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14)화 (114/151)

# 114.

“그날 레이첼 후작 부인께서 외출하신 것은 오로지 입궁을 위해 마차에 오르실 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똑똑히 기억하건대, 저택에 거하실 때부터 입궁하기 직전까지 맨손이었습니다.”

하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재판장 안을 맴돌았다.

“다들 늘 꾸미고 다닌다고 생각하시지만, 연회나 모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부인께서는 본래 액세서리를 착용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늦은 밤에는 손발이 잘 부어, 원래 사용하던 장신구가 잘 맞지 않는 탓이 큽니다. 이는 저택의 집사나 하녀장께서도 익히 아는 일입니다.”

하녀가 레이첼 후작 부인의 치장 습관과 몸 상태에 대해 상세히 언급했다. 바로 곁에서 시중을 들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얘기들이었다.

게리 바트만은 제가 지껄인 말과 일치하지 않는 정황이 나오자마자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잘못 보았을 리가……!”

“거짓입니다! 저깟 천한 하녀의 무엇을 믿고……!”

게리 바트만이 하녀의 이야기를 부정하기가 무섭게 카를로스 백작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는 어떻게든 하녀가 증언한 내용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 했다.

“손발이 붓는 일은 당장 오늘 밤에 확인해 봐도 될 일이고. 굳이 신분을 따지자면 게리 바트만 역시 평민 아닙니까?”

“…….”

“보가트 상단에서 배달부로 일하기 전에는 카를로스 백작가의 마부였고요.”

그를 저지한 것은 알폰소였다. 알폰소는 기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직업적인 영향이 크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물 먹이는 화법이 제법 쓸 만했다.

“주장의 논리와 진실성이 중요한 것이지, 증인의 이력이나 신분은 중요치 않지요.”

마지막으로 판사가 지리멸렬한 이력과 신분에 대한 의심을 끊었다.

이제 고요한 공간 안을 울리는 것은 긴장과 두려움으로 뒤섞인 호흡 소리뿐이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한 발짝 더 앞으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하녀의 주장에 신뢰감을 더하고,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저는 비소를 배달받은 적도, 선왕 폐하를 시해한 적도 없습니다.”

“그날 선왕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판사의 물음에 레이첼 후작 부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밤, 제가 선왕 폐하를 모시고 티타임을 가졌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걸 보십시오! 저 악녀가 바로 선왕을 시해한……!”

“증언을 방해하지 마세요.”

판사가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카를로스 백작을 짜증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일갈했다.

피베체 공작과 매한가지로 몸이 묶여 있던 카를로스 백작은 눈치를 보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이젠 거의 체념이었다. 판사는 그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리라.

카를로스 백작은 선왕비의 계략에 이용되었다. 그뿐이었다. 선왕을 시해한 것도, 최근 역모에 참여한 것도 도망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로비엔을 끌어내리는 것이 제가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전부 얻거나, 전부 잃거나, 둘 중의 하나인 도박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으나 이렇듯 끝이 명백해지자 막막해졌다.

“하지만 제가 폐하의 침실에 들기 전, 응접실에는 선객이 있었지요.”

“그게 누구였습니까?”

“선왕비 폐하였습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판사와 또렷하게 눈을 마주쳤다. 절대로 헛소리를 하는 것도,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폐하께서는 이미 그때 차를 반쯤 드신 상태였습니다. 선왕비께서 사용하지도 않은 잔을 치운 하녀가 제게 새로운 차를 내왔고요. 제가 차를 반쯤 마시고, 선왕 폐하께서 잔을 거의 다 비우셨을 즈음 폐하께서 발작하셨습니다.”

판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부인께서는 선왕비 폐하를 의심한다, 이 말씀이로군요.”

“예.”

판사의 정리에 레이첼 후작 부인이 순순히 대답하며 선왕비를 바라보았다.

언제 놀랐었냐는 듯, 선왕비는 부드러이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짙푸른 눈동자에 서린 격렬한 증오와 경멸만은 선명했다.

“여기 있는 모두를 기만하는구나. 나는 왕의 어미고, 선왕의 적법한 반려야. 그대에게는 왕비라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앙심을 품고 나나 선왕을 해할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내게는 선왕을 해할 이유 같은 건 없어.”

선왕비가 나긋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이 상황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것처럼. 누가 보아도 이상한 것은 레이첼 후작 부인이라는 것처럼.

“그것을 증명할 무엇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대만의 주장입니까, 부인?”

판사가 물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선왕비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고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작게 웃었다.

“그에 대한 증거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보라는 듯 오만하게 미소 짓는 선왕비의 태연함을 산산조각 낸 것은 알폰소였다. 선왕비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시건방진 로잘린의 변호사에게로 향했다.

“저를 고용하신 왕비께서 제공해 주신 것이지요.”

알폰소가 품 안에서 꺼낸, 잘 접힌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쳐 모두가 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선왕비가 발란에게 상황을 상세히 적어 보낸 편지였다. 그제야 평정을 가장하던 선왕비의 얼굴에 흔들림이 비쳤다.

“내가 볼 수 있도록 이리 가져와 주겠나?”

알폰소가 즉시 걸음을 움직여 판사에게 다가갔다. 판사는 안경을 위로 밀어 올리며 서신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수신자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 발신자 줄리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 배달받은 물건에 대한 흡족함과 사냥제에서의 반역이 성공한 후 왕비의 죽음을 운운하는 내용.

배달받은 물건이 무엇인지를 부정하더라도 현왕에 대한 분명한 반역이었다. 게다가 증명으로 피베체 가문의 인장까지 완벽하게 포함된, 다시없을 증거였다.

“수령인에 대한 게리 바트만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는 데 비하여, 레이첼 후작 부인과 그 하녀, 그리고 증거인 서신의 내용은 모두 일치하여 두 명의 범인을 가리키고 있지요.”

알폰소가 크라바트를 다소 느슨하게 풀며 목을 가다듬었다.

“인정합니다.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는 허가된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비소를 외부로 빼돌렸습니다.”

“…….”

“그리고 선왕비께서는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로부터 그 비소를 전달받아 선왕을 시해하는 데 사용하였고, 그 덕분에 보가트 상단의 인장이 찍힌 품질 보증 서신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국왕 내외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들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발란의 죄에 대한 알폰소의 시원한 인정에도 불구하고, 선왕비의 공범인 발란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결코 모르는 일이라 발뺌하거나, 위선을 부릴 수 있는 무엇도 남지 않았다는 건 선왕비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그린 듯 부드러운 미소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나치게 오래 쓰고 있던 가면 때문에 진짜 표정을 짓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왕비께서는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의 공범이며, 국왕 폐하를 시해하려 한 역적 중 하나인 셈이지요.”

만일 자신의 모든 범죄가 들키더라도, 절대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증거였다. 로잘린은 제 가문의 멸문을 두려워할 것이고, 로비엔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제 비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을 감수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단박에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한 내용을 적은 것은 그래서였다.

“선왕비께서 답변해 주셔야겠습니다.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로부터 배달받은 물건은 무엇입니까?”

나고 자란 방식이 너무도 달라,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던 예측 불가의 계집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평민 출신 왕비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혹은, 로잘린을 향한 로비엔의 사랑이 그녀가 생각한 수준에 미치지 않았거나.

“네 가문을 거는 일도 두렵지 않았니?”

그 순간, 어느 날의 기억이 파고들었다. 정수리부터 차게 식어 가는 절망도 함께였다.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선왕비는 판사 대신, 로잘린을 직시했다. 내내 음전한 왕비처럼 고고하게 앉아 자리를 지키던 것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응당 밝혀져야 할 일일 뿐입니다.”

로잘린이 부드럽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래. 당신을 가지면 얻을 수 있는 왕의 자리를 사랑했지. 지금도 사랑해.’

이 사람은 나를 영원히 사랑하리란 믿음이 처절하게 깨져 버린 어느 날이 생각났다. 그 순간 선왕비의 얼굴 위에 덧씌운, 오래된 가면이 서서히 갈라졌다.

“나만 죽을 줄 아니? 너도 죽어. 네 가문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고. 그래도 아무렇지 않아?”

부서져 조각조각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희생을 감수하여 지킨 그 알량한 사랑이 언제까지 가리라 믿어?”

“…….”

“그 사랑이 영원하리라 생각해? 널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사랑이 대체 뭐라고 너를 걸지?”

만일 그렇다 해도 서럽고 억울한 건 로잘린의 몫이련만, 무던한 로잘린과 달리 선왕비는 점차 울분에 찬 목소리를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악에 받친 듯 소리를 내지르는 얼굴은 곧 울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사랑의 배신이 드리운 끔찍한 트라우마였다.

“선왕? 그래. 내가 죽였다. 감히 사랑을 운운하며 나를 이용하고 기만했기에!”

“폐하!”

피베체 공작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선왕비를 불렀다. 그러나 선왕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모든 것이 끝났는데, 이제 와 무엇을 달리 고려해야 한다는 말인가.

선왕비가 로비엔과 로잘린이 앉은 방향으로 한 걸음을 뗌과 동시에, 근위병이 그녀의 길을 막아섰다. 그 사이로도 숨기지 못한 날것의 공격성이 번뜩였다.

“지지 세력도 기반도 부족한 3왕자, 기껏 힘을 보태어 왕으로 만들어 주었더니 나를 배신해? 그토록 사랑한다, 아껴 주겠다 속살거리더니 왕이 되자마자 숨겨 뒀던 연인을 드러내?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정부에게 아들을 낳으면 왕비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해?”

잊히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배신감과 모멸감. 그것들은 뿌리부터 썩어 가는 나무와 같았다. 영혼을 갉아먹고, 그 순간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성장할 수 없게 만들었다.

피베체 공작은 악을 쓰는 제 누이를 침통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제야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 그 수치를 감수하더라도 어울리지 않는 궁 안에서 누이를 빼내었다면. 누이가 다 잊고, 새로이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달랐을까.

“죽어도 싸지. 평생 지옥에서 헤매도 싸지! 왜 괴로움은 내 몫이야, 왜!”

그는 이 감정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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