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분노를 쏟아 내던 선왕비의 얼굴에 비치었던 흐릿한 슬픔이 곧 눈물로 뒤바뀌어 후두둑 떨어졌다. 근위병의 몸에 가로막힌 채, 선왕비는 한참이나 바동거렸다. 로비엔의 얼굴에도 숨기지 못한 괴로움이 어른거렸다.
“그래. 내가 죽였어. 내가…….”
“…….”
“저 망할 계집도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무슨 마음으로 살렸니? 너도 저것한테 끌렸니?”
선왕비가 레이첼 후작 부인을 바라보며 미친 여자처럼 울며 실소했다. 로비엔은 대답하지 않았고, 레이첼 후작 부인은 그저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
독초처럼 버티던 선왕비도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바로 뒤에 놓인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위악을 내려놓은 선왕비 역시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다.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 그대 역시 죄를 인정하는가?”
이제 재판장 안은 판사가 질문하는 소리와 침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발란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보가트 가문의 변호사인 알폰소가 인정하였고, 발란이 묵인한 것으로 그의 죄 역시 인정되었다.
“선왕 시해의 건에 대한 재판은 종료하고 판결을 내리고자 합니다.”
따라서 판사는 굳이 발란의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차게 굳은 얼굴로 손에 들린 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알폰소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그 전에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판사님.”
“무엇이지?”
이 재판을 성공적으로 끝마쳐야만 받기로 한 막대한 보수를 전부 받을 수 있다. 평소처럼 하기만 한다면, 그가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기도 했다.
“저는 왕비 폐하, 그리고 보가트 공작이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가 저지른 일을 모르고 계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알폰소가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판사는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말을 끊지 않고 경청하는 자세로 알폰소를 응시했다.
“기본적으로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와 왕비께선 앙숙 같은 사이였습니다.”
“그것을 어찌 알지?”
“누이인 린데만 부인이 증언했습니다.”
알폰소가 리리엔이 앉은 방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판사가 리리엔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포함해서 셋은 늘 마주치면 싸우고 할퀴는 말을 했습니다. 발란은 왕비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어요.”
“서로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사이라 해도, 목적이 일치하면 협조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이 바로 제가 말하고 싶은 지점입니다. 선왕 시해의 진범은 선왕비와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국왕 내외를 해하려 했지요.”
만일 로비엔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 로잘린이 진범들과 짜고 선왕을 시해했다면, 각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로비엔은 왕의 대행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였으므로 양위를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당시 선왕비는 선왕을 죽여 복수할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발란은 다시 상단의 후계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발란이 차기 상단주의 이권을 가지고 싶었다면, 자신의 목적을 견제할 로잘린을 왕자비에서 왕비로 만들어 줄 이유가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녀의 힘과 영향력을 강화한다면, 상단을 되찾으려는 그의 목적과는 더욱 멀어질 텐데.
“내가 얘기해도 되겠나?”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로비엔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알폰소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쐐기를 박기 위해서였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판사가 정중하게 로비엔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저들은 사냥을 빙자하여 나를 죽이려 했다. 그때 보가트 공작은 역적들로부터 나를 구하기 위해 사냥터로 사병들을 이끌고 왔어. 만일 아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공작 역시 알고 있었다면, 나를 구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아.”
“…….”
“비와 보가트 공작 모두 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들이고, 이들이 가문의 일원 중 한 명이 부린 망동에 휩쓸려 가기를 원치 않는다.”
로비엔이 담담히 로잘린과 드마셸을 옹호했다.
피베체 공작은 희게 뜬 낯으로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로비엔이 재판장에 친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판결을 강요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왕께서도 보가트 공작의 공로를 높이 사고 처분을 원치 않으시기에, 판사님의 판결에 호의를 구하고자 합니다.”
“말하게.”
“일반 살인에 형벌을 내리는 경우, 당사자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무죄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보가트 가문 전체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닌, 단 한 사람에게만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왕정 사회에서는 재판에서 왕의 의견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형벌의 수준 역시 이해 가능했다. 정확한 기준이 되는 법전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욱 그러했다.
법관, 그러니까 판사라는 권위 있는 제삼자의 입을 통해 판결을 내리는 이유야 빤했다. 왕이 다 알면서도 보가트 가문의 일에만 눈을 감았다는 항의와 논란을 원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판사들이야 정해진 결론을 읊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겉보기에는 왕이 법관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그 뜻밖의 영광을 거부할 리 만무했다.
“말도 안 됩니다!”
카를로스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선왕 시해에 관여한 것이 사실일진대, 어찌하여 저들에게만 특혜를 제공한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보가트 공작이 그대들로부터 나를 구한 공은 어떻게 보상해야 하지?”
“…….”
“엄밀히 따지자면 공작은 공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만 받는 것과 같아.”
로비엔이 단호한 목소리로 카를로스 백작의 항의를 끊었다.
판사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객관적인 처분을 위해 왕께서 오로지 제게 결단을 맡겨 주셨음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조용한 공간, 모두의 시선이 중앙의 판사에게로 쏠렸다.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던 로잘린의 얼굴에도 미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과와 공이 명백히 밝혀진바, 거짓된 논리로 왕을 해하려 한 피베체, 카를로스, 리만 가문은 작위를 박탈하고, 그들이 가졌던 모든 권리는 왕실에 반납된다.”
역당들의 정당성은 훼손되었다. 애초에 역당들이 정당성을 주장했다 한들, 왕의 암살 시도가 실패했을 때부터 이미 이 재판은 그들이 승리할 수 없는 게임이기도 했다.
“또한, 선왕비 줄리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와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를 포함한 주동자, 그리고 위증한 게리 바트만은 예외 없이 사형에 처한다.”
“…….”
“다만 보가트 가문의 경우, 보가트 공작이 사건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고, 반역으로부터 왕을 구한 공로를 높이 사야 할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예외를 두고자 한다. 연좌제로 처벌하지 않으며 가문의 명맥만은 남긴다. 하지만 차기 가주가 될 자식을 관리하지 못한 죄가 가볍지 않은바, 보가트 가문의 모든 재산은 마땅히 왕실에 귀속되어야 한다.”
담담하게 판결을 내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선왕비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허탈한 듯, 우스운 듯, 지친 듯.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선왕비는 한참이나 어깨를 떨었다.
“왕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 왕이 되었는데, 그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구나.”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흐릿한 목소리였으나 로잘린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선왕비에게 시선을 두었으나, 선왕비의 시선은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가 있었다.
“로네 비에트를 살려 뒀어. 로네 비에트를…….”
이내 재판장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이 역적들을 붙잡아 세웠다. 이미 반역이 실패한 때부터 예견했던 일이었으면서도,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이들이 줄줄이 끌려 나갔다.
선왕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근위병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서 일어선 선왕비가 막 자리에서 일어난 로비엔과 로잘린을 돌아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잠잠한 목소리. 로비엔이 선왕비를 끌고 나가려던 근위병들을 멈춰 세운 뒤 그렇게 물었다.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는지 더듬어 보듯 한참이나 로비엔의 면면을 살피던 선왕비가 피식 웃었다.
“네가 이겼어.”
“…….”
“하지만 난 누구도 행복하지 않길 바랐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다. 선왕과 관련된 모두가 죽어 없어졌으면 했어. 로네 비에트,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 그리고 두 왕자 모두. 하지만 평생을 별러 온 일이 실패했구나.”
선왕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끌려서 등 뒤를 스쳐 지나가던 제 아들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래도 아예 실패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
“네겐 영원히 사랑과 믿음에 대한 공포가 남을 거야. 멀쩡한 부모도 없을 테고, 네 자리가 아닌 것을 차지했다는 죄책감도 남겠지. 그러라고 너를 그리 착하게 키웠으니까.”
레이첼 후작 부인과 로비엔의 관계를 밝히지 않은 것은 그녀가 베푸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의이면서, 동시에 복수였다.
“평생을 행복하지만 불안하게 살아 다오.”
선왕비가 저주의 말을 쏟아 내며 환하게 웃었다. 앨런 3세의 비가 되기 전에나 지어 보았던, 진심이 섞인 낯선 웃음이었다.
로잘린은 경악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마지막까지 더러운 감정을 토해 내는 선왕비를 보았으나, 로비엔은 담담했다. 그저 손짓으로 근위병들에게 선왕비를 끌고 가라 명령할 뿐이었다.
“폐하.”
그 순간, 판사가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선왕비에게 향해 있었다. 남편으로도 모자라 제 배로 낳은 그의 자식까지 모두 죽이려던 선왕비의 깊은 증오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로잘린은 그것이 정부의 존재 하나로 미쳐 버린 선왕비가 한심하다는 기색임을 알았다.
“오늘의 재판을 담당할 수 있게 되어 몹시 영광이었습니다.”
가발을 벗어 든 판사가 깊숙이 허리를 숙여 로비엔에게 인사했다.
“그대의 명석한 판단에 감사해.”
로비엔은 짧게 대답한 후 로잘린과 함께 돌아섰다.
로잘린이 알폰소에게 대충 손 인사를 한 후 로비엔의 에스코트를 받아 걸으며 물었다.
“왜 법관에게 판결을 맡기셨어요?”
어차피 왕은 친림재판에서 법관에게 명령을 내려 판결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모습으로 무대를 꾸민 것은 로잘린에게 의문으로 남았다.
로잘린이 궁금증 어린 시선으로 로비엔을 올려다보았다. 열린 문을 넘어서기 전 멈추어 선 걸음이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법원은 선왕 때부터 재판의 독립을 주장해 왔어요. 왕의 결정에 자주 반기를 들었고, 만일 왕이 고집을 부린다면 그 결정과 관련된 비리나 부정을 외부로 알려 꺾으려 들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손아귀에 틀어쥐기에는 늦어 버린 집단이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을 주고 그가 바라는 것을 취하자고 생각했다.
“이 재판을 오롯이 판사에게 맡겼다는 건, 법관들의 고유권을 존중한다는 뜻과 같아요.”
물론 지금은 단 한 번의 예외에 불과하지만, 오늘의 재판은 이후 왕으로부터 내려온 판결을 거부하고, 사법권의 고유한 권한과 독립성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 예외는 왕의 권력을 견제하는 데 두고두고 회자될 무엇이었다.
“그만큼 왕의 권력이 약해질 수도 있어요.”
괜찮겠냐고 묻는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로비엔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듯이.
“괜찮아요. 그러길 바라고 한 일이니까.”
그것이 명백한 그의 의지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