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궁으로 돌아온 로비엔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로비엔은 옷을 갈아입은 뒤, 그가 해야 할 일을 준비하기로 했다. 곧 레이첼 후작 부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선왕비와 그랬듯, 레이첼 후작 부인과도 마땅히 정리할 일이 있었다.
“폐하.”
물론 그 전에 그의 집무실을 찾아온 건 로잘린이었다. 로잘린은 이미 그와 관련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굳이 비밀을 만들어 숨기고 싶지도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만일 숨기려고 한다 해도, 속지 않기도 하겠지만.
“벌써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곧 레이첼 후작 부인과 약속이 있으니까요.”
“피곤하면 미루셔도 될 일인데.”
로비엔이 말없이 빙긋 웃었다. 로잘린의 말처럼 깨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깰 수 있는 약속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정리해야 할 일이라면 하루빨리 끝내고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쉬고 싶었다. 지나간 일로 묻어 두고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로잘린은 그런 속내까지 샅샅이 파악한 사람처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창가에 선 로비엔 곁으로 다가왔다. 서슴없이 그의 안색을 살피고, 피부를 매만지는 손길마다 애정과 걱정이 묻어났다.
“폐하, 레이첼 후작 부인이 들어 만남을 청하고 있습니다.”
“들여보내.”
조금만 더 이대로 있으면 좋겠다 싶었던 평화로운 순간을 부수는 방문자가 소식을 전해 왔다. 로비엔은 로잘린에게 기대어 다소 편안하게 허물어졌던 표정을 추슬렀다. 객을 맞이하는 적당한 자세였다.
“왕국의 주인들을 뵙습니다.”
열린 문 너머로 드러난 레이첼 후작 부인은 선왕의 정부로서 궁에 머무를 때와는 판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장신구 하나 없이도 빛이 나는 외모를 가진 미인이기는 했지만,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부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새로는 그 빛이 사위기 마련이었다.
“앉으세요.”
로비엔이 짧게 명령했다.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레이첼 후작 부인이 사부작사부작 걸어와 로비엔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로비엔이 앉은 자리에서는 측면, 로잘린이 앉은 자리에서는 정면이었다.
“오늘 그대를 부른 것은.”
“…….”
“물을 것은 묻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싶어섭니다.”
로비엔이 담담한 목소리로 오늘의 만남을 청한 이유를 설명했다. 짧은 시간에 고된 일을 겪은 레이첼 후작 부인은 다소 지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묻고 싶은 게 많은 쪽은 내 쪽이겠지만, 당신 역시 정리는 필요할 테니까.”
로잘린의 시선이 기민하게 로비엔과 레이첼 후작 부인을 살폈다. 로비엔은 로잘린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냉정한 태도였고, 레이첼 후작 부인은 무언가를 예감한 사람처럼 그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기만 했다.
“왜 나를 낳자마자 선왕비에게 보냈습니까?”
레이첼 후작 부인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로비엔을 응시했다. 낳자마자 버렸다는 말을 내뱉는 그의 속내가 얼마나 쓰릴까를 생각한 것이었으나, 로비엔은 담담해 보였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선왕비 줄리 피베체가 벌인 일과, 그저 휩쓸려 갔던 과거의 나날들을.
숨겨 두었던 연인 로네 비에트의 존재를 줄리에게 들킨 앨런은 뻔뻔해졌다. 그는 로네 비에트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모두에게 드러냈다. 왕과 왕비가 천년의 사랑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잠깐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본래 사내가 그런 것이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로네 비에트의 기반 마련을 위해 궁 안에서 티파티를 열어 준 것은 눈총을 받았다. 정부에게 눈이 멀어도 정도껏 할 것이지. 정부의 티파티를, 그의 비가 눈 뜨고 있는 궁 안에서 벌이다니?
‘어서 오세요.’
하지만 간 크게도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로네 비에트의 이름으로 왔지만, 왕의 초대장이나 다름없는 초대장을 받아 든 귀부인들이 한숨을 쉬며 로네 비에트의 티파티에 참석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로네도 식은땀을 흘리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침묵과 불편함이 오가는 티파티에 줄리가 등장한 건 바로 그때였다.
‘다들 오랜만에 보는군요.’
모두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나 왕비에게 미움이라도 살까, 다들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괜찮으신지요.’
‘걱정해 준 덕분에 무척 건강해요.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도 온 것이고.’
줄리가 웃는 낯으로 로네에게 시선을 두었다. 로네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가, 제가 호스트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 궁 안에서 열리는 티타임이라면 내게도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겠지요?’
궁의 주인이 그녀인데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을까. 왕의 회의라고 하여도 줄리는 박차고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
로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였다. 티타임을 연 자가 자리를 잃고 서게 된 것이다.
‘왕비께 차를 한 잔 내어드리겠어요?’
로네의 명령에 하녀가 원래 있던 찻잔을 치우고, 왕비 앞에 새로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로네는 여전히 그 옆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었다.
‘다들 어서 의자 하나를 새로 가져오지 않고 무엇 하는 거니? 내게 다시 나가라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 계속 세워 둘 수가 있어.’
줄리가 로네를 향해 턱짓하며 하녀들에게 명령했다. 멍청하게 서서 눈치를 살피던 하녀들이 허둥지둥 달려 나간 뒤에야 줄리가 로네를 향해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내가 기어이 한 자리를 차지해서 불쾌하지요?’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로네가 황급히 부정했다. 그러나 줄리는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줄리의 말에 다른 귀부인들의 눈에 로네를 향한 적대감이 비쳤다. 감히 왕의 반려인 왕비에게 정부 따위가.
기껏 사교계에 제대로 데뷔하지도 못한 로네를 돕겠다고 왕이 마련해 준 자리인데, 갑자기 나타난 줄리가 뒤집어엎어 버린 것이다.
‘미안해요. 어차피 여기서 한번 시간을 가졌는데, 내가 따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도 우스꽝스러울 듯해서 한 번에 밝히려다 보니.’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폐하?’
누군가 웃는 낯으로 물어 왔다. 로네에게는 비치지 않던 살가운 기색이었다.
‘음, 좋은 소식이긴 하지요.’
마침 하녀가 의자를 들고 와 로네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줄리는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도 끊임없이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드디어 폐하께 후사를 선물해 드릴 수 있게 되었거든요.’
줄리의 말에 로네를 제외한 모두가 반색했다.
‘세상에, 회임하신 건가요?’
모두 귀부인인 만큼, 왕의 적법한 반려가 낳는 아이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잘 알았다. 그녀들은 왕실의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며 줄리를 축하했다. 본래 주인공이었던 로네는 완전히 잊힌 지 오래였다.
그도 그럴법했다. 로네는 왕비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충격받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으니까.
너만 사랑한다, 그리 속삭이더니, 결국은 왕비와도 몸을 섞고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왕의 살 베개라는 누군가의 끔찍한 평가와 다르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되었다.
로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며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저도 임신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왕의 정부가 낳을 아이는 그래 보았자 사생아에 불과했으므로, 이 자리에서 말해 봤자 끔찍한 조롱을 받게 되리라.
‘모두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마치 주인공처럼 되어 버려서 민망하군요.’
‘어떤 파티든 폐하께서 계신다면 폐하가 주인공이시지요.’
모두가 줄리를 추켜세웠다. 줄리가 수줍은 듯 양 볼을 붉히며 웃었다.
‘이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좋겠…….’
말을 이어 가던 줄리가 불안한 눈동자로 입을 다물었다. 급히 입을 가렸으나, 격한 기침이 튀어나왔다.
‘폐하!’
‘궁의를 불러요, 당장!’
줄리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핏물을 발견한 귀부인들이 소리를 질렀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줄리를 발견한 로네 비에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사실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궁이 발칵 뒤집혔다. 건방지게 왕의 궁에서 티타임을 연 정부와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신 후 피를 토하며 쓰러진 왕비. 심지어 왕비는 아이를 가진 몸이라고 했다. 누가 보아도 정부가 왕의 비를 해치려 한 것처럼 보인 탓이었다.
로네가 줄리를 초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중요한 반전의 요소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의 정부는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왕족 중 누군가가 아파도 그 비난의 대상이 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저는, 저는 억울해요. 저는 정말로 차에 어떤 짓도 하지 않았어요!’
‘로네.’
‘애초에 그 자리에 올 줄도 몰랐던 사람의 차에 어떻게 독을 탈 수가 있어요!’
정말로 왕비가 마신 차에 어떠한 짓도 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로네는 오열하며 매달렸다. 어떠한 증거를 찾아 제시하는 대신, 그저 억울함에만 매달리는 순진함.
물론 연인인 앨런은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모두가 로네를 믿지 않았다. 게다가 비에트 자작가는 어떠한 도움을 제공할 만큼 괜찮은 집안이 아니었다.
왕의 아이를 복중에 품은 채 죽게 생긴 판이었다. 그러나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장 왕비를 시해하려 한 범인을 사형하라는 피베체 공작가의 전방위적인 압박을 막는 게 최선이었다.
‘왕비가 의식을 찾을 때까지만 버티렴. 응?’
앨런은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우는 제 연인을 끌어안고 그렇게 달랬다. 줄리에게야 그처럼 잔인했지만, 그에게 유일한 첫 번째 순정은 로네 비에트였으므로.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로네와 앨런은 줄리가 의식을 찾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왕비가 눈을 떴단다.’
그리하여 마침내 줄리가 의식을 찾은 날, 로네는 순진하게도 이제 제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로네를 붙잡은 앨런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왜요? 무슨 일이 또 생겼나요?’
로네의 물음에 앨런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간수도 물린 지하 감옥 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왕비의 자작극이야.’
‘그럼 저는 무죄가 맞잖아요!’
로네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르자 앨런이 얼굴을 구겼다. 말이야 맞다. 하지만 줄리는 자신의 자작극이라 입 밖으로 내뱉어 인정한 적이 없었다. 줄리에게 차를 가져다준 하녀는 여전히 로네의 사주를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를 옭아맬 증거가 없어.’
‘어쨌거나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 나갈래요.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앨런. 네?’
로네는 더럽고 지저분한 감옥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당신과 나의 소중한 아이가 이런 곳에서 계속 머무를 수는 없지 않으냐고.
‘왕비가 네 목숨을 살려 줄 테니, 협상을 하자고 했어.’
‘……무슨 협상이요?’
로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