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네 자식을 달라고 했다.’
앨런이 벼락을 떨어뜨렸다. 로네로서는 끔찍한 제안이었으나 그를 전달하는 앨런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로네 비에트가 낳는 것이 딸이든 아들이든 제 자식으로 품겠습니다. 사생아가 아니라 정비의 자식이니, 태어나자마자 그만한 대우를 받겠지요. 딸이라면 원하는 혼처에 보내시도록 도울 것이고, 아들이라면 왕세자가 되게 해 줄 것입니다. 그 아이는 더 자라면 왕이 되겠지요. 피베체 공작가 역시 온 힘을 다해 그를 도울 것입니다.’
왕비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왕비 자리를 보존하고, 아이를 빼앗아 가는 대가로 로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평생 정부로 그녀를 끼고 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겠다고.
‘임신했다는 거, 거짓말이었던 거죠?’
로네가 날카롭게 물었다.
앨런이 처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는 처음부터 아이를 빼앗아 갈 작정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처음부터.
저와 앨런이 처음부터 줄리를 기만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로네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내 아이잖아요. 우리 아이잖아요!’
‘로네. 여기서 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와 아이가 동시에 죽어! 너는 왕비와 왕손을 동시에 해친 왕족 시해범이 된다고!’
앨런이 정신 차리라는 듯 로네의 양팔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머리꼭지에 찬물을 들이부은 듯 머리가 차게 식었다.
‘당신은 왕인데 날 구해 줄 수 없어요?’
로네의 물음에 앨런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권력을 좇아 왕이 되겠다고 했다. 한데 왕이 된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뭐지?
처참한 깨달음이 뒤따랐다. 앨런은 정말로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었고, 자신은 그들 사이에 낀 부정한 존재였다. 누가 먼저고 처음이었냐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를 주자. 응? 그러면 너도 살고 아이도 살아. 아이는 왕세자로 커서, 내 뒤를 이을 왕이 될 거야.’
앨런이 로네를 붙잡고 얼렀다. 혹시라도 왕비가 허튼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자신이 아이를 보호하겠노라고. 왕과 왕비의 적장자로, 부족함 하나 없이 살아가도록 만들겠노라고.
‘싫어. 싫단 말이야…….’
흐느끼고 섧게 울어도 소용없었다. 애써 외면했던 비참한 현실이 로네의 얄팍한 정신머리를 비난했다.
로네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빙빙 돌고,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그런 날이 있었다. 하지만 레이첼 후작 부인은 그처럼 수치스러운 로네 비에트의 이야기를 제 아들 앞에서 일일이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목숨의 위협이 있었고,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짧은 대답으로 변명을 마쳤다.
“당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은 조금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직접적으로 그녀의 욕망을 언급하자 레이첼 후작 부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던 레이첼 후작 부인은 이내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오히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그런 제안을 한 왕비가 미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왕의 정부로 받는 애정은 언제 끝이 나는지 모르지만, 제 아들을 왕으로 만드는 것은 더 긴 세월의 영광이 될 수 있었으므로.
그래서 왕비의 그림자 역을 맡은 로네는 왕비의 궁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러고는 이불로 둘둘 말려, 궁 안에 마련된 제 침실에 던져졌다. 제 목숨을 구하고, 아이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면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직후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선택한 방식의 잔혹함을 깨닫게 되었다.
왕의 적장자로서 언젠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겠지만, 그 아이는 제 아이일 수 없었다. 제 배로 낳았지만, 아이를 한번 안아 볼 수조차 없었다. 아이가 커 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좋았지만, 그 아이가 줄리 피베체를 어머니라 부를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다.
자신을 어미의 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경멸하는 눈동자로 바라볼 때면, 딛고 서 있는 자리에서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래도 계속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선왕의 정부로 궁에 머물렀어요.”
그래도 자신을 닮은 로비엔의 얼굴이 웃을 때, 연푸른 눈동자에 빛이 스며들 때. 그 모든 순간이 사랑스러워 지켜보고 싶었다.
이후 선왕에게 남은 것이 애정이 아님에도, 여전히 모든 것을 움켜쥔 그에게 불쑥불쑥 치솟는 원망을 견디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머물렀던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레이첼 후작 부인은 로비엔의 질문 속에서 어떠한 빈정거림 내지는 자신에게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로비엔은 그녀에게 제 감정을 하나하나 드러낼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다.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 누구도 의심치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왕비가 로비엔이 태어나자마자 낚아채어 가고도 아무렇지 않기에, 오히려 정말 제 자식처럼 예뻐하는 것 같기에 누구에게도 들키지는 않겠다는 생각만 했다. 어리숙한 짐작이었다.
차게 식은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는 로비엔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 더욱 뼈저리게 느껴지는 감상이었다.
“……당신은 그때, 그 아이와 함께 궁을 떠났어야 했습니다.”
눈을 내리깐 채 바닥만 응시하던 레이첼 후작 부인의 시선이 고요히 위로 움직였다.
“그랬다면 자식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선왕비가 이토록 망가질 일도 없었을 테니까.”
로비엔은 마치 길거리의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얘기를 하듯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의 상황을 특별히 슬프거나 우울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듯이.
“당신의 인생도 가엾다고 생각합니다. 순진한 시기에 만난 남자가 질이 나빴고,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일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어머니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앨런 3세, 한 번에 두 명의 여자를 농락한 그의 아비가 쓰레기 같은 작자였다. 그것만큼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레이첼 후작 부인, 로네 비에트 역시 마냥 피해자는 아니었다. 왕의 총애로 말미암아 왕비가 되겠다는 망상을 하였고, 사생아에 불과한 아이를 왕으로 만들 수 있다는 헛된 꿈을 꾸었으며, 불행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선왕비에게만은 그녀도 잔악하기 그지없는 공범에 불과했다.
“지독하게 원망스럽더라도 내게 모후는 줄리 피베체, 한 명입니다.”
“……제가, 제가 원망스러워서 그러심입니까?”
레이첼 후작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기에, 용서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레이첼 후작 부인의 눈동자에 흐릿한 물기가 비치고 있었다.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자신을 어미로 품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토록 잔인하게, 그녀를 어미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고 선언할 줄은…….
“딱히 원망이나 악의는 없습니다.”
“……흐윽.”
“그저 가족의 영역에 당신이 없을 뿐.”
그들에게 남은 인연이 없을 뿐이라고.
레이첼 후작 부인이 떨리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가녀린 두 어깨가 안타까울 정도로 들썩거렸으나 로비엔의 눈에서는 조금의 온기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선왕비를 떠올리게 될 테고.”
로비엔은 레이첼 후작 부인을 사랑한 적이 없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고작 낳아 주었다는 것만으로 인연을 맺기에는 지나치게 기만적인 관계였다.
“……오늘 등 뒤로 쏟아지던 군중의 함성을 기억하게 될 테죠.”
천하의 악녀가 죽었다!
그가 등을 돌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찬물이라도 뿌린 듯 고요했던 어느 순간이 지나자,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군중들은 금세 동조하여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어떠한 순간인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선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어쩐지 피 냄새가 역겹게 코를 맴돌았다. 로비엔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즉시 궁으로 돌아왔다.
“당신의 존재가 나로 하여금 죄책감을 상기하게 하고, 증오와 원망을 잊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 형태를 굳이 이름 붙이자면 죄책감과 원망임을 모르지 않았다.
선왕비는 그의 마음 깊은 곳을 칼로 찌르고 난도질했지만, 그녀의 삶을 가여워하는 사람이 누구도 남지 않도록 복수한 것은 바로 자신이기에. 로비엔과 선왕비는 의도치 않았더라도 서로의 존재 자체가 상처인 관계였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이제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 울고 있었다. 로잘린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안타까운 광경을 흘려보냈다.
“나는 상처와 고통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같이 보고 있으면서도, 로비엔은 그 흔한 손수건 하나 건네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작은 기대조차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 명백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로비엔에게 있어서 그저 잘라 내야 할, 정리해야 할 무엇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로비엔에게 잔인하다고 할지 모르나, 로잘린은 그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스운 얘기지만, 세상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수록 상처인 관계가 있었다. 선왕과 선왕비가 그랬고, 로잘린과 발란이 그랬다. 그리고 로비엔이 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로비엔과 레이첼 후작 부인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
로잘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럽게 우는 여자를 불렀다.
“이처럼 아름다운 아들을 낳아 준 점에는, 그 반려로서 감사히 생각합니다. 때때로 궁 안에서 기반 하나 없던 나를 보살펴 준 일 역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겁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축축하게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비련한 그녀의 얼굴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내린 선택의 결과로 잃은 자식을 이제야 되찾으려는 것은 과욕임을 아신다면, 폐하의 생각에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
“가끔은 포기가 사랑인 순간도 있으니까요.”
사랑한다고 말하려거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 달라는 뜻이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허탈하게 웃었다. 어차피 로비엔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지만 막무가내로 거절당하고 밀려나는 것은 서러웠다. 그런 찰나에 한 번이라도 사랑한다고 고백할 기회를 주겠노라는 로잘린의 유혹은 무척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길게 숨을 내쉬며,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단 한 번도 제 마음을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만.”
그러고는 떨리는 입꼬리를 팽팽하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이 선택으로 알아주실 수 있다면, 그리하겠습니다.”
“…….”
“폐하께선 영원히 선왕의 적장자, 칼라브리아의 태양이며 저의 주군일 것입니다.”
영원히 그에게서 가족이 되지 못하고 잊히더라도, 그것이 단 한 번도 안아 주지 못했던 아들을 향한 죄스러움과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무엇이 된다면.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 헐겁게 엮인 빨간 실 하나쯤은 얼마든지 끊어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