내리는 것에 아무런 유감도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로잘린의 자아는 여전히 왕족보다는 평민에 가까웠다. 그저 태어나기를 평민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성취의 제한을 경험한 일이 잦았기에 상처받지 않는 것뿐이다. 깎아내리는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을 만큼 순탄한 삶이 아니었으므로.
“이럴 줄 알았다면 법원의 독립성을 그리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로비엔이 중얼거렸다. 늘 하던 대로, 협상 테이블에 앉혀 두고 줄 듯 말 듯 감질나게 해야 했다고 생각하면서.
“뒤늦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지 않겠어요?”
로잘린이 그러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노라고 받아쳤다. 이어 사각거리며 왕립 병원의 후원 결정에 서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땐 비를 구할 생각에 눈이 멀어서.”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눈을 가늘게 흘기면서 경고하는 제 비의 모습을 보며, 로비엔이 부드러이 웃었다.
“어차피 생각하는 바가 있으시다는 거 알아요.”
“그걸 비가 어떻게 압니까?”
“로단테 백작에게서 들었어요. 오늘 좋은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리란 거 알고 계셨다고.”
로잘린이 들고 있던 깃펜을 테이블 위로 올려 두며 대답했다.
그는 재판 당일에도 왕이 가진 권력을 나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쿠안의 상황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법원에 왕을 대적할 유일한 힘을 부여한다면, 그를 농락하려는 시도가 있으리란 것도 그때부터 분명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그의 명에 대항하는 법원에도 화는커녕 웃음을 짓고 있을 리가 있나.
로비엔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가려는 길이 그리 순탄한 길이 아니니,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되고 싶을 뿐.
“……밀리언과도 제법 가까워진 모양이에요.”
“폐하의 부관인걸요.”
로비엔을 지척에서 모시는 자이니, 로잘린에게도 어색하지는 않을 수밖에. 게다가 종종 밀리언이 토해 내는 이야기 중에는 로비엔의 속내가 언뜻 비치는 얘기들이 많았다. 그러니 더욱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게 되었다.
“입 관리를 좀 더 하라 일러야겠네요.”
“제게 비밀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 건가요?”
혹시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일까, 로잘린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만일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바로 물러날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더 서운하다는 것도 모르면서.
“비에게 말하지 못할 일은 없어요. 숨기고 싶은 일도 없고.”
로비엔은 비밀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라면 더욱 그랬다.
“그저 괜히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했을 뿐이에요.”
“이 정도쯤은 괜찮아요.”
눈으로 봐서 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 태연한 모습이 그의 마음을 할퀴어 놓았다는 것도.
“예상한 부분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요.”
“…….”
“예상한 부분은 등기권을 활용할 거라는 것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그 등기권이 생각보다 더욱 강력할 수 있다는 것.”
한때는 자신들 역시 부르주아였고 관직을 샀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귀족들을 대변하고 있는 지금 법원의 구성원들. 그들에게만 왕을 견제할 권한을 준다면 왕국은 영원히 왕실과 귀족 사이 줄다리기만 반복하게 될 것이다.
“행정 제안 기구를 입법 기관으로 만들 계획이에요.”
스쿠안을 따라 입법, 사법, 행정으로 세 개의 권력을 나누고, 사법부의 권한 역시 재판에 가둘 셈이었다. 행정 제안 기구는 이미 만들어진 기관으로 입법부와 가장 성격이 유사하니 그 역할에 제격이었다.
“다만 기관의 성격과 규모를 변경하려면 또 법원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이 문제라.”
“무얼 하시려고요?”
“직속령의 영주세를 폐지할까 해요.”
영주세를? 로잘린이 의아한 얼굴로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영주세를 폐지할까 한다는 화젯거리는 직전까지의 대화 주제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정확히는 폐지한다고 운을 띄우는 일이긴 하지만.”
머리를 쓰고 계략을 꾸미는 일에는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숨 쉬듯이 모든 일의 인과 관계를 조성하고 계산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로잘린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갈등의 상황을 연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영지를 가진 자들의 항의를 이끌어서 뭘 하시려는 건가요?”
그러나 로비엔은 그런 일에 무척이나 익숙하고 능란했다. 늘 다정한 그를 낯설게 바라보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부를 가진 자들이 이해관계에 얽히고, 내 결정을 막고 싶어 하겠죠.”
“…….”
“그때 행정 제안 기구에 대리인 선정, 영주세 폐지와 같은 조세 제도 수정 등의 법령 제정이 가능한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할 겁니다. 어떤 결과든 따를 테니, 기구에 참여해 결론을 내리라고.”
귀족들은 왕의 기세를 꺾기 위해 행정 제안 기구에 합류하고, 또 다른 지주인 부르주아들까지 기관 내에 포섭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법원은 행정 제안 기구의 목적을 변경하고, 권력을 부여하는 일에 절대로 반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야 영주세 폐지를 막으려는 목적이 같겠지만,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이 다른 자들이니 분란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가장 처음 하는 일은 왕의 결정을 막는 일이 되겠지만, 이후로는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립할 것이다. 그리고 변하는 시대에 맞추어, 더 많은 지지를 받는 쪽이 승리하게 되리라. 로비엔은 그를 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기관은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일 거예요. 변화하기도 원치 않을 거고.”
로잘린의 걱정에 로비엔이 빙긋 웃었다.
“그러니 싸움을 붙여야죠.”
가볍게 하는 말치곤 담긴 뜻이 제법 서늘했다.
“아.”
눈을 굴리며 그의 의중을 파악하던 로잘린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이제야 로비엔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어서였다.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 될 건지 물어도 될까요?”
“비께 말하지 못할 것은 없어요.”
직전까지의 서늘한 기색은 금세 지운 로비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비지주 대 지주의 대립이. 중간부터는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싸움이. 끝에는 귀족과 평민들의 전쟁이 되겠죠.”
그는 언제고 지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승리로 가는 과정에서 마땅한 고통을 치른 적은 있지만, 패배하여 널브러진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법원장 파렌 로어는 또다시 어처구니없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최근 자신의 직속령으로 흡수된 땅들은 모두 영주세를 폐지하고 왕실세만 거두겠다는 것이었다.
“왕이 제 어미에게서 버림받고 미쳐 버린 건가?”
“법원장님. 누가 듣습니다.”
파렌 로어의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법원에 몸담아 왔다. 물론 법원의 많은 관직이 매매로 사고팔던 것이었다는 점은 종종 그의 명예를 할퀴었지만, 그는 긍지 높은 칼라브리아의 정통 귀족이었다. 불명예를 입은 적도, 왕으로부터 끈이 떨어져 버려진 적도 없는.
따라서 로어 가문은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고, 급전을 위해 땅을 갖다 팔 이유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지방의 영지를 손에 쥐고 있었고, 그로부터 마땅한 이익을 얻어 내고 있었다. 영지란 그런 재산권 중 일부였다.
그런데 왕이 영주세를 폐지하고 왕실세만 받겠다 하면, 아무리 쉬쉬한다 해도 타 영지민들이 어찌 나올지는 빤했다. 내는 세금이 줄어드니 왕의 직속령으로 숨어들거나, 도시로 뛰쳐나올 것이다. 혹은 영지 내에서 시위를 벌이겠지. 그리되면 그가 취하는 세금에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파렌 로어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행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그만의 생각인 것도 아니었다. 이는 영지를 사들여 그 땅으로부터 수익을 취하고 있는 평민들에게도 매한가지일 것이 자명했다.
“새로운 왕은 선왕과 다를 것이라 하더니…….”
최근 재판에서 법원에 힘을 실어 줄 때까지만 해도 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기는커녕, 제 아비만도 못하다. 파렌 로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는 귀족뿐만 아니라, 신분의 한계에 분노하는 부르주아들까지도 제 편으로 포섭하지 못할 정책이었다.
근래의 시위로 마음이 초조해졌는지도 모르지만, 해당 명령의 목적은 농사지을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나 반향을 얻을 선심이었다. 그러나 애초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치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봤자 별 소득도 없지 않은가.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파벨 로어가 혀를 찼다.
“거절하시려고요?”
“그럼 이걸 수용해?”
옆에서 들려오는 질문에 파벨 로어가 인상을 구겼다.
“왕의 명을 두 번이나 거절해도 되는 걸까요?”
“땅을 소유한 자들이 모두 들고일어날 것이니 사회의 안정성을 해칠 뿐 아니라, 이는 조세 개혁과 다름없으니 정당한 회의를 거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해야지.”
왕이 끼고 사는 왕비를 구제해 준 것이 고작 얼마 전의 일이었다. 물론 법원으로서도 이미 내린 판결을 번복할 수는 없지만, 왕이 머리를 숙인 게 고작 얼마 전이었단 얘기였다. 왕도 법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왕이 제 권위를 내세워 법원을 누르려 한다면…… 본때를 보여 줘야지.”
사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왕이 법원의 등기 거절을 수용하든 수용하지 않든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파벨 로어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이튿날, 로비엔으로부터 새로운 전언이 왔다. 그는 법원장의 말을 경청하여 회의를 열겠다고 했다. 주제는 당연히 직속령 대리인의 자격 문제와 영주세 폐지였다.
큰 줄기는 세 가지였다.
행정 제안 기구의 이름을 의회로 바꾸고, 기존 구성원을 포함하여 총 300명으로 구성할 것.
자격 조건은 각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자여야만 하되, 반드시 반 이상은 평민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
현재 사법부 구성원은 참여 불가능하지만, 해당 기관은 왕의 직속령 대리인 선정, 영주세 폐지와 같은 조세 제도 수정도 가능한 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로부터 내려진 결정이라면 왕 역시 따를 거라는 점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매력적으로 들리는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