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모든 일은 끝났다. 남은 것은 쿠키의 부스러기 같은 잔재들을 정리하는 일뿐이었다.
피베체, 카를로스, 리만 가문의 영지와 모든 이권은 왕실에 귀속되었다. 보가트 가문에서 사들였던 땅과 각종 재산 역시 왕의 것이 되었다. 그중 보가트 상단은 왕비인 로잘린에게 주어졌다.
왕인 로비엔은 상단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지나치게 바빴다. 그리고 로잘린은 이제 로비엔을 제외한 왕가의 유일한 일원이었을 뿐 아니라, 본래 보가트 상단의 후계였다는 적절한 이유가 있었다.
덕분에 칼라브리아 왕가는 전에 없이 부유해졌다. 로잘린과의 혼인으로 왕실의 빚은 청산한 지 오래였고, 세 개의 귀족 가문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모두 흡수했다. 보가트 상단의 막대한 재산 역시 왕실의 재산이 되었다.
그러나 외견상 더없는 부흥기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왕궁 내외부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사용인들은 어쩐지 가라앉은 것 같은 왕의 눈치를 살피느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깔끔한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궁 밖에서는 여전히 왕가에 항의하는 시위가 종종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로잘린은 사용인들처럼 로비엔의 눈치를 봐야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로비엔의 저조한 기분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알아, 같이 예민해졌다.
“……?”
잠에 취한 상태에서 습관처럼 옆자리를 더듬던 로잘린이 눈을 떴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제법 된 듯, 옆자리의 시트 위가 서늘했다.
로잘린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흘러내리는 잠옷을 끌어 올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린 끝에, 로잘린은 창턱에 걸터앉은 로비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아름다웠다. 이마부터 코, 입술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굴곡. 매끄러운 백금발을 따라 흐르다가 부서지는 달빛은 그를 혼신의 힘을 내어 빚어낸 조각상처럼 보이게 했다. 특히나 수심에 젖은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 방점을 찍었다.
“폐하.”
그는 고민이 있어도, 슬픔에 젖어도 아름답지만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다.
로잘린의 부름에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로비엔이 눈을 들어 올렸다.
“왜 깼어요?”
아직 잠에서 깨기에는 이른 새벽이었다. 로비엔이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침대로 다가왔다. 다가와 로잘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로비엔의 숨결에 얕은 주향이 섞여 있었다.
“더 자요. 아직 깨기엔 이른 시간이에요.”
“폐하께서 제대로 주무시질 못하는데 어떻게 혼자 숙면하겠어요?”
로잘린이 제 이마를 덧그리듯 쓰다듬는 로비엔의 손을 붙잡아 끌어 내렸다.
“그냥 마음이 복잡해서 그래요.”
“선왕비 때문인가요?”
로잘린이 짐작하던 원인을 물었다. 로비엔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도 피해자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앨런 3세가 왕의 권력을 탐내지 않았더라면 줄리 피베체를 만나고 결혼까지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줄리 피베체가 이토록 오랜 시간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라고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고, 죽이는 것에 몰두하고 싶었을까.
“나는 이제 잘 모르겠어요.”
밉지만 사랑했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원망스러웠다. 줄리 피베체가 로비엔이 자라는 내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피해자는 맞아요. 저였어도 복수하고 싶었을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로잘린은 그저 그의 얼굴에 흐릿하게 어리는 슬픔의 기색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당신이라는 피해자를 새로이 만들어 냄으로써, 그녀는 더는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게 되었고.”
“…….”
“죄책감은 폐하의 몫이 아니라 생각하지만, 생각은 폐하의 몫이니 덧붙이지 않을게요.”
로잘린이 부드러이 속삭였다.
“다녀오세요.”
“……로잘린.”
“선왕비의 처형 장소에 다녀오고 싶으셨던 거잖아요.”
선왕비의 처형 집행일이 잡힌 순간부터 때때로 기묘한 침묵에 잠기던 로비엔을 알고 있었다. 이전처럼 사랑하지는 않는다 해도, 선왕비만을 가엾은 어머니라 받아들이는 마음이 줄곧 날카롭게 그를 찌르고 있었다는 것도.
“그녀를 어머니라 생각하는 당신이 잘못된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러니 그녀의 마지막 모습 정도는 지켜보고 싶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차례로 리만 후작, 카를로스 백작, 피베체 공작, 왕제 마틴과 앨런의 사행이 집행되었다. 하루에 한 명씩 처형될 때마다 그들의 사형을 구경하는 군중들이 늘어 갔다. 처형일이 뒤로 잡힌 자일수록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 얼굴도 본 적 없는 그 고귀하다던 왕족들. 그들이 없는 살림을 쥐어짜서라도 세금을 내어 먹여 살린 고매한 분들의 반반한 낯짝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오늘은 선왕비야?”
“그렇대.”
단두대 근처로 모여든 사람들이 각기의 대화로 웅성거렸다.
“선왕이 원망스러웠으면 거기서 끝내면 되지, 왜 아들까지 해치려고 해서 결국 다 말아먹었을까.”
“그러게나 말이야.”
대부분은 선왕비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누군가는 왕이 정부를 둘 수도 있지 뭘 그리 예민하게 반응했냐고 했고, 누군가는 왕이 원망스러웠어도 거기서 끝냈어야지 왜 아들까지 해치려 했냐고 했다.
선왕비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감옥에서 끌려 나와 단두대의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는 짧고도 긴 시간. 선왕비 역시 그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니 근데, 나이가 몇인데 저 얼굴이야?”
“아가씨라고 해도 믿겠어.”
“우리 세금을 얼굴에 처바르고 살기라도 한 거야?”
종종 군중들의 분노는 그들의 세금으로 미모를 가꿔 온 선왕비에게로 향하기도 했다.
적어도 외형은 돈을 처바른 덕분에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죽기 직전에 굳이 해명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선왕비가 단두대의 단상 위에 두 발을 완전히 디뎠다. 흐트러진 머리와 옷차림은 죄인으로서 적합했지만, 기이하도록 맑은 눈빛과 아름다운 얼굴은 죄인 같지 않았다. 오히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선왕비를 좀 더 말갛게 보이도록 했다.
“마녀 아냐?”
군중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성한 아들을 셋이나 둔 여자인데, 어째서 저런 젊은 외형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냐는 듯이.
선왕비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자 마음이 편안했다. 억지로 웃을 필요도, 앞과 뒤가 다르게 굴 필요도, 진짜 얼굴을 숨겨야 할 필요도 없었으므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습니까?”
커다란 칼날 앞에 멈추어 선 선왕비를 향해 사형 집행자가 물었다.
선왕비가 몸을 반쯤 틀어 사람들 너머를 바라보았다. 군중들 사이, 얼굴을 대부분 가렸는데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모를 리 없는 외형이었다.
“…….”
로비엔. 이제는 왕이 되어 버렸지만, 과거에는 모두가 그녀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스러운 왕자님.
‘어차피 마지막이니 전부 사실대로 말해 주십시오.’
사형 집행일이 결정된 날, 감옥으로 찾아온 로비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무엇을?’
‘선왕과 당신, 그리고 레이첼 후작 부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나를 그토록 죽이고 싶어 했는지.’
상처받은 기색은 없었다. 그는 그저 진실을 알고자 했다.
어차피 자신에게 뒤집을 패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고, 다 밝혀져 죽어야 하는 마당에 숨길 것도 없었다.
‘재판장에서 말한 그대로야. 네 아비는 왕위 계승에서 고려되지도 않던 3왕자였어. 그런데 어디서 왕비를 대대로 배출한 피베체 가문과 엮이면 왕이 될 수 있다는 헛소문을 들었는지 나를 찾아왔지.’
그리고 그는 계획적으로 어린 줄리 피베체를 유혹했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지속하고, 그녀의 파트너가 되어 주고,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진 척했다.
어리숙한 줄리 피베체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그의 비가 되었다. 가문의 힘을 이용하여 왕이 되고 싶다던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로네 비에트가 나타났지.’
진짜 연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보았다. 아들을 낳아 주면 줄리 피베체를 버리고 그녀를 왕비로 만들어 주겠다던 약속도 들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으나,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줄리 피베체는 살고자 했다. 어리숙한 소녀가 아니라, 그와 살을 비비는 정부에 대적할 완벽한 왕비로.
기만자 중 하나인 로네 비에트를 함정에 빠트려 헤어 나올 수 없게 하고, 그녀의 연인을 협박했다. 그들의 아이인 로비엔을 강탈하여 자신의 아이로 둔갑시켰다.
‘너를 내 아이로 빼앗아 품에 안던 날 결심했다.’
‘…….’
‘아이야, 꼭 행복해지렴.’
그녀의 작은 손아귀에도 죽을 수 있을 것처럼 작은 핏덩이를 품에 안고, 울며 웃으며 줄리 피베체는 맹세했다.
‘가장 행복할 때, 가장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마.’
꼭 행복만큼의 절망을 주리라.
말을 마치고 자신이 웃고 있었던가? 그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던 로비엔의 눈동자에 어린 감정이 분노나 슬픔이 아니었다는 것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나를 망가트리고 싶었으면서, 왜 재판장에서 사생아라 밝히지 않았습니까?’
‘로네 비에트가 살아 있었잖니. 난 그게 행복해지는 게 싫어.’
앨런과 마틴까지 반역죄로 죽고 나면 로비엔의 자리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사생아라는 게 밝혀지면 그가 숨길 것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네 비에트를 궁으로 들이고, 제 어미로 대우하며 가족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숨이 턱 막혔다.
‘로네 비에트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자식과 영광을 염원하며 살게 될 거야. 나는 그걸 원해.’
그녀는 레이첼 후작 부인이 고작 왕의 정부 따위로 역사에 남기를 바랐다. 사랑, 자식, 그리고 부도 영원히 잃은 채 떠돌기를 바랐다. 그게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로비엔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기를 포기한 이유였다.
“없소.”
선왕비가 짧게 대답했다.
로비엔의 청명한 눈동자가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련들과 고통을 이겨 내고도 원망이나 통쾌함 같은 감정은 일절 비치지 않는 맑은 눈. 억지로 잊으려 했던 까마득한 현실감이 찾아들었다.
사실 분노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로비엔의 부모를 죽였다고 생각했을 때,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멈춰지질 않았다. 그녀는 이미 키와 손이 붙어 버린 조타수였다. 항구의 모든 것을 뭉개고 부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배에 올라탄.
로잘린은 로비엔에게 죄가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로비엔이 태어난 것이 죄였다. 로비엔이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의 인생은 화마에 불타고 있었다. 도저히 로비엔을 미워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며 예쁘게 웃는 사내아이가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으려면 그토록 증오하는 것밖에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집행자가 다가와 선왕비의 가녀린 몸을 무릎 꿇리고, 그 목을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아래로 들이밀었다. 선왕비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이가 딱딱 부딪치려는 것을 의연하게 내리눌렀다. 흥분해서 역적을 죽이라 소리치는 군중들 앞, 목을 내어놓고 그저 생각했다.
만일 내가 마음 가는 대로 너를 아들로 받아들였다면 내 삶이 이토록 통한으로 가득 차지는 않았을까?
……아니, 나는 결국 이처럼 미쳐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내 손으로 네 목을 졸랐겠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시선 끝에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로비엔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진짜 죽음을 지켜볼 수는 없는 사람처럼 한번을 뒤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가는 로비엔을 바라보던 선왕비가 눈을 감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