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당연한 말이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스쿠안의 총리를 초대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렇지 않아도 왕실에 항의하는 시위가 잦아졌고, 부르주아들은 그 힘을 이용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눈앞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먹음직스러운 먹잇감까지 던져 줄 필요는 없었다.
“폐하. 스쿠안의 총리로부터 도착한 서신입니다.”
다만, 적당한 수준의 교류는 가능했다. 물론 나라와 나라 간의 교류가 아니라 상단주인 로잘린과 스쿠안의 총리가 주고받은 연락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러나 로비엔이 스쿠안의 총리와 개별적인 서신을 주고받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로잘린이 단순히 보가트 상단의 상단주가 아닌 것을 고려한다면, 두 나라 간 교류라 봐도 무방했다.
로잘린은 라나가 편지를 건네자마자, 편지 봉투를 칼로 뜯어 열었다.
“총리에게서 서신이 자주 도착하는군요.”
라나가 의아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접점이 없었으므로 그 의문은 이해할 만한 종류였다.
로잘린은 말없이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라나와 마리는 그녀의 수족이기는 했지만, 자신도 아닌 로비엔의 속내까지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혼자 있고 싶으니 사용인들을 모두 물려 줘요. 혹시 폐하께서 오시거든, 굳이 말하지 말고 문을 열어 드리도록 하고.”
로잘린의 명에 라나가 짧게 인사한 후 물러났다. 로잘린은 그제야 편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사실 스쿠안의 총리와 주고받는 서신 대부분은 로잘린의 질문과 총리의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부를 묻는 편지보다는 질의응답에 가까웠다.
“최근에야 입법의 권한을 가진 의회를 통해 헌법이 완성되었다.”
모든 차별과 특권을 철폐한다는 명목 하에 신분제를 없애고, 국가 권력을 세 개로 나누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운용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근에야 모든 것을 아우르는 헌법을 만들고, 그를 기반으로 통치하며 안정 궤도로 들어섰다는 데에서 그간 그들이 겪은 혼란이 짐작되었다.
“흐음.”
로잘린은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나중에 로비엔에게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손에 편지를 쥔 로잘린은 창문 너머로 길게 늘어지는 햇빛에 의미 없이 시선을 두었다. 곧 완연한 봄이 올 것처럼 푸른빛이 선명했다.
누군가의 고행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는구나. 흐르는 생각을 곱씹던 로잘린이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곧 일 년이네.”
로비엔과 결혼한 게 고작 일 년이 조금 못 되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 그토록 평범하고 따사롭게 시간을 보냈던 일들이 아주 먼 과거의 일 같았다. 지나치게 고되고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던 탓이리라. 아이를 잃었던 일도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야 했을 만큼.
아이를 잃었던 일은 아직도 곱씹기엔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 아이를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라나는 상처를 서둘러 봉합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로비엔 역시 그리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 진정이 될 때까지는 아직 더 묻어 두고 싶었다.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바로 지금,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였다.
“무슨 선물을 준비해야 하지?”
로잘린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로비엔은 사치품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술이나 시가도 매한가지였다. 바른 청년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진 사내답게 시가는 입에도 대지 않는 편이고, 술도 고민이 있을 때나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잘 손대지 않는 편이었다.
그나마 물어볼 수 있는 이들은 라나 혹은 마리뿐인데, 그 둘은 이런 일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유형이었다. 그의 취향을 잘 아는 자라고는 그나마 클로티 부인이려나.
그쯤 생각하던 로잘린은 문득, 클로티 부인을 아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어차피 증인으로 써먹지 못할 사람이라 생각하여 신경도 쓰지 않기는 했지만, 재판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이후로도 궁 안에서 본 적 없이 행방이 묘연했다.
“부르셨습니까.”
로잘린이 호출종을 흔들자 하녀 하나가 황급히 들어왔다. 로잘린이 하녀를 통해 하녀장을 데려올 것을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장이 서둘러 달려왔다.
“선왕비가 머물렀던 궁의 사용인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은데.”
“현재 왕실의 구성원이 두 분 폐하밖에 계시지 않아, 이외의 아랫것들은 모두 처분을 당했습니다. 특히 선왕비가 기거하던 궁의 인원들은,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 궁 밖으로 쫓겨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잘린의 물음에 하녀장이 즉시 대답했다. 제가 관리하는 하녀들은 아니었지만, 주인과 머무를 거처를 모두 잃고 짐을 싸 들고 나가는 사용인들의 모습을 지켜본 기억이 선연했다. 로잘린과 로비엔이 싸움에서 패배했다면, 저렇게 쫓겨나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이 되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클로티 부인은?”
“그에 대하여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 알아보라 할까요?”
로잘린이 클로티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을 수행하던 때에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데 어째서 클로티 부인의 행방을 묻는 것일까? 하녀장은 의문으로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제가 할 일을 알아서 찾아냈다.
“부탁하지.”
“소식을 듣는 대로 바로 전달하여 올리겠습니다.”
20년이 넘게 제 자식처럼 로비엔을 키웠으니, 그녀의 입으로 왕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클로티 부인에게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선왕비 역시 친우였을 터였다. 혹시라도 로비엔을 원망할까 걱정이 됐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듯했는데, 또 돌아보면 그렇지 않았다. 보가트라는 성을 가진 이들과 연을 끊는 데 그토록 긴 세월이 지지부진하게 소요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그리고 바깥에서 차를 마실 수 있게 준비해 줘. 햇볕이 따뜻해 보여서.”
돌아보면 모두 쓸데없는 걱정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로잘린이 외부에 티테이블을 마련할 것을 명령하자, 하녀장이 답지 않게 망설이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왜? 밖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로잘린은 그 기색을 기민하게 읽어 냈다.
“국왕 폐하께서, 외부에 티테이블을 마련하라 하시거든 따르지 말라 하시었습니다.”
하녀장이 주저주저 그녀가 받은 비밀스러운 명령을 털어놓았다.
로비엔이? 로잘린이 한쪽 눈을 찡그린 채 눈으로 되물었다.
“아직은 바람이 차니, 혹여라도 감기에 걸리실지 모른다고 하여…….”
“아.”
로잘린이 짧게 탄성을 흘렸다. 창문 너머로 보기에는 따사로운 햇살인데, 초봄을 맞이하는 바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많은 것들처럼.
“그럼 됐어. 여기로 가져와.”
“예, 폐하. 즉시 차를 올리라 명하겠습니다.”
그는 로잘린의 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로잘린이 사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로잘린은 저를 걱정하는 그의 눈을 보면서, 자신이 그렇게까지 약골은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할까 하다가 포기했다.
사실 그리 살아 본 적이 없어서, 그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순간들은 무척이나 낯설었지만, 생각보다 즐겁기도 했다. 굳이 삶의 작은 즐거움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로비엔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에 닿았다. 며칠 전, 로잘린에게서 전달받았던 편지였다.
‘스쿠안의 총리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어요.’
그는 기본적으로 매사에 마땅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아닌 로잘린이 스쿠안의 총리와 연락하게 된 것도 로비엔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로잘린은 상단주라는 말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자 했노라 발뺌할 수 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으므로.
‘말씀하신 대로, 신분제를 철폐한다고 해도 단번에 바뀌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로잘린의 담담한 목소리가 총리의 서신을 요약해 주었다.
헌법은 모든 이들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기존 관습과 문화 속에 녹아 있는 사회의 차별이나 불평등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는 듯했다. 총리의 고민 역시 그러한 문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를 통해, 로비엔은 큰 변화일수록 적절한 기반과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각자가 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할 테니까.’
스쿠안의 의회에서 일률적인 법을 새로이 만든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스쿠안의 의회가 하는 일을 담당할 기관이 필요하겠네요.’
‘행정 제안 기구를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새로운 기구를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법원도 결코 도움을 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전쟁이라도 나야 기세가 좀 꺾이려나.’
문득 로잘린이 열없이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기억났다.
지금으로서는 법원의 힘이 더 강하다. 아마 입법 기관이 새로 생겨나더라도, 어떤 계기가 없다면 순순히 따라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서로 싸우고 부딪치다 보면 싫든 좋든 그 힘을 서로 갉아먹기 마련이지만, 최근 큰 사건을 겪은 왕실이 또 싸움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서로 세력을 갈라치고 싸우게 만들 방법이 있다면 괜찮겠지만…….
로비엔의 손끝이 테이블 위를 불규칙하게 두드렸다.
그가 고민한 만큼의 시간 동안 불안하게 들리던 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괜찮은 생각이 났다.로비엔이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밀리언을 향해 산뜻한 얼굴로 웃었다.
‘행정 제안 기구에 직속령을 관리할 방법을 제안하라고 전달해.’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다.
“폐하?”
보고를 위해 찾아온 밀리언이 의문 어린 목소리로 로비엔을 불렀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행정 제안 기구에서는 뭐라고 했지?”
밀리언은 로비엔의 말대로 행정 제안 기구에, 직속령이 된 세 지역에 보낼 대리인을 선출할 방법을 마련하라는 명을 전달했다.
선왕 시해와 관련되어 활동이 완전히 멈추었던 행정 제안 기구는 서둘러 활동을 재개할 준비를 했다.
관리직에 있었던 고위 귀족 둘의 목은 이미 날아갔고, 구성원들 대다수가 부르주아와 하급 귀족들이었기에 결과는 뻔했다. 사실 죄도 없이 욕만 배 터지게 들어 먹은 형국이라, 행정 제안 기구의 구성원들도 정통 귀족 세력에게 제법 약이 올라 있었다.
행정 제안 기구에서 제시한 방법은, 신분과 관련 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선정하여 보내는 것이었다. 왕에게 감히 역심을 품을 수 없으면서, 해당 지역의 현안에 관심이 많은 자. 주장은 그럴듯해 보였다.
“그대로 법원에 전달해.”
로비엔의 명령에 밀리언이 난처한 기색으로 눈썹께를 갉작였다.
“왜? 문제라도 있나?”
“좋은 반응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로비엔은 밀리언의 짐작이 맞을 것이라 산뜻하게 인정했다.
“좋은 반응이 돌아올 리가 없지. 그걸 노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