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왕세자가 사고로 죽고, 아끼던 장자를 잃은 왕이 끝내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그게 세간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물론 진실은 소문과는 다소 달랐다. 왕세자는 조작된 사고로 죽었고, 왕은 새로운 왕세자의 손에 죽었다.
그러나 사실이 어찌 되었건 3왕자였던 앨런은 왕세자가, 그리고 끝내 왕이 되었다. 왕위와는 상관없던 3왕자가 왕관을 쓰게 된 것이다.
자연히 줄리도 칼라브리아의 왕비가 되었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어요, 아버지.”
마침내 즉위식을 마치고, 왕과 함께 왕비의 관을 쓴 줄리를 보며 피베체 공작 역시 흐뭇한 얼굴이었다.
“한데 오라버니께선…….”
“그 녀석이라면 말도 마십시오.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더군요.”
피베체 공작이 혀를 찼다.
그날, 줄리에게 경고한 것이 진심이었는지 마뉴트는 즉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제게 아직도 마음이 상하셨나 봐요.”
“폐하께 마음 상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뭔가 수틀린 모양이지요.”
피베체 공작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줄리의 손등을 다독여 주었다. 어릴 때는 그처럼 아비의 속을 뒤집어 놓더니, 결국은 그의 뜻대로 왕비가 되어 준 자신의 딸이 무척이나 기특하다는 듯이.
줄리 역시 그 뜻을 알아, 억지로라도 조금 웃어 주었다.
“그래도 오라버니께 제가 꼭 한번 뵙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곧 마음 풀고 전하를 뵈러 올 겁니다.”
피베체 공작이 그리 인사하며 떠났다.
그러나 피베체 공작이 떠나고도 줄리는 헛헛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잘한 일이 없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제 오라비는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짐작과는 달리 궁에 들어와 앨런과 아버지인 피베체 공작의 마음은 샀지만, 당연했던 마뉴트의 귀애는 사라져 버렸다. 그게 못내 서운하고 슬펐다.
“폐하께선 무얼 하고 계실까?”
“아마 여러 가문의 수장들을 알현하느라 바쁘실 겁니다.”
라비앵 클로티가 부드러이 대답했다. 열댓 살부터 친우로 함께 자란 라비앵 클로티를 최근 궁으로 들여 제 시녀로 삼았다. 곧 혼인할 것임을 알면서도 라비앵을 궁 안으로 들인 것은 순전한 선의였다. 그녀 가문의 격을 더욱 높여 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렇겠지. 오라버니를 계속 보지 못하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아.”
라비앵이 안타까운 눈으로 줄리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줄리가 제 오라비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눈으로 본 바가 있었고, 그 서운함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저녁에 폐하와 같이 식사를 하고 싶어. 사람을 보내어 그리 전달해 주렴.”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라비앵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녀는 마뉴트와 소원해진 줄리가 궁 안에서 기대고 싶으며,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은 그 밤, 순순히 줄리를 찾았다. 같이 식사를 하고, 늘 그랬듯 잠자리를 공유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왕비가 된 지 한 달이 조금 못 된 시간. 줄리는 이상하게 초조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모든 게 평소와 다름없는데, 궁 역시 특별한 소란 없이 고요하기 짝이 없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마음이 어지러운지 몰라서 더 무서웠다.
“폐하께 티타임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물어봐 줘.”
“예, 폐하.”
그 불안함을 극복하고 싶었다. 평생을 살아갈 궁 안에서 이토록 불안하게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앨런은 무척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왕이니 바쁘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이전의 앨런은 아무리 바빠도, 줄리가 보고 싶다고 하면 한달음에 달려오던 사람이었다.
“폐하께서 왕이 된다는 것이 이처럼 별로인 일인 줄 몰랐어.”
하지만 맡은 바가 있는 사람에게 어째서 자신만을 보며 살지 못하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걸 아는 줄리가 서글프게 웃고, 라비앵은 다소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산책이라도 나설까 봐.”
“모시겠습니다.”
라비앵이 서둘러 산책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봄바람에 양산을 쓴 채 산책로를 거닐던 줄리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폐하께 갈까?”
“예? 갑자기 말씀도 없이 가면 놀라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얼굴을 본 지가 제법 되었어. 놀라긴 해도, 좋아하실 거야.”
줄리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아이처럼 웃었다. 오랜만에 주인이 보이는 웃음에 라비앵 역시 만류할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사실 라비앵 역시 늘 줄리에게 붙어 그녀를 위로하고 말 상대가 되어 주느라 안팎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하면 가실까요.”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을 목격할 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막았을 것이다. 맹세할 수 있었다.
“뭐? 아직도 그 정부랑 계신다고?”
들려오는 소리에 비밀스럽게 왕의 궁으로 접근하던 줄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라비앵이 동그랗게 눈을 뜨는 것을 발견하고도, 줄리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자신의 뒤를 따르던 모든 이들의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긴 회랑을 타박타박 걷는 소리와 함께, 아직 줄리를 발견하지 못한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푹 빠지셨던걸. 일도 마다하고 그 정부하고만 붙어 계시니까.”
왕의 정부에 대해 쑥덕거리던 이들이 입을 다문 것은 희게 질린 줄리를 마주치고 난 후였다. 히익, 놀란 소리와 함께 하녀들이 서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뭐라고 했니?”
줄리의 물음에 하녀들이 오들오들 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 발짝 가까워지는 걸음에 하녀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흴 해치겠다는 게 아니야. 방금 말한 걸 그대로 읊어 보라는 거지.”
“…….”
“물론 거짓으로 폐하를 모함하고자 한다면 그 목을 베어 줄 테지만.”
서늘하게 식은 어린 왕비의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무표정했다. 하녀들이 달달 떨며, 그간 왕이 입막음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얼마 전에 정부를 데려오셨습니다. 한미한 자작가의 여인이지만, 그 미색이 무척 고와서 폐하께서 계속 끼고 계신다고…….”
그는 자신을 위해 제 아비도 죽인 자였다. 고작 다른 여자에게 눈이 팔려 자신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었다.
줄리의 걸음이 그가 정부와 함께 있다는 뜰로 점차 가까워졌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폐하, 간지러워요.”
“이 정도쯤은 참으렴. 계속 이러고 싶은 것을 참은 게 얼마나 되었는지 아느냐?”
키득거리며 투정 부리는 여자의 목소리와 세상 귀여운 것을 본다는 듯 귀애하는 사내의 목소리. 사내의 목소리는 줄리의 귀에도 무척이나 익숙했다. 그럴 수밖에. 사랑해 마지않던 그녀의 하나뿐인 남편, 앨런이었으니까.
따뜻하게 느껴지던 봄바람이 그늘에 들어서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자연히 몸도 마음도 식어 내렸다.
“…….”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연인은 무척이나 살갑고 다정했다. 여자는 앨런의 품에 기대어 아양을 부리고, 앨런은 그 앳된 여자의 얼굴에 몇 번이고 입맞춤하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그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이고, 몸은 섞어도 어쩐지 피하는 것 같았던 입술도 몇 번이고 부딪쳐 주었다.
“믿지 않아요. 제게 찾아오시지 않는 동안 결혼을 하셨잖아요.”
“마음이 있어 한 결혼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잖니.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너뿐이야, 로네.”
“거짓말.”
“진실이다. 네가 낳을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기필코 그 아이를 왕세자로 만들고, 너를 왕비로 만들어 줄 거야. 약조하마.”
분노인가, 슬픔인가? 종류를 알 수 없는 진창 같은 감정이 줄리를 빨아들였다. 어떠한 얼굴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울고도 싶었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그들을 갈라놓고 싶기도 했다.
“줄리 피베체는, 그저 왕이 되기 위해 이용했을 뿐이다.”
줄리를 등지고 앉은 앨런은 기사들이 그의 입을 막고 싶어 한다는 것도 모른 채 주절거렸다.
“통속 소설에 눈이 멀어 그렇게 사랑 타령을 해 댄다더니, 그렇게 순진하더구나. 덕분에 일이야 잘 풀리기는 하였어. 그 무뢰배들을 내가 돈을 주고 부린 것인지도 모르더구나.”
줄리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나를 이용하였던가?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하릴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왕을 호위하는 기사들의 가엾어하는 시선이 남편의 배신을 깨달은 줄리 위로 내려앉았다.
줄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자박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를 의아하게 여긴 앨런이 고개를 돌렸다.
“……!”
눈물로 함빡 젖은 줄리와 시선이 마주친 앨런이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아랫것들에게 절대로 로네 비에트의 존재를 들키지 말라 경고한 바가 있었던 만큼, 줄리가 갑작스레 나타날 것을 예상치 못했다.
“줄리.”
“이 계집은 누구입니까?”
줄리의 물음에 앨런이 당황한 표정을 금세 숨기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미 보았다시피, 내 여인입니다.”
“폐하의 연인이라고요?”
줄리가 헛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일부일처제의 사회에서, 제 아내를 눈앞에 두고 연인이라는 말을 지껄이다니. 믿기지 않았다.
“로네. 잠깐 자리를 비켜 주렴.”
앨런이 다정하게 명령했다. 로네라 불린 여자는 눈치를 보다가 묵례를 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그 장소에 남은 것은 줄리와 앨런, 그리고 멀찍이 지켜 선 기사들뿐이었다.
“정부를 두는 것쯤이야, 그대도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진실한 아내라 생각하는 건 아니시고요?”
“줄리.”
“아이를 낳으면 저것에게 왕비 자리를 주겠다 하지 않으셨나요?”
앨런의 얼굴에 잠시 난처함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는 대충 묻어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거짓으로 꾸며낸 다정함을 완벽히 걷어 낸 앨런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서렸다.
“모른 척하고 있었으면 한동안은 편안할 것을 굳이 들쑤시다니.”
“…….”
“늘 그랬듯,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레이디처럼 계시면 오죽 좋았을까.”
난생처음 보는 싸늘한 얼굴이 줄리를 낯설게 응시하고 있었다.
“로네 비에트는 그대를 만나기 전부터 내 연인이었고, 지금은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연해졌다. 이제 줄리는 자신이 듣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저 간신히 의식의 끈을 붙잡고 이것이 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나는 로네를 왕비로 만들어 줄 계획입니다. 내 첫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이 부정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고장 난 것처럼 쏟아지는 눈물에 눈앞이 흐려졌다. 세상이 비틀리고, 얼룩지고, 흔들렸다.
“좋아한다고…….”
“…….”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그저 이 모든 일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재수 없는 꿈을 꾸고 일어난 것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줄리가 울먹거리며 내뱉은 말에 앨런이 피식, 줄리를 비웃었다.
“그래. 당신을 가지면 얻을 수 있는 왕의 자리를 사랑했지. 지금도 사랑해.”
그가 사랑한 것은 단 한 번도, 줄리 피베체였던 적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