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10)화 (110/151)

# 110.

로잘린은 늦은 밤에도 잠들지 않은 채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고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가트 가문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불어오는 폭풍에 로잘린이 더는 휘말리지 않았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 사랑임을 알았다. 그래서 저도 두렵지만, 더욱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하기에 겁쟁이가 되어 버린 남자는 절대로 제 결정을 바꾸려 하지 않을 테니까.

“잠이 오지 않는 거죠?”

“조금.”

로비엔은 순순히 제 불면을 인정했다.

“쓸 만한 증거는 찾으셨나요?”

그러나 증거를 찾았느냐는 질문에는 굳게 입을 닫았다. 하지만 로잘린은 그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선왕과 선왕비가 먼저 만났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죽었다. 시종장, 차를 내갔던 하녀, 경비병까지. 증거는커녕 증인 확보조차 어려웠다.

물론 부족한 증거라도 왕의 권위대로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왕정제 사회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방식은, 왕이 저를 위협하는 고위급 인사와 제 혈족을 모두 제거하려는 것으로 보일 확률이 높았다. 법원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였다.

‘한 사람만의 단독적인 소행이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마리를 제 친구로 위장하여 알폰소를 만나고 온 라나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모든 게 막막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유일한 위안이었다.

“폐하.”

이렇게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해서는 무엇도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왕궁을 둘러싼 벽 너머로, 왕족들의 한심한 권력 싸움에 지쳐 버린 백성들의 시위는 점점 목소리를 키우고 있었다. 하루빨리 잘잘못을 명백히 가리고, 왕으로서 그의 권위를 세우지 않는다면 그 불길은 더욱 거세어지리라.

“제 말을 제대로 들어 주세요.”

“…….”

“발란의 서신, 증거로 제출해야 해요.”

선왕비에게 한 가지의 죄라도 묻는 데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무엇이고,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로잘린이 가지고 있는 서신뿐이었다. 선왕 시해와 역모 모두에 가담했다는 증거.

로잘린이나 드마셸이 멸문이 겁이 나서라도 사실을 밝히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증거로는 배제했을 것이 분명한 것. 아마 로잘린을 엮어 로비엔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저를 무척 걱정해서 이러시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폐하.”

로잘린이 가만히 손을 뻗어 제 옆에 누운 로비엔의 얼굴을 감쌌다. 부드러운 백금발이 손가락 끝을 스치며 간질이는 게 기분 좋았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웃었다.

“제 목숨이 걸린 게 아니라면 폐하께서 더 이상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보가트 가문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것도 아닌걸요.”

조곤조곤 털어놓는 진심이 그에게 닿기를 바랐다. 로비엔이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만큼, 자신 역시 그렇다는 것을.

“라나와 마리를 시켜서 변호사 알폰소 가드를 만나게 했어요.”

“……변호사를?”

로비엔이 미간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대충 비슷한 상황으로 꾸며 말하고,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여 주게 시켰거든요.”

왕궁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밝히지 않으면서도 비슷하게, 하지만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도록. 왕실이라는 특수성을 제외하고 민가에서는 어떻게 처분되는지를 알아내는 게 목표였다.

“그 서신으로부터 선왕비와 발란의 연계, 제가 일에 관련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가문이 아닌 발란의 독자적인 행동임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더군요.”

물론 왕족 시해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일반적인 집안에서 벌어진 일과 같은 선상에 두기는 어렵기는 했다. 하지만 그 서신을 보자마자 알폰소 가드는 몇 가지 희망적인 사항을 발견했다고 했으니까.

“그러한 정황이 명백하고, 제가 폐하의 비인 이상, 폐하께서 저를 지키고자 하신다면 법원에서도 어찌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일단 제 목숨 하나 보전하는 일은 어렵지 않겠죠.”

로비엔이 허탈한 얼굴을 했다. 굳이 로잘린이 위험을 감수하는 게 싫어 서신을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했더니, 그새 변호사를 찾아가 그 위험도를 분석해 왔다. 저는 안전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그를 설득하려고.

로잘린은 그의 예상과 통제 밖으로 벗어나 있는 사람이었다. 알면서도 매번 그녀가 움직이고 난 이후에야 생각하게 되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문과 왕실 사이에서 치인 저를 가엾이 여기고 있어요.”

로비엔이 퍼뜨린, 칼라브리아 곳곳으로 파다하게 퍼져 나간 소문은 평민 출신 왕비를 몹시 가련하고 불쌍한 것으로 만들었다. 발톱을 숨긴 로잘린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녀가 불쌍하게 구석에서 눈물이나 짜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위하는 자들도 왕족들은 괘씸하게 여겨도, 단 하나의 예외로 로잘린에게만은 연민을 가졌다. 그 점을 이용하고자 했다.

“변호사를 구해서, 역모에서 왕을 구한 공로를 사 명목상 가문만 구명해 달라 요청할게요. 대신 보가트 가문의 재산을 왕실의 재산으로 귀속시키고, 앞으로 어떠한 명예도 가지지 않겠다고 할 거예요. 선왕을 시해한 발란에게는 사형을 요구하고요.”

완벽하게 끈 떨어진 신세가 된 평민 출신의 왕비. 오로지 돈으로 꿰찬 자리인데, 결국 돈은 모두 왕실에게 빼앗기고, 남은 것은 고작 손바닥 크기의 입지. 얼마나 그럴듯하게 불쌍한 모습인가?

게다가 부르주아 세력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귀족 세력에게도 나름 흡족한 결과일 것이다.

“시집와서 고생만 하고, 오라비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에 엮여 가문까지 몰락한 왕비의 모습이 모두의 눈에 얼마나 가엾겠어요. 그러니 제 자리를 지키는 정도는 협상할 수 있지 않겠어요?”

로비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면 왕비가 아니라, 왕관을 쓴 상인이 아닌가.

그러나 빌어먹게도 틀린 말도, 나쁜 제안도 아니었다. 지금의 막막한 상황을 고려하면 최선의 방법이었다. 로잘린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분명 그랬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비에 대해서만큼은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아요.”

로비엔은 결코 로잘린에게 해를 입힐 생각이 없었다. 로잘린이 가문의 일원으로 연계된 이상 보가트 공작가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선왕의 시해가 역모에 준하는 죄인 한, 법관들은 부르주아 세력을 대표하는 보가트 가문에게만 특혜를 부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운이 좋으면 그렇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일개 가능성에 의존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마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된다고 하실 건가요?”

로비엔은 여전히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로잘린이 흐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제 연약함에 그가 흔들려 넘어오기를 바라는 듯이.

“조금의 위험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단호했다.

저인들 좋아서 그를 채근할까. 결국 로잘린도 뿔이 났다.

“그러면 영원히 이렇게 증거만 찾고 계실 건가요?”

“로잘린.”

“아니면 선왕비가 다시 폐하를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실 건가요?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 꼴만은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듯 로잘린이 언성을 높였다. 잠을 청하려고 곱게 누워 있던 몸은 어느새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은 채였다.

로비엔 역시 로잘린을 따라 몸을 일으켜 마주 보고 앉았다.

“폐하께서 못 하신다면, 제가 재판장에서 제출할 거예요.”

“그러면 재판장에 출입하지 못하게 할 겁니다.”

“왕비로서 못 한다면 보가트 공작가의 일원으로 출입하면 돼요.”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로잘린은 얼마든지 협상의 가능성에 배팅할 의사가 있었으나, 로비엔은 고작 가능성으로 로잘린의 안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저는 진심이에요.”

로잘린이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로비엔이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비를 사랑했지만, 이렇듯 고집을 부릴 때는 그 사랑이 가장 막막했다. 그가 로잘린을 겁박할 수 없다는 것을, 끝내는 지고 말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아, 로잘린. 제발…….”

그러니 그는 마지막으로 빌어 보았다. 제발 지금이라도 그 결심과 말을 물러 그를 안도하게 해 달라고.

그러나 로비엔을 바라보는 로잘린의 시선은 단단했다. 조금의 물러섬도, 흔들림도 없는 태도도 매한가지였다.

“불안함이 아예 없다면 그건 거짓이겠지만, 폐하께서는 저를 아시잖아요. 정말로 안 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도망칠 사람이라는 거.”

안다. 로잘린은 스스로 약아빠졌다고 평가하지만, 실리적이고 현명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이런 사람을 고작 왕관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도록 만드는 지금이, 자신이 싫었다.

“잃은 게 많으니 겁이 나실 수밖에 없어요.”

왕에게 겁쟁이라고 말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조금 웃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설득하며 확신을 얻었다는 것처럼.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께서 저를 잃게 될 일은 없으니.”

“…….”

“제가 사형 선고를 받더라도 폐하께선 저를 빼돌리실 거잖아요. 제가 살아 있는 동안 폐하께서 후비를 보는 꼴을 볼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다시 돌아올게요.”

다시 돌아온다고? 어떻게?

로비엔이 얼마쯤 의문이 섞인 얼굴로 반드르르한 로잘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제 비에게 조금만 더 사랑이 부족하고 확신이 없었다면, 사기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사회에 가진 불만이 한두 개겠어요? 백성들을 긁어 왕실을 뒤엎으라 민란이라도 일으키죠, 뭐.”

“……내가 왕이라는 건 알고 하는 얘기죠?”

왕에게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다. 민란의 경우도 싹이 보이면 먼저 제거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로비엔의 물음에 로잘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로비엔도 결국 따라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웃을 때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실없는 바보처럼.

“졌어요.”

로비엔은 순순히 제 패배를 인정했다. 처음부터 로잘린이 버티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으니까. 그에게는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이 여자의 마음도 존중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로잘린이 높은 위험도 얼마든지 감수하겠노라 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로비엔은 팔을 뻗어 품 안으로 로잘린을 끌어안았다. 비슷하게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이 가슴팍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놓칠세라 품 안의 여자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역시, 로잘린이 원하는 대로 협상 판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협상의 기본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주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결과를 취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그들이 원하는 게 뭘까.”

“네?”

아리송한 대답이 돌아왔다. 로잘린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묻는 순간, 그녀의 향긋한 머리 타래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던 로비엔이 우뚝 행동을 멈추었다.

무엇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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