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로비엔에게 마지막 관계의 정리가 레이첼 후작 부인이었다면, 로잘린에게는 발란이었다.
다만 발란과의 결말은 레이첼 후작 부인처럼 깔끔하지 못했다. 발란이 그녀의 결정에 순순히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클로티 부인에게서 배웠던 걸음걸이는 모두 잊은, 조금은 신경질적인 걸음이 감옥 앞에서 멈추어 섰다.
리리엔은 재판이 있기 전, 재판이 로잘린의 승으로 기울 수 있도록 모든 것에 협조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제발 발란의 목숨만은 구해 달라고 빌었다.
‘왜 그렇게 발란을 살리고 싶어?’
‘가족, 가족이니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몸뚱이, 네 목숨도 아닌데 왜 그리 발란을 살리는 일에 집착하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신 보지 못해도 좋아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니 제발…….’
가족이기 때문에. 리리엔은 고작 가족이라는 그 당위성 하나로 빌고 애원할 수 있다고 했다. 드마셸이 발란의 목숨에 자비를 구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내 억울하다며, 로잘린을 향한 증오를 쏟아 내던 발란이 눈물을 비친 것 역시 그 순간이었다.
그때야 알았다. 자신은 진실로 저 속에서 가족으로 여겨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언젠가 그 속에 융화되어 살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오만한 욕심이었다는 것도.
‘……발란을 살리고 싶거든, 전부 두고 다른 나라로 떠나세요.’
그걸 깨달았던 순간, 모든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보가트 가문 내에서 가족의 구성원은 저들로서 완벽했다. 애초에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던 로잘린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발란이 자결하고, 보가트 공작은 시름에 잠겨 앓다 죽은 것으로 끝낼 테니.’
로잘린의 제안에 드마셸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로서는 이 왕국 내에 남겠다 결정을 내리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보가트 공작가의 이름이 남기는 하는 만큼, 로잘린이 보가트 가문의 명맥을 이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보살펴 주거나 편의를 봐주는 일은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드마셸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리리엔 역시 훌쩍이며 고개를 숙였다.
리리엔은 제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 왕국 내에 남기로 했지만, 리리엔은 크게 신경 쓰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미 결혼해 보가트라는 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가 폐하를 뵙게 해 달라고 계속 요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자비로 말미암아, 드마셸과 발란은 사형일 전에 국경을 넘기로 이야기를 마쳤다. 발란이 자결한 척하고, 드마셸이 그를 수습하여 가는 것으로 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드마셸을 보아 그 정도까지 양보하고 편의를 봐주었으면 됐지, 이 빌어먹을 새끼는 대체 언제까지 자신을 괴롭힐 작정인지.
간수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로잘린을 보고 황급히 인사했다. 로잘린은 대충 인사를 받은 후, 손짓으로 그들을 모두 물렸다.
로잘린이 오기를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듯,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발란이 몸을 세워 앉았다.
“감히 누굴 오라 가라 해? 네가 죄가 없어서, 예뻐서 살려 주겠다 한 줄 알아?”
이 상황에도 자신을 오라 가라 하는 발란이 괘씸했다. 로잘린은 발란을 향한 아득한 증오와 경멸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나는 당장이라도 네 목을 베라고 명령할 수 있어.”
“그럼 지금이라도 명령해서 나를 죽여.”
로잘린이 순간 멈칫했다. 눈동자에 강하게 서려 있던 분노가 당황스러움에 몸을 가렸다.
“네 손에 목숨을 건진다고 생각하면, 내 삶이 너무 구차하고 끔찍해.”
발란이 중얼거렸다.
기가 찼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그래서. 네 목숨보다 자존심이 더 귀하다 이거야?”
“…….”
“네 가족의 애원과 절박함보다?”
발란이 자결하는 것? 드마셸과 리리엔의 슬픔?
그딴 것들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사실 발란이 죽어 없어지는 편이 로잘린에게는 훨씬 좋았다. 혹시라도 어디서 이를 갈고 있다가 또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드마셸, 그리고 리리엔과 약속한 바가 있기에 지키려 하였을 뿐.
“칼 하나만 보내 줘.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처럼 보이진 않을 거야.”
로잘린이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자신을 직시하는 발란의 눈동자를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진심이었다.
“같이 산 세월이 있다고, 나를 아주 모르지는 않는구나.”
“아버지나 리리엔보다는 내가 너를 더 잘 알겠지.”
발란이 무덤덤하게 인정했다.
싫어하는 만큼 대상을 지켜보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격할 거리가 필요하고, 미워할 구실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애매하게 로잘린을 아끼는 드마셸보다야 발란이 로잘린을 더 잘 알았다.
호랑이처럼 발톱을 숨긴 계집애. 호시탐탐 그의 모가지를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는 귀신같은 것.
눈앞의 어린 여자애를 왜 이토록 싫어하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제 로잘린을 증오하는 건 그의 삶에서 하나의 습관과 같아졌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이 지독한 원망에 끝이 있을 리가.
“기껏 너를 살리려는 이들을 두고 왜 죽길 원해?”
로잘린이 물었으나, 발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사과하지도 않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악연인 사이가 없는 것은 아니구나,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섰다.
“마리, 오늘 밤까지 단도 하나를 구해 발란에게 주렴.”
“네?”
마리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으나 로잘린은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 밤, 사형일을 기다리던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는 감옥에서 자결을 선택했다.
간수들은 일동 당황했다. 발란이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한 탓이었다.
그러나 왕가는 간수들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그저 발란의 시신을 그 아비인 드마셸이 수습하도록 했다.
그러한 대처로 보건대, 현재 왕비의 가족들이 모두의 앞에서 사형당하는 것은 위신이 떨어지기에 자결로 수습한 것이리라는 짐작이 칼라브리아 내에 공공연하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사실 발란은 저를 위해 무릎까지 꿇은 아비와 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결했다. 로잘린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빌어야 하는 제 처지에 대한 절망 역시 이유였다.
로잘린은 발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척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발란에게, 마지막 자비로 칼을 던져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로 자비였지, 잔혹한 복수 같은 게 아니었다.
‘가족, 가족이니까…….’
‘기껏 너를 살리려는 이들을 두고 왜 죽길 원해?’
다만 로잘린은 가족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누군가는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은 채 제발 살려만 달라고 빌고, 누군가는 그들을 무릎 꿇린 것이 죄스러워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지.
전 리만 후작 가문의 영지였으나 지금은 왕의 직속령이 된 지방과 관련한 보고서를 살피던 로비엔이 로잘린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슨 일 있어요?”
다정한 목소리가 로잘린의 상태를 살피며 물어 왔다.
가족, 로잘린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를 입안으로 굴리며 로비엔과 시선을 마주쳤다.
“폐하와 저는 가족이죠?”
로잘린의 뜬금없는 질문에 로비엔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로잘린은 종종 속 모를 소리를 하곤 했다.
“당연히.”
로비엔은 순순히 인정했다. 실제로도 부부고, 아이를 가져 본 적도 있는 그들에게는 당연한 얘기였다.
“그렇다면 폐하께선 제가 가져 본 유일한 가족이 되겠네요.”
무슨 의도로 하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로비엔은 로잘린의 눈동자를 샅샅이 살피며 그 감정을 읽어 내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로잘린이 가끔 영문 모를 소리를 하기는 해도, 그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그냥.”
“…….”
“폐하께서 제가 가져 본 첫 번째 가족이라는 게 좋아서 그래요.”
저를 깊게 들여다보는 로비엔 앞에선 숨길 게 없었다.
로잘린이 힘없이 웃었다.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하던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울적해 보이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로비엔은 로잘린의 유일한 약점이 부족한 가족애, 그리고 부정한 관계에서 태어났다는 오명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자면 내게도 로잘린, 당신이 처음 가져 본 제대로 된 가족이에요.”
그렇기에 로잘린에게 꼭 알려 주고 싶었다. 분명 처음에는 전부 다른 조건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당신과 나는 영혼의 시작부터 끝까지 가장 맞닿아 있었다고. 어쩌면 처음부터 하늘은 그것을 알고, 기댈 사람 없이 외롭기만 할 당신과 나를 인연으로 묶어 주었던 것 같다고.
“그러면 폐하께서는 제가 애틋하세요?”
로잘린이 마치 그를 시험하듯 캐물었다.
“당연히 애틋해요. 다 해 주고 싶을 만큼.”
로비엔은 망설이지 않고 그 애정도 시험에 응했다. 로잘린이 가진 유일한 가족이 그이듯, 로비엔에게도 로잘린이 유일했다. 소중하지 않을 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는 대답이 흡족했던 듯, 로잘린이 그제야 의심을 지우고 환하게 웃었다.
“저도 그래요.”
로비엔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앉은 자리에서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아양을 부리는 아이처럼 품 안으로 안겨 드는 몸을 단단히 끌어안아 주었다. 예쁘게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자 로잘린이 눈을 감고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비를 위해서 법원에 머리까지 숙이고 들어갔는데도 의심했다니, 서운하네요.”
로비엔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잊고 있던 게 기억이 났다는 듯, 로잘린이 눈을 떴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최근 법원이 무척이나 기세등등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으로는 자신들의 이익과 반한다면 왕의 어떠한 명령에도 순순히 따르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있다는 것도.
“비의 안위에 대한 것만은 조금의 위험도 타협할 수 없었어요.”
로비엔의 부드러운 손길이 로잘린의 이마께를 덧그리고 지났다. 손끝에 온통 로잘린을 향한 애정과 애틋함이 스며 있었다. 그게 좋으면서도, 그 마음 하나가 그의 순탄한 치세와 권력을 위협하고 있는 이 순간이 미안했다.
“하지만 왕권이…….”
로잘린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로비엔이 검지를 들어 그녀의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자연스럽게 말이 끊겼다.
로잘린은 아마도 로비엔은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모양이라고 짐작하며 그 품 안으로 더욱 엉겨 붙었다.
“나는 왕의 자리가, 갖고 싶은 것이 아니게 되기를 바라요.”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말은 예상했던 얘기와는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