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감히 현재의 왕을 시해하려 한 죄에 어떻게 변호를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큰돈을 준다고 해도, 역당들을 변호하려는 간 큰 변호사는 없었다.
알폰소는 피베체 공작이 주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제 등 뒤에 앉아 있는 왕과 왕비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로잘린을 독대하던 순간이 기억이 났다.
그때, 변호사로 걸음을 디딘 장소가 여전히 믿기지 않았던 알폰소는 허벅지 위로 손바닥의 땀을 문질러 닦아야만 했다. 떨리는 눈동자는 그를 스치는 사용인들과 정갈하게 관리된 왕비의 궁을 훑고 있었다.
‘예? 그게 왕실의 일이었다고요?’
라나가 데려왔던 정체 모를 부인의 정체는 왕비의 하녀 마리라고 했다. 왕실의 일을 논의하기 전, 그에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시험한 거라고.
믿기지 않는 수준을 넘어 현기증이 일 지경이었다.
‘따라오시지요.’
심지어 라나는 왕비의 하나뿐인 시녀였다. 라나의 재판 이후 관심이 없어 어떻게 사는지도 몰랐는데, 그렇게 된 지도 제법이었다. 알폰소는 라나와 이름 모를 여자, 결과가 명백한 상담의 이상함을 최근에야 알게 된 자신의 우둔함을 탓하며 라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왕비께서 오늘 저를 찾으신 이유가…….’
‘직접 설명해 주실 겁니다.’
라나는 완벽하게 왕비의 수족이었다. 제가 직접 말해 줄 것은 없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한 라나가 두어 번의 노크 후 왕비의 응접실 문을 열었다.
물씬 우러난 차의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알폰소는 직전까지의 머뭇거림을 내려놓고, 응접실 문턱을 넘었다.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알폰소는 소파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가 왕비임을 알아차렸다. 칼라브리아 내에 흔치 않은 탐스러운 갈색 머리, 매끄럽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리고 웃지 않아도 조금 올라간 매력적인 입꼬리. 왕이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그 모든 것을 갖춘 여자가 궁 안에 둘이나 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앉아.’
로잘린이 앞의 의자를 향해 눈짓했다. 알폰소는 그 즉시 의자에 착석했다. 자꾸만 자신이 작게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에 불쾌함이 얼마쯤 치밀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알폰소는 늘 자신감과 자기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다. 왕실에 굽신거리며 뭐 하나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자도 아닌데, 그들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이상하게 기가 꺾였다. 허가받지 않으면 자신 같은 사람은 결코 출입할 수 없는, 최상위 계급의 공간이라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그건 왕비도 똑같았을 텐데. 어쩌면 왕가에게 지독하게 당한 이 여자라면, 공포에 질려서 더욱 제자리가 아닌 양 느끼고 있어야 마땅한데.
‘분명 그때, 서신에서 나의 무관함과 오라비의 독단적인 행동임을 알 수 있다 했지.’
‘……그렇습니다.’
‘재판장에서 밝혀내어 나를 구제해. 그게 그대가 내 변호사로서 해야 할 일이야.’
자신을 향해 오연하게 명령하던 평민 출신의 왕비는 조금도 그런 공포에 잠식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짜로 만들어 낸 편지가 아닌, 발란과 선왕비가 진짜로 주고받았던 서신을 막 내놓으려던 찰나에 나타난 왕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으니까.
‘폐하, 갑자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변호사를 만난다기에.’
왕의 얼굴에 서린 것은 명백한 걱정이었고, 왕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희미한 웃음기였다. 알폰소는 그제야 이 궁 안에서 가장 큰 힘을 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왕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어떻게든 제 비를 지키기 위해서 사용할 것이다. 알폰소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질 수가 없는 재판이다. 그러니 오늘의 재판은 무조건 왕과 왕비의 승리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알폰소는 다시 없을 명예와 부를 안게 되리라는 것은 무엇보다 자명한 사실이었다.
“피베체 가문에서는 레이첼 후작 부인과 보가트 공작가를 범인으로 지목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알폰소가 회상을 접기 시작한 것은 피베체 공작이 말을 멈추었을 때였다. 피베체 공작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경청하던 판사가 그의 주장을 요약했다.
“진범인 레이첼 후작 부인은 이미 사망하고 없으니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만, 보가트 공작가 역시 선왕을 시해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명백한 일입니다.”
몸은 움직이지도 못하게 묶여 앉은 주제에, 피베체 공작은 몹시도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는 게리 바트만의 증언, 그리고 보가트 상단에서 발행한 보증 서신 등을 들어 보가트 공작가가 선왕 시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국왕 폐하께도 여러 번 고해 올렸으나, 보가트 공작가에서 그럴 이유가 없다 하여 조사를 거절당했습니다. 이는 저뿐만 아니라, 카를로스 백작과 리만 후작 역시 경험한 일입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물씬 풍겼다. 재판에 참석한 선왕비 역시 조금도 기죽지 않은 기색이었다. 실제로도 발란이 선왕 시해와 연관이 되어 있는 만큼, 피베체 공작의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물론 선왕비 역시 관련되어 있지만, 로비엔이 유효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고 믿고 있으니 저토록 당당할 수밖에.
로잘린의 시선이 무표정한 선왕비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 선왕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잘린을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명확한 증인과 증거가 있습니다.”
“…….”
“보가트 상단에서 마부로 일했던 바트만의 게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선왕께서 시해당하시기 전날 밤에 상단의 높은 분의 명에 의해 배달을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소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감정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불안을 드러내는 것은 선왕비가 가장 원하는 바일 테니까.
로잘린은 무심한 척, 발발 떨고 있는 게리 바트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담대해 보이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쌀쌀한 날씨에도 삐질삐질 새는 식은땀이 그의 심경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의 손끝 역시도 진동하듯 떨고 있었다.
“거기서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배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가트 상단에서 발행한 품질 보증 서신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로비엔을 알현할 때, 게리 바트만과 동행했던 카를로스 백작이 알폰소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로비엔이 그것을 가져갔으니, 변호사인 알폰소가 그 증거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얼마쯤 불안이 느껴지기도 했다. 혹시라도 왕이 그 서신을 폐기해 버리고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가 왕이었다면 얼마든지 그리하고도 남았을 것이므로.
그러나 알폰소는 카를로스 백작의 시선을 뒤로하고, 일전에 건네받은 품질 보증 서신을 판사 앞으로 내밀었다. 주어는 명확하지 않으나 보가트 상단의 인장이 찍힌 것은 확실했다.
판사가 그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보가트 공작. 보가트 상단의 인장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저와 제 아들인 발란만 사용 가능합니다.”
드마셸이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로잘린과의 약속을 어기고, 전혀 모르는 일이며 우리는 무고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욕심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속일 수 없는 진실이 있는 법이었다. 그나마 그들을 구명할 방법이 로잘린의 제안이라는 점 역시 명백했다.
결국, 잠시의 머뭇거림 끝에 드마셸은 진실을 대답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의 얼굴을 보았는가?”
원하는 대답을 들은 판사는 흥미를 잃은 듯, 바로 게리 바트만에게로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얼굴은 보지 못하였으나, 아주 곱고 가느다란 손을 가진 금발의 여인이었습니다.”
게리 바트만은 판사의 질문에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답변이기 때문이었다.
“특징은?”
게리 바트만이 곁눈질로 로비엔을 힐끗 바라보았다. 왕에게 대답했던 것과 답이 달라지면 안 된다는 것쯤은 그도 모르지 않아서였다.
“매끄러운 손에 흰색의 커다란 보석 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게리 바트만이 결연한 표정으로 판사의 질문에 답변했다. 카를로스 백작의 얼굴에도 안도감이 크게 돌았다. 크게 문제가 없는 주장이라 생각한 판사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소,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증인 둘을 이 자리로 부르는 것을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알폰소가 이의가 있음을 주장했다. 판사는 흥미로운 얼굴로 증인을 불러내는 것에 동의했다.
알폰소는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재판이 시작한 이래로 굳게 닫혀 있던 출입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두 명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복장으로 보건대 하녀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레이첼 후작 부인!”
레이첼 후작 부인, 로네 비에트. 이 자리에 등장할 수 있으리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판사가 놀란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그에 응답하듯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법정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등장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하는 피베체 공작의 얼굴에 미세한 빗금이 가 있었다.
“저게, 왜…….”
내내 심드렁해 보였던 선왕비의 표정에도 희미한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뒤섞여 드러났다. 그런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은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 손과 마찬가지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선왕을 시해한 진범을 잡기 위해 폐하께서 잠시 저를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연회에 참석할 때처럼 치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얼굴에는 평소보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을 한 레이첼 후작 부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변에 대해 설명했다.
“옆은 누구입니까?”
“피베체 공작께서 말씀하신 새벽, 제 시중을 들었던 하녀입니다. 폐하께서 일찍이 제 사용인들을 취조한 후 따로 숨겨 두신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그날의 비밀을 아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목숨을 부지한 것은 이상함을 느낀 로비엔이 취조했던, 레이첼 후작 부인의 저택에서 일하던 사용인들뿐이었다.
차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눈알만 굴리던 하녀가 애써 허리를 곧게 세우고 똑바로 섰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반지를 착용했다 증언한 것은 위증입니다. 이 아이가 저의 증인입니다.”
“그날, 레이첼 후작 부인이 흰색의 커다란 보석 반지를 끼고 있었는가?”
레이첼 후작 부인의 하녀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열리는 입으로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