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왜?
하나의 질문에 여러 가지의 답이 머릿속에 휘돌았지만, 상황에 근접한 답은 하나였다.
선왕비가 바란 대로, 로비엔은 자신이 차지한 자리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함을 얼마쯤 느끼고 있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어깨를 짚고, 그의 품에서 제 상체를 떼어 냈다. 그 순간 로비엔의 팔이 로잘린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어 감았다. 제게서 아예 떨어지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했고, 혹은 그의 얘기를 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재판의 독립성을 부여하려는 것도 왕의 권한을 줄이기 위해서였나요?”
머뭇거리며 던진 질문이었으나,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요.”
“…….”
“나야 비께서 많이 도와주실 테니 걱정이 없고.”
로비엔이 느릿한 손길로 로잘린의 잔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땋아서 틀어 올린 탐스러운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앙증맞은 귀와 매력적인 진주 귀걸이를 훑고 지난 손길이 담백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 속내까지 그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낮 시간대의 그는 성애적인 표현에 몹시 인색한 탓이었다.
“진심이세요?”
물론 그 순간 중요한 것이 그런 표현이 아니기도 했다.
로잘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로비엔, 혹은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왕이 되는 것뿐이었다던 그의 답변을 생각하면, 결코 그의 입으로 듣게 되리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선왕비가 사형당하던 날, 생각했어요.”
웃음인 듯 한숨인 듯 긴 숨이 샜다. 로비엔은 군중들 속에 섞여서 들었던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들을 떠올리며 담담하게 제 속을 털어놓았다.
“다시는, 고작 이 자리를 가지려고 관련 없는 사람을 끌어들여 고통스럽게 만들지 말자.”
제 아비가 가지지 않았기에 그가 대신 이어받은 죄책감과 가여움에서 발로한 맹세였다.
지금도 왕실의 힘은 착실히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 힘과 권력을 동경하고 갈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해 누구도 이 자리를 원하지 않도록 만들어야지.”
따라서 왕의 자리가 더는 누구에게도 매력적인 것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었다. 한 명에게 일방적으로 쏠린 권력과 부는 인간에게 탐욕을 부리게 하고, 그 탐욕이 관련 없는 사람까지 끌어들이게 하므로.
그것이 선왕과 선왕비의 비틀린 관계의 전말이기도 했다.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했다. 또 다른 선왕비와 로비엔이 탄생하지 않도록, 그들이 이와 같은 괴로움을 끌어안지 않도록.
“언젠가, 긴 시간이 지나서 필요하지 않게 되면 이 자리가 없어져 버리도록.”
그러나 왕실을 폐지한다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간 왕실이 맡은 책임과 소명을 다하지 않았다는 마땅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리하면 변화가 아니라, 왕실의 죄를 무고한 백성들이 나누어 가져야 하므로.
준비된 기반과 적절한 규칙, 그리고 규제 없이 이루어지는 빠른 변화는 필연적으로 낙오되는 자를, 그리고 사회의 혼란을 부른다.
로잘린이 헛숨을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왕으로 나고 자란 자였다. 그런 사람이 왕정제의 끝을 논하다니.
“가져야 한다고 배웠기에 가져야만 하는 것인 줄 알고 살았어요.”
“…….”
“하지만 우리가 거쳐 온 삶이 그렇듯이, 누군가가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않으냐고 묻는 시선이 또렷했다. 로잘린은 누구보다 그 생각에 동의할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의 마음은 명확했다. 그리고 로잘린이 의견에 동의할 거라는 그의 예상도 틀리지 않았다.
“선왕비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건 폐하의 자유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더라면 달랐을까요?”
로잘린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괜히 그를 위로한답시고 꺼냈던 이야기가, 묻은 채 지나갈 수 있었던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마땅한 값을 치러야 한다고 들렸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아니.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로비엔이 명확히 대답했다. 죄책감에만 매몰되어 생각한 일이 아니라고.
“…….”
그렇지 않아도 주변국들은 새로운 정치 체제 사이의 위협 앞에 흔들리고 있었다. 각국의 왕실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땅을 야금야금 사들이며 부를 축적한 평민 세력은 그들을 향한 불합리함과 차별을 예의주시하며 변화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지금의 칼라브리아도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칼라브리아라고 시간과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비가 된 자로서 절대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로잘린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녀가 머리 위에 쓴 것은 금으로 만들고 보석으로 세공한 화려한 왕관이 아니라는 것을.
“스쿠안, 기억하세요?”
그렇다면 대범한 로잘린 보가트답게. 늘 그래 왔듯이. 그 변화의 물결을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게 진실로 그의 결정이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선왕의 장례 때 애도문을 보내온 나라 말입니까?”
“네. 아시다시피 몇 년 전에 혁명으로 모든 체제가 전복된 나라죠. 다들 내전이 일어나리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몇 년째 안정적으로 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들과의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물어 왔던 로비엔은 이미 스쿠안에 답장을 보냈다. 선왕의 장례가 끝난 후 칼라브리아가 안정되고, 스쿠안 역시 내정이 안정되면 총리를 정식으로 초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두 나라의 체제가 완벽히 다른 만큼, 반향이 적잖기는 했다.
“다른 나라들도, 왕의 힘이 막강했던 시대는 진즉 저물었어요. 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는 왕도 생겼고. 그래서 주변국의 공화주의자들은 스쿠안을 모방하기 위해 그들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어요.”
사실 로비엔이 스쿠안에 관해 물어 왔을 때, 로잘린은 많은 것을 답변해 주지 않았다.
결정은 왕이 될 그의 몫이었지만, 보가트 상단과 거래하면서 알게 된 스쿠안은 매력적인 나라였다. 정치 체제의 차이를 문제로 그들이 먼저 건네 온 손을 쳐 내 버리기에는 아쉽다고 생각했다.
“스쿠안은 권력을 세 개로 나누고, 각 권력의 한계를 법으로 제한한 법치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요.”
“…….”
“꼭 권력을 세 개로 나누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법원과 왕실로만 양분한다면 이전과 다르지 않게 보일 거예요.”
법복 귀족 중에는 부르주아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돈으로 관직을 사서 계급의 사다리를 올랐다. 그리고 부르주아 세력이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규제하여, 자신들이 이용한 사다리를 부수었다. 이후 자신들을 따라 하는 자들이 생겨나, 그들의 권한을 위협하지 않도록.
그것이 한 세기 전쯤.
2, 3세대가 바뀌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귀족과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돈을 주고 관직을 샀다는 사실도 이미 묻힌 후였다. 그러니 이전에 자신들도 재산으로 관직을 샀다는 사실을 지우고, 부르주아 세력의 성장을 방해하며, 정통 귀족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귀족 못지않게 배우고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대다수 평민은 여전히 배제당한 상태였다. 그것은 결국 이 체제를 무너뜨려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될 뿐이었다.
이 체제가 무력하게 쓰러져 나라가 혼란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가장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비께선 모르는 게 없네요.”
로잘린의 설명에 로비엔이 빙긋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도 이미 다 알고 계셨네요. 괜한 소릴 했어요.”
“당신이 하는 말 중에 괜한 소리가 어디 있겠어요.”
그에게서는 어떠한 놀람도 비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스쿠안의 정치 체제, 법, 국가 권력의 분할과 그로 말미암은 사회의 변화를.
아마 로비엔은 그저 로잘린에게 동의를 구하고 싶었을 뿐일 것이다. 로잘린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왕족이 되고 싶다고, 힘을 갖고 싶다고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왕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을 내려놓는 일은 유쾌한 일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로잘린이 진심으로 왕족이 되어 그 힘을 휘두르는 삶을 원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아니라는 걸 이미 알면서도 그가 굳이 확인코자 물었다는 점은 조금 괘씸하지만.
“이미 내린 결정을 머뭇거리고 계신 이유가 저라면, 폐하.”
“…….”
“저는 괜찮아요.”
왕족보다 평민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머리에 쓴 왕관은 녹이 슬어도 여전히 무거웠고, 움직일 때마다 시녀며 하녀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것은 내도록 낯설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라나 이외의 시녀나 마리 이외의 하녀를 달고 다니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제가 폐하 옆에 서고자 했던 것은, 상단을 가질 최선의 방법이 그뿐이었기 때문이었어요.”
“이미 가졌군요.”
“네. 저는 이미 원하던 것을 가졌으니 그 이상의 욕심은 가지지 않아요.”
게다가 로잘린이 왕세자비가 되고자 한 것은 권력이 아니라 상단을 갖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그것을, 그리고 그 이상으로 로비엔이라는 남자를 가진 지금 다른 것은 무의미했다. 자신은 왕관을 쓴 것보다 쓰지 않았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다.
“저는 분수에 맞는 욕심만 부리거든요.”
로잘린이 장난을 치듯 덧붙였다.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로비엔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웃었다. 생각보다 쉽게 지나가 허탈한 듯도, 맘에 담아 두었던 얘기를 털어놓아 시원한 듯도 한 웃음이 예뻤다. 물론 웃는 미인의 얼굴이 밉기도 어렵겠지만.
언제고 자신은 그를 지지할 것이다. 그가 내린 결정은 옳았다. 그는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사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저를 먼저 버리지만 않으신다면, 저는 늘 폐하 곁에 있을 거예요.”
인정한다. 우습지만, 사랑은 불완전하고, 의탁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여자는 사랑에 눈이 멀었다. 사랑의 불완전함과 의탁하여 사는 삶의 위태함에 대한 비 신뢰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지만…….
로잘린의 손이 부드럽게 로비엔의 턱을 붙잡아 제게로 끌어 내렸다.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이마를 맞대며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말을 부드럽게 속삭여 주었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그의 치세에서 세상은 차근히 변해 갈 것이다. 그 속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실의 일원이 아니어도 좋다. 어차피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 결실은 달콤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이제 이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제 반려인 로비엔 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무엇이든 유일한 가족, 그의 옆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