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드마셸과 리리엔, 그리고 발란이 궁으로 들었다.
“세 분 모두 따라오십시오.”
로잘린의 부름 때문이었다.
라나는 탐탁잖은 보가트 공작가의 일원들을 뒤에 달고 왕비의 응접실 문턱을 넘었다. 로잘린은 그들이 왕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로잘린의 시선이 라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리리엔은 안타깝게 보일 정도로 발발 떨고 있었다. 늘 로잘린에게 언성을 높이고, 하찮은 사생아라 무시하던 과거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늘 오시라고 한 건, 재판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예요.”
물론 그게 심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만한 요소는 되지 못했다.
“폐하께서 처분을 내리셨습니까?”
“아뇨. 법원에 전적으로 판결을 맡기시리라 하셨습니다.”
드마셸이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피곤한 눈을 깜빡였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두 눈은 시뻘겋고 눈 밑은 거멨다.
로잘린은 담담한 목소리로 반갑지 않은 손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희 쪽 변호사로는 알폰소 가드를 고용했고, 목표는 연좌제를 피하는 거예요.”
“연좌제를 피한다고 하심은…….”
“아버지께서 그날, 발란이 아닌 저를 택하신 덕분에 폐하께서 목숨을 구하셨으니까요.”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어찌 되었거나 남는 장사였다.
로잘린이 한 손을 들어 드마셸이 당장에 반색하려는 것을 막았다.
“마땅한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겁니다. 보가트 가문의 재산은 모두 왕실에 귀속되며, 다시는 명예를 누릴 수 없다는 전제 조건이 붙을 겁니다. 그리고.”
“…….”
“선왕 시해의 주동자인 발란은 구명할 수 없어요.”
로잘린이 냉정하게 덧붙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미안해, 미안해. 로잘린.”
단박에 다가온 리리엔이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라나는 감히 왕비에게 반말하며 이름을 마구 불러 대는 리리엔을 꾸짖으려 했으나, 로잘린이 시선으로 저지했다.
로잘린은 딱히 화를 낼 생각조차 들지 않아, 그 감흥 없는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늘이 끝이 될 테니까 아무래도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로잘린은 라나에게 잠시 자리를 비울 것을 명령했다. 라나가 마지못해 자리를 비우고 나자, 응접실 안에는 딱 넷만 남았다.
“잘못했어.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리리엔은 이제 거리낄 것도 없이 아이처럼 울며 도움을 청했다. 리리엔이 어릴 때부터 저와 좋은 사이였고, 지금 울고불고 하는 걸 안타깝게 여긴대도 로잘린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들 모두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난 너한테 크게 악의는 없어, 리리엔. 너한테도 이복동생을 싫어할 자유는 있으니까.”
“…….”
“하지만 발란한텐 많아. 그리고 저 새낀 앞으로도 나한테 사과할 생각은 없어 보이고.”
“아니야, 발란도. 발란도…….”
리리엔이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양손이 묶인 채 끌려 들어온 발란은 드마셸의 경계 하에 방의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어차피 사과한대도 용서해 줄 마음은 없었다. 사과는 자유지만, 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었으니까. 다른 걸 떠나, 자신도 아닌 로비엔을 해하려고 했다는 사실만큼은 결단코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발란에게 지금 칼을 쥐여 주면 바로 내 심장에 갖다 꽂을걸?”
로잘린이 비아냥거리자, 리리엔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발 떨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로잘린을 노려보는 발란의 눈동자 한 쌍이 위험하게 번들거리고 있었으니까. 리리엔으로서도 그 흉흉한 기색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넌 나한테 뭘 잘했는데?”
발란은 몸이 묶인 채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 지경까지 와서도 기세가 꺾이질 않아, 얼마쯤은 대단하다고 손뼉을 쳐 주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내가 너한테 왜 뭘 잘해야 하는데?”
로잘린이 되묻자, 발란이 눈을 반쯤 까뒤집고 악을 질렀다.
“네년이 비겁하게 상단 빼앗아 간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
“내 자리, 당연한 내 것!”
왜 이토록 눈이 멀어 멍청하게 구나 싶었던 이유를 그때 알았다. 선왕비로부터 로잘린이 수작을 부려 상단의 후계 자리를 가져간 것을 알게 되어 눈이 뒤집혔던 것이다.
“그럼 너도 능력껏 빼앗지 그랬어.”
“……뭐?”
“네가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뺏기기는 했겠니? 뺏겼어도 되찾았겠지.”
능력 부족을 탓하지 말라는 로잘린의 말에 발란이 울분을 터뜨리며 몸을 뒤틀었다. 로잘린은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상단을 이 규모까지 키운 건 나였어. 나는 고작 앉은 자리에서 재산이나 축내는 게 전부였던 너 같은 자식보다 못한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고.”
로잘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발란의 가슴팍에 내다 꽂혔다. 발란이 격렬한 분노로 몸을 떨었다. 곧 발작을 시작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도하게 오피움을 섭취하다가 최근 드마셸의 명으로 완전히 끊어 버렸다 했으니, 금단 증상 같은 게 있을 시기기도 했다.
“원망하려거든 아버질 원망해. 사생아를 거두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네게만 기회를 주려던 우리의 아버지를.”
“……폐하.”
로잘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 말 때문에 항상 인정받고 싶었다. 사람으로도 대우해 주지 않는 보가트 가문의 성공을 위해 살았던 건, 오직 그 하나 때문이었다. 한데 로잘린은 늘 그림자 속에 가려지고, 양지에서 드러난 공적은 모두 발란의 것이 되었다.
“결국엔 가문의 명예를 사고, 네게 안정적으로 상단을 물려주기 위해 나를 왕실에 팔아먹었지. 내가 상단을 노리고 있는 것을 알았으니까. 왕세자비가 되면 그런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
“물론 그 생각은 틀렸어. 나는 상단을 쥐기 위해서 더 강한 권력을 따라온 거였으니까.”
그의 생각과는 다른 목적이긴 했지만, 처음이었다. 보가트라는 가문의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로잘린 자신만을 생각하고 한 선택은.
“선택하세요.”
그리고 그를 향해 일갈했다.
“다 같이 죽을 건지, 발란 하나 죽이고 가문의 재산을 토해 내 모두 살 건지.”
드마셸이 흐려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침통함이 내비치는 얼굴을 직시하며, 말없이 그의 대답을 채근했다.
“폐하.”
결국, 드마셸의 지친 목소리가 침묵이 깔린 실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로잘린은 늘 자신감 넘치던 얼굴에 짙게 드리운 노화의 그늘과 지친 기색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가문이 명목상 남는 것도, 재산을 몰수해 가는 것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
“다만 발란, 저 녀석의 사형은 재고해 주십시오.”
이제 와 아버지 노릇이라도 하려는 거냐고, 타박하듯 저를 보는 칼날 같은 시선 앞에 드마셸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모든 것을 다 잃는 순간에 와서야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죽는 날에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발란과 로잘린이 이토록 대립하게 만든 것도 자신, 발란의 자존감을 망친 것도 자신, 로잘린을 이용만 하고 기회를 주지 않은 것도 자신이었다.
“폐하께서 무사하시다면 발란의 목을 지키는 것은 재고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발란이 원망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겠지만, 그래도 자식이라고 못내 불쌍하게 생각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다 잃을 거라면 못난 놈의 목숨 하나 정도는 구제하고 싶었다.
로잘린은 드마셸의 어투에서 복잡한 감정을 읽었다.
“저는 재고해 보겠다고 했지, 확답을 드리진 않았어요.”
자식을 향한 완벽한 애정이나 사랑은 아니더라도, 그것과 유사한 형태의 무엇.
“내가, 아니. 제가, 다, 다 할게요!”
이대로는 로잘린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로잘린은 이제 더 이상 본인을 보가트 가문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으니까. 리리엔은 로잘린이 타인이며,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의 사람임을 인정하고 몸을 낮추었다.
“법정에서 무엇이든 증언할게요. 폐하와 발란의 사이가 나빴다는 거, 발란이 폐하를 해칠 의사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요. 발란이 지은 죄를 인정하게도 할게요. 폐하의 승리로 재판이 끝날 수 있도록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흐윽, 울면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리리엔은 로잘린의 발치에 엎드려 드레스 끝자락을 붙들고 울었다.
동시에 발란과 드마셸의 얼굴이 비탄으로 찌그러졌다. 발란은 달려와 리리엔을 자리에서 일으키고 싶은 듯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니 제발, 발란의 목숨만. 목숨만은…….”
로잘린의 얼굴에도 얼마쯤 혼란이 떠돌고 있었다. 드마셸과 리리엔의 목숨은 구해 주기로 마음먹은 만큼,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발란의 목숨을 구제하려고 들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해서였다.
“왜 그렇게 발란을 살리고 싶어?”
로잘린이 물었다. 진심으로 그 대답이 궁금했다.
“가족, 가족이니까…….”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들려온 고백에 조금 아연해졌다. 한쪽 구석에서 몸이 묶인 채 발악하던 발란이 움직임을 멈춘 것도 그쯤이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발란의 눈동자에도 물기가 고여 있었다. 제 누이의 절절한 애정이 느껴지지 않을 리 없었을 테니까.
그 자리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로잘린뿐이었다.
“…….”
마치 이방인처럼.
그게 벌써 며칠 전의 일이었다.
로잘린의 시선이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보가트 가문의 일원들에게서 멈추었다. 침통한 얼굴의 드마셸과 여전히 로잘린을 노려보는 발란, 그리고 리리엔이 차례로 배정석에 앉았다. 눈물로 파티라도 한 건지, 리리엔의 눈두덩은 붉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곧 재판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회상을 끊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로잘린은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단호히 돌렸다. 조금 틀어져 있던 몸 역시, 반듯하게 판사가 있는 정면을 향했다.
그 순간 로비엔이 허벅지 위에 가만히 올려 둔 손을 겹쳐 잡는 게 느껴졌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따듯한 체온이었다.
“괜찮아요.”
혹시나 로잘린이 제 가족에게 죄책감을 느끼는지 걱정하는 것이리라.
로잘린은 작게 미소 지었다.
“폐하께선 괜찮으세요?”
오히려 로잘린이 걱정하는 쪽은 로비엔이었다. 그녀야 본래 가족 같지 않은 이들과 가족이 아닌 것처럼 살아왔지만 로비엔은 아니었으니까. 오늘의 재판이 그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불안이 일었다.
로비엔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구불구불하게 말린 모양의 은색 가발을 쓴 판사가 로비엔을 향해 깊게 인사한 후에야 재판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