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추문이 수도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3왕자인 앨런과 왕세자비로 내정되었던 줄리가 교당에서 왕의 허락도 없이 약혼을 치렀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왕세자도 고개를 들 수 없어졌다. 그는 자신까지 말려든 수치스러운 추문에 이를 악물었다.
“제정신이냐, 앨런?”
“형님.”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알아?”
왕세자는 앨런을 불러 그의 잘못을 비난했으나, 앨런은 반성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사랑은 죄가 아니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해 이야기할 뿐이었다.
속이 뒤집히는 건 왕세자 혼자뿐이었다. 이복형제도 아니고 동복형제니 왕과 왕비 모두 앨런에게 물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새로운 혼처를 찾는 게 낫지 않겠냐며 왕세자를 설득하기까지 했다.
“왕세자는 접니다. 앨런이 아니라! 양보한다면 아랫사람인 앨런이 해야지 어째서 제가 한단 말입니까?”
고작 얼굴 몇 번 마주쳤던 줄리 피베체는 둘째 치고, 그의 위명을 엉망으로 만든 것이 형제라는 것이 믿기지 않아 화가 났다. 늘 담담하던 왕세자가 크게 화를 내자 국왕 내외도 난감해했다.
“네가 화가 크게 났다는 건 알겠다. 이 아비도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고심할 테니, 머리라도 좀 식히다 오렴.”
그들도 골치가 아플 일이었다. 고작 사랑에 눈이 먼 3왕자나 자존심을 굽히기 싫어하는 왕세자나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왕은 상황을 정리할 요량으로 왕세자는 사냥터로 보내고, 3왕자는 궁 깊숙한 곳에 머물도록 명하고 외출을 금했다. 줄리 피베체와의 만남은 당연히 금지되었다.
“총을 가져와.”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존심 싸움이었다. 분기가 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왕세자는 독한 술을 마신 채로 사냥터로 향했다.
“여기 있습니다.”
흉흉한 왕세자의 기세를 말리지 못한 아랫것들이 넙죽 엎드렸다. 왕세자는 총을 받아 들고 화약을 장전했다. 멀찍이서 펄쩍 뛰는 토끼를 발견한 왕세자가 망설이지 않고 총구를 당겼다.
“……왕세자 전하!”
그러나 발포음과 동시에 나가떨어진 건, 토끼가 아니었다.
왕세자가 죽었다.
“이렇게 된 거, 3왕자를 왕세자로 추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총기를 사용할 때 종종 있는 총기 사고였다. 화약이 총구로 발포되지 않고 그 안에서 터져 버려, 왕세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나쁘지 않은 소리구나. 이미 줄리도 소문 때문에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낼 수도 없으니…….”
피베체 공작이 마뉴트의 의견에 동의했다. 어차피 왕세자 밑으로는 세력이 다 그만그만했다. 순서대로 2왕자를 추대하려는 세력이 있기는 했지만, 피베체 공작이 3왕자인 앨런을 받친다면 말이 또 달라지는 법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된다면 줄리는 예정대로 왕세자비가 되고, 왕비가 될 테니 말이다.”
피베체 공작이 고개를 주억였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줄리가 혼인할 대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줄리가 왕세자비가 되고 왕비가 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철없게 사랑 타령을 하던 딸도 치우면서 권력도 동시에 추구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었다.
마뉴트는 제 의견에 동조하는 아비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께서 아버지를 설득해 주세요.’
‘줄리.’
‘어차피 왕세자는 죽었어요. 누군가는 왕세자가 되어야 하고, 그게 앨런이라면 아버지께서도 이 혼인을 더는 반대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사랑 타령만 하던 순진한 아이가 언제 이렇게 뒷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던가? 의문은 있었으나, 그 답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저 생각하기에 앨런이 영향을 미쳤고, 그게 좋은 방향은 아니라는 것뿐.
“오라버니. 어떻게 되었어요?”
“네 말대로 되었다.”
제 아비와의 대화를 마친 마뉴트가 서재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줄리가 매달려 질문했다. 마뉴트는 순순히 긍정적인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제야 줄리가 환하게 웃었다.
“2왕자 곁에 지지 세력이 마땅치 않으니, 큰 이변이 없는 한 3왕자가 왕세자가 되겠지.”
“다행이에요.”
줄리는 다행이라 말했으나, 마뉴트는 이것이 다행인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감은 앨런과 줄리를 자꾸만 떨어뜨려 놓고 싶어 했다.
“줄리, 정말로 3왕자 전하와 혼인할 생각이냐?”
“그렇지 않으면 제가 뭐 하러 3왕자 전하를 왕세자로 만들려고 하겠어요?”
“줄리,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왕세자께서 저를 놓아주시기만 했어도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겠지만…….”
마뉴트가 멈칫하며 물었다. 사랑스러운 동생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줄리, 너 방금 뭐라고 했니?”
“모르는 척하세요.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줄리!”
이 애가, 순진하기 짝이 없다고만 생각했던 이 어린애가 왕세자를 죽였다. 그 사실을 확인받는 순간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총기 오발 사고는 자주 있는 사고잖아요. 그러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요.”
마뉴트가 희게 질린 얼굴로 줄리를 내려다보았다. 늘 다정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반짝이던 푸른 눈동자에 어느 순간 들어찬 것은 무겁고 질척한 감정이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니?”
“알아요. 평생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갈 거예요.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어요.”
마뉴트의 눈동자에 경멸이 어렸다. 아무리 어린 제 동생이라고 해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할 짓이 아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3왕자를 왕세자로 만들어 주마.”
“…….”
“여기까지 온 이상 한배를 탄 것과 같아 모른 척할 수 없으니, 나는 딱 그것까지만 하마. 이 이상 내게 어떠한 것도 기대지 마.”
마뉴트는 숨기지 않고 제 감정을 드러냈다. 줄리가 아차 하는 얼굴로 마뉴트를 붙잡았으나, 그는 맵차게 손을 떨쳐 냈다.
“오라버니.”
줄리가 울먹이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으나 그 역시 매정히 외면했다.
제가 알던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에 끔찍해지고, 줄리를 이렇게 만든 앨런이 끔찍하도록 증오스러웠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바니 앨런과 탈 없이 혼인하기를 바랐다가도, 앨런과 갈라서기를 바랐다.
그러나 마뉴트가 바라는 바가 무엇이든, 상황은 매끄럽게 빚어진 길로 내달렸다. 피베체 공작의 지원을 무기 삼아, 3왕자 세력은 승승장구했다. 결국 2왕자의 세를 꺾은 앨런이 왕세자가 되었다. 왕이 3왕자 앨런을 왕세자로 인정하겠다는 명령을 내리고, 법원이 그를 공표했다.
“전하!”
줄리가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것을 발견한 앨런이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 품에 폭삭 안긴 줄리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교사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무해한 웃음이었다.
“이제 정말 왕세자 전하가 되셨네요.”
줄리의 말에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줄리의 이마에 몇 번이고 입맞춤을 남기며,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궁인들 역시 기분 좋게 웃으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 그대 덕분이에요.”
앨런이 보드라운 줄리의 볼에 제 얼굴을 비비며 속삭였다. 줄리가 뿌듯한 듯,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앨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부왕께 그대와의 성혼 일정을 잡아 달라고 요청할 거예요.”
“전하.”
“이렇게 되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까.”
앨런의 부드러운 시선이 줄리를 향해 있었다. 자신을 향한 그의 애정에 한 치의 불안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줄리는 그렇게 확신했다.
“저도, 저도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줄리가 앨런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고 이야기했다. 앨런이 커다란 손으로 줄리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거절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앨런이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장난으로라도 그의 청혼을, 정식 혼담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줄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하자 앨런이 이마를 부딪쳐 왔다.
모두 줄리에게 사랑 타령 좀 하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 사랑과 권력을 다 쥔 건 줄리 피베체 자신이라는 사실이 뿌듯했다.
“전하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줄리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앨런에게 말했다. 앨런은 가만히 줄리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전하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정해진 대로 전 왕세자 전하와 혼인했을 거예요.”
“…….”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았겠죠.”
몰랐다면 모를까 알면서는 그럴 수 없었다. 저를 사랑해 주는 남자, 제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평생 살아간다는 것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충만해지고 행복해졌으니까.
“그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에요.”
줄리의 작은 손이 앨런의 턱을 간지럽게 쓰다듬었다. 앨런이 손을 들어 그런 줄리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줄리, 나 역시 그대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랫것들은 눈치껏 그들만 남겨 둔 채 자리를 비웠다. 호위를 맡은 자들만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자 앨런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줄리에게 고백해 왔다.
“당신이 내게 준 기회, 평생 잊지 않고 살 겁니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여기까지 오는 게 그리 순탄한 일은 아니었다. 정해진 혼처인 왕세자가 아닌 3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집안과 왕실의 반대를 극복하고, 3왕자를 왕세자로 만드는 일은 줄리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사교계의 전쟁에나 조금 익숙한 명문가의 아가씨일 뿐이었다.
그러나 줄리는 그 모든 일을 행했다. 왕세자를 죽였다는 죄책감 역시 늘 걸음마다 들러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사내를 위해서는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사랑이란 것은 그런 게 아니던가?
“전하.”
줄리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속삭였다. 앨런의 얼굴이 점차 내려오는가 싶더니, 곧 그의 입술이 줄리의 입술을 덮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숨결과 자신을 감싸 안는 단단한 품 안에서 줄리는 더없이 행복해졌다.
이러한 행복이 계속되기만 한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그리하여 줄리는 왕세자가 된 앨런과 성혼식을 치렀다. 미남자인 줄리의 남편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아름다웠으며, 그녀에게 성실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앨런이 왕세자가 된 이후로 왕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궁의는 왕이 왕세자를 어이없는 사고로 잃은 후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이 원인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줄리는 왕의 얼굴을 마주 볼 때마다 끝없는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자신의 죄를 추궁할 것 같은 불안함도 느꼈다.
앨런은 그런 줄리의 불안함을 어렵잖게 알아챘다.
“줄리. 부왕께선 절대 몰라요.”
“알아요, 알면서도 이상하게.”
“그러니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앨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줄리를 어르고 달랬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선명한 걱정을 발견한 줄리가 서글프게 웃었다. 이 남자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때늦은 죄책감으로 괴로운 자신이 싫었다.
“그대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불안해하니 내가 미칠 것 같아요.”
“앨런.”
“부왕께서 돌아가신다면 그대도 더는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을 텐데. 그렇지?”
앨런의 말에 줄리가 멈칫했다. 왕을 해치겠다는 뜻인가?
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줄리는 얼떨떨하게 눈만 깜빡였다.
“심약한 당신이 나를 위해 어떠한 일을 했었는지 아니까.”
앨런이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진심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몸이 떨렸다.
“앨런.”
그건 감격이었다. 그가 제 아비를 죽이겠다 하는 말에 충격받은 게 아니라, 그의 사랑에 감격했다.
“사랑해요.”
“나도요, 줄리.”
사랑이라는 것은 통속 소설에서 보았던 것보다 추악하고, 더욱 강렬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