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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11)화 (111/151)

# 111.

법원장 파렌 로어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한 이후, 그의 요청으로 독대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법원장을 지명하는 일은 왕의 일이니만큼, 파렌 로어 역시 선왕이 죽은 이후 새롭게 교체되어야 했지만, 지금의 왕이 파렌 로어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 지금 파렌 로어로서는 왕에게 미운털 박히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파렌 로어.”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파렌 로어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젊은 왕이 파렌 로어를 반겼다.

“차를 두 잔 내오고, 모두 나가 있도록.”

로비엔의 명령에 모두가 왕의 집무실을 비웠다. 뒤늦게 들어온 하녀만 황급히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은 후 종종걸음을 쳤다.

“날씨가 좋아.”

친히 차를 내린 로비엔이 파렌 로어 앞으로 잔을 밀어 주었다. 파렌 로어는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앉은 자리에서 궁둥이를 들썩거렸다.

“폐하께서 직접 내린 차를 마시게 되다니, 비가 온 후 갠 날씨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반역이 지나간 후, 평탄한 길만 남았다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로비엔은 찻잔의 손잡이를 잡고 입가로 가져다 댔다. 파렌 로어의 말대로 무척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앞으로도 헤쳐 나갈 일이 많으니, 아직 구름이 많지 않은가 싶은데.”

“이미 역당들의 죄가 명백한데 헤쳐 나갈 일이라니요. 그저 처분을 내리어 전달만 해 주시면 됩니다.”

파렌 로어가 몸을 낮추어 이야기했다.

아무리 법원에서 왕이 내리는 명령과 시행령에 종종 시비를 건다고 해도, 왕에 대한 반역을 다루는 일은 예외였다. 여전히 왕은 입법, 사법, 행정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자였고,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였다. 그런 왕의 권위에 대항하는 일이 발생했다면, 왕의 산하 기관인 법원이 선택할 일은 왕의 처분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생각보다 복잡하게 일이 얽혀 있거든.”

“감히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무엇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파렌 로어가 온순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파렌 로어는 결코 지금처럼 순순한 낯짝을 하고 있지 않겠지만.

“알다시피 선왕 시해 건과 이번 역모는 연결이 되어 있어.”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선왕을 시해한 진범을 찾았다.”

파렌 로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아니었습니까?”

“놀랍게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사람이고, 모두를 경악하게 할 사람이야.”

튀어나올 듯 크게 뜨인 눈을 바라보던 로비엔이 담담한 목소리로 파렌 로어의 질문에 대답했다.

“감히 선왕을 시해한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파렌 로어는 마치 제 친부를 해친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듯 씩씩거렸다. 꾸며내고 과장한 기색임을 알았으나, 로비엔은 마치 연극을 보듯 그의 분노를 관망했다.

“선왕비.”

다만, 절정으로 가는 연극을 보기 위해 그의 질문에 관한 대답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예?”

그러나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는 금세 절정에서 미끄러졌다.

“그게, 그게 무슨.”

파렌 로어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선왕비가 선왕 시해의 진범이라는 증거를 입수했어.”

“조작된 증거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선왕비께서 왜…….”

파렌 로어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선왕비가 선왕을 해칠 이유가 없어서였다.

선왕비는 선왕과의 사이에서 아들만 내리 셋, 딸 하나를 낳았다. 선왕이 한 명의 정부를 오랫동안 품에 끼고 귀애하기는 했지만, 표면적으로 선왕과 선왕비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첫아들이 왕이 되리란 걸 생각하면 둘의 관계는 나빠서도 안 될 일이었다.

한데 선왕비가 선왕을 죽였다니? 무슨 이유로?

“증거로 선왕비가 공범과 주고받은 서신이 있어. 자신의 이름과 사건을 정확히 적어 두었고, 피베체 가문의 문장 역시 찍혀 있지.”

제 어미가 아비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왕은 느긋했다. 한쪽 다리를 꼬아 앉은 채 찻물을 홀짝이는 그에게서는 얼마쯤의 여유가 풍기기까지 했다. 괜히 소름이 쭉 끼쳤다.

“혹시 선왕비 폐하의 죄를 묻으려고 부르신 것입니까?”

저토록 느긋한 것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이미 선왕은 죽었다는 것과 자신을 부른 일을 고려하면 선왕비의 죄를 없던 일처럼 묻으려는 건가 싶었다. 선왕이 죽어 버린 덕분에 자신이 젊은 나이에 즉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하면, 묻어 줄 수는 있고?”

로비엔의 물음에 파렌 로어가 미간을 조금 구겼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해 주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달라고 할까? 아니다. 왕이 시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법원장의 명예를 걸고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해야 할까?

바쁘게 돌아가던 머리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파렌 로어가 제법 근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법원장의 명예를 걸고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로비엔의 얼굴에 묘한 실망이 어렸다. 그 순간, 파렌 로어는 왕이 협상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보통은 그렇습니다마는.”

파렌 로어가 두어 번의 헛기침 끝에 말을 바꾸었다. 무려 왕의 약점을 쥐는 일이다. 법원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의무는 그 앞에서 무력했다.

“이 나라의 주인께서 원하시는 바를 신하가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하지만 그것이 사회의 정의나 혼란을 막기 위한 바가 아니라면, 제가 따른다고 하여도 법원의 판사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법원은 일반 개인이 아니니까요.”

파렌 로어가 빙긋 웃었다. 그는 이제 왕에게 설설 기는 아랫것의 태도를 완전히 버린 상태였다. 느긋한 자세와 어디 한번 괜찮은 제안을 꺼내 보라는 미소가 얄미울 정도였다.

“그대가 내 의견을 따라도 판사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

그러나 로비엔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패를 내놓도록 유도할 셈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를 만족시키는 조건이어야만 한다는 뜻이로군.”

“저라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겠습니까?”

“법원장으로서 마땅한 태도군.”

파렌 로어가 자신은 절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렇게 얘기한 이상, 그는 자기 주머니나 불리는 수작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로비엔이 그가 예상치 못한 선택지 지우는 작업을 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파렌 로어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법원의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으면 나는 몰라.”

로비엔이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이미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빈손은 허벅지 위에서 깍지를 낀 상태였다. 지나치게 여유롭고 관조적인 태도. 왕이 모를 리가 없는데도 의뭉을 떨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물론 칼라브리아의 주인은 폐하시지만, 모든 상황을 굽어살피시기에는 어려우시지요. 그러니 법원의 구성원들이 매번 폐하께 결정을 맡기는 일을 죄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온종일 이러고 있을 생각인 것이다.

결국, 파렌 로어가 먼저 원하는 것을 드러냈다. 로비엔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생각하던 답안지였다.

“하면 이번 재판에서 판사에게만 판결을 맡기는 일은 어떤가?”

파렌 로어가 눈을 번쩍 떴다. 판결의 자유를 달라 청하기는 했지만, 크게 기대하는 바는 아니었다. 왕에게는 한 번의 손실이, 법원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된다. 그러니 왕이 제가 쥔 권한을 내려놓을 리가. 그리 짐작했었는데 로비엔의 제안이 모든 예상을 박살 냈다.

“진심,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파렌 로어가 허둥지둥 로비엔의 진의를 확인했다. 금방이라도 그가 자세를 바꾸고 농담이라고 말할까 무섭다는 듯이.

“진심이야. 모든 일을 살피기에는 내 몸의 개수와 시간은 한정적이니까.”

로비엔은 담담하게 파렌 로어에게 확신을 주었다. 허어어,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된 파렌 로어가 놀란 숨을 급히 들이켰다.

“다만, 나는 누구의 죄도 묻을 생각이 없어.”

그러나 다음 순간 로비엔이 꺼낸 말에 의아해졌다.

선왕비와 그 공범의 죄를 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왕은 그에게 왜 협상을 청했단 말인가?

“그대들에게 이 재판의 자율성을 맡기는 이유는 단 하나.”

“…….”

“처분에 있어서 각 개인의 과와 공을 분리해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야.”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파렌 로어는 로비엔이 이후 더 말을 잇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보가트 공작의 아들인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가 선왕비에게 비소를 제공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보가트 공작가가 선왕의 시해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는 했지만, 사실 파렌 로어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개가 그 아비인 드마셸을 생각하지 발란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드마셸 칼라브리체 보가트는 사르데 숲에서 내 목숨을 구했지.”

“보가트 공작과 그 아들의 구명을 원하심입니까?”

“그들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 멸문을 해야 할 죄와 나라를 구한 공로의 충돌을 고려하라는 것일 뿐.”

확실한 것은, 이런 경우는 칼라브리아 역사 내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한 가문 내에서 하나는 왕을 죽였고, 하나는 왕을 구했다. 이런 경우의 상벌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두 사건은 같은 무게인가? 하나의 벌과 하나의 상으로 상쇄시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인가? 파렌 로어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민가에서 재판하듯이.”

로비엔이 그런 파렌 로어에게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파렌 로어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 정도면 충분한 상이 되지 않겠나?”

“…….”

“다만 아들과 가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는 물어야겠지. 그 잘난 재산이 그의 유일한 매력이니, 그것을 앗는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보여. 판결은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겠지만.”

로비엔이 빙긋 웃었다.

이미 결론은 내려져 있었다. 파렌 로어는 그게 어째서 자신들의 판결을 존중하는 것이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제 의견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왕이 친림재판에서 그를 강요하지 않을 거라는 뜻은, 그의 의견을 그대로 읊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법원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일 것이다. 부르주아 세력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는 보가트 공작가에도 철퇴를 내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되, 과와 공을 철저히 나눈 판결로 정당성까지 획득할 수 있는 판결을.

이 얼마나 매력적인 소리인가? 사법권의 독립성을 보장하겠다는 뜻까지는 아니어도, 한 번 틈을 벌려 주기만 한다면 그 한 번은 선례가 되어 또 다른 기회를 낳을 것이다.

“법원의 의견을 이토록 존중해 주시는데, 어느 누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

“왕비께는 조금의 탈도 없을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로비엔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명백했다. 보가트 공작가 일원들의 목숨을 운운할 때는 상관없다고 말하던 왕이 그녀의 안전에는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이었으니까.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회! 고작 평민 계집애가 열어 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파렌 로어는 이제 그들의 새로운 왕비를 향해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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