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09)화 (109/151)

# 109.

칼라브리아의 변호사 알폰소 가드는 며칠 전 아주 재밌는 소식을 들었다. 곧 선왕 시해 건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현왕을 역모로 죽이려 한 자들이 왕이 선왕을 시해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시가지의 카페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알폰소는 혀를 찼다. 먹고 살기 편하고 고민이 없으니 저들끼리 쌈박질이나 하는구나 싶어서였다.

알폰소 가드 역시 대표적인 부르주아 가문의 사람 중 하나였다. 아버지인 로메인 가드 때부터 전문 직종에서 일하며 부를 축적하고, 그를 기반으로 성장해 온.

평민 출신의 왕비인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라면 모를까, 그들은 금태를 타고난 왕족들과는 탄생부터 달랐다. 신성한 노동으로 마땅한 돈을 벌어들였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루드 부인! 아, 아니. 레이디 메르센데티.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동안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무척 잘 지냈어요, 알폰소 씨.”

그러니까 그에게는 자신이 구제해 준 고객을 만날 때의 보람 같은 것도 있다는 얘기였다. 따라서 알폰소 가드는 제집까지 찾아온 라나를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했다.

라나는 재차 감사를 표하며, 저택의 문턱을 넘었다. 얼굴을 꽁꽁 가린 여자와 함께였다.

“한데 이분은 누구신지?”

“제가 아는 분인데, 도움이 필요하세요. 그래서 오늘 알폰소 씨를 찾아왔습니다.”

“이쪽으로. 도로시! 차 석 잔만 가져다줘요!”

라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방문의 목적을 이야기했다. 적당한 돈의 냄새를 맡은 알폰소는 사무적인 미소와 함께 응접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저를 찾아오신 걸 보니 이분도 문제가 복잡하신 모양이군요.”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라 능력이 좋은 분이 필요했고, 개인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다 보니 저를 동행하고 와야 했어요.”

라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번 들어 보지요.”

하녀가 차 석 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나감과 동시에, 알폰소가 여유롭게 웃었다.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살인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예요.”

라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자는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사건의 정황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시모가 시부를 죽였는데, 부인이 시부를 살해했다고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다?”

“네. 그에 대한 증거도 있어요.”

“그러면 일이 명백한데 뭐 하러 상담을 받겠다고 하셨습니까?”

알폰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앞의 여자를 향해 물었다. 수상한 고객. 하지만 뭐, 라나와 함께 온 사람이니 그렇게까지 수상쩍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수임료로 지불할 돈도 충분할 테고. 돈을 준다는데, 흉악범이 아닌 이상에야 고객을 가릴 필요가 있나.

“……재산을 탐내고 제 오라비와 결탁하여 저지른 일이에요. 저는 가문과 저의 누명을 벗고 싶고요.”

“재산을 탐내고 어떻게 결탁했는데요?”

“시모가 시부를 죽이는 데 도움을 주는 대가로, 저와 남편을 죽인 후 지참금을 오라비가 회수하는 것으로요. 시모는 상속자가 없으니 시부의 재산을 차지하고요.”

“호오.”

선후 관계가 지나치게 명확하여 흥미를 잃은 듯 보였던 알폰소가 등받이에 기댔던 상체를 앞으로 움직였다.

“사건을 제대로 밝히려면 부인의 가문까지 엮이게 되겠네요. 혹여라도 부인과 남편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남편을 죽이고 다시 지참금을 회수해 가려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남편과 사이가, 그때는 그리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하, 하지만 저는 정말로 몰랐어요!”

제법 애절하게 결백함을 외치는 모습에 알폰소가 얼굴을 갉작였다. 억울하고 정말 몰랐으니 여기 오기는 왔겠지.

“서신을 일단 한번 줘 보세요.”

“알폰소 씨께 드리세요. 믿을 만한 분이니까요.”

알폰소가 손을 내밀자, 여자가 주저하는 얼굴로 내내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긴장했는지 편지가 축추근했다.

<친애하는 린데만에게.

배달부를 통해 배달해 준 물건은 잘 받았습니다. 사실 처음엔 며느리의 오라비인 그대를 믿지 않았습니다만, 이 일을 통해 분명한 의지와 담대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같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기회며, 하늘이 내린 계시지요.

이후의 일도 성공한다면, 약속한 대로 그대의 눈엣가시 같은 누이 역시 재산을 노리고 시부와 남편을 죽인 살인자가 되어 죽게 될 것입니다.

좋은 소식으로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비에트로부터.>

“배달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시부께서 음독사를 당하셨어요. 제가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올린 차를 드신 후에요.”

읽자마자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쓰인 편지의 내용은 제법 섬뜩했다. 눈앞에 앉은 여자의 오라비로부터 무언가를 배달받아, 그것으로 남편을 죽이는 것에 성공한 시모나 제 동생과 제부를 죽이려던 오라비나……. 인간 말종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일이라는 게 부인의 남편을 해치려던 일입니까?”

“맞아요.”

특히 시모의 경우,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차지하려던 것에서 멈추지 않고 제 아들까지 죽여 없애려던 것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며느리를 두 사람이나 죽인 살인자로 만들어 내쫓을 생각이었다는 점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리 변호사로 일하면서 온갖 꼴은 다 본다지만…….

“남편은 무사합니까?”

“네. 아버지께서 구해 주셨어요.”

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 라나가 그 손을 움켜잡아 손등 위를 다독여 주었다.

“남매 사이가 좋지 않으십니까?”

“어릴 적부터 많이 다퉜습니다. 아버지께서 편애가 심하셨거든요. 시집갈 때 지참금으로 재산의 많은 부분을 넘겨주시기도 하셨고요.”

“흐음……. 그렇다면 남편과 시모의 관계는?”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혼할 때만 해도 정말 사이가 좋았거든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신한다는 듯 대답했다.

알폰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인이 모를 뿐이지, 이런 경우에는 무조건 숨겨진 사연이 있다. 원한이 아니고서는 이렇게까지 사람이 잔혹해질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오라비가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기는 했어도, 저와 저희 집안은 정말 무관해요.”

여자는 이제 숫제 애원하고 있었다.

알폰소가 쓰고 있던 안경을 밀어 올리며 편지를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괜찮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알폰소의 말에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라나의 얼굴에도 얼핏 그런 기색이 돌았다. 알폰소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그저 워낙 가까운 사이라 그러려니 짐작하고 말았다.

“정말, 정말로 괜찮을까요?”

“뭐 일단, 둘이 시부 살해부터 모의하여 부인을 해치려고 하는 것부터가 부인이 관여되지 않았다는 증명이지 않겠습니까? 만일 부인과 오라비의 이해관계가 맞았다면, 남편만 죽이고 상속을 받으면 되는 것을 시부까지 살해할 이유는 더더욱 없으니까요. 게다가 부인의 아버지께서 남편을 구해 주었으니, 재산을 얻기 위해서 남편을 해하려고 한 적이 없다는 것도 되겠고요.”

알폰소가 말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편지와 부인께서 말씀하신 것을 종합하면, 오라비가 독자적으로 시모와 꾀한 일 정도가 되겠군요.”

다행이라는 듯 마주 앉은 여자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 다행이에요.”

“다만 이 서신을 증거로 제출하면, 재판하는 동안 부인의 집안이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불가피해요.”

여자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알폰소는 제 미래 의뢰인의 안색을 기민하게 살피며 덧붙였다.

“하지만 누명을 벗기 위한 일이니까요.”

“…….”

“부인의 집안을 드러내지 않고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셔도 됩니다만,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건 부인도 아실 듯하고요. 오라비가 저지른 일과 부인, 부인의 집안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판결은 확실히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알폰소가 자신했다.

여자가 흐릿한 얼굴로 고민하며 라나를 바라보았다. 라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결연한 얼굴로 알폰소를 재차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알폰소 씨께 맡길게요.”

“자세한 내용이 좀 더 필요할 테니, 추가적인 증인 같은 게 있다면 전달해 주세요.”

여자가 이후에 사람을 보내겠다며 웃었다.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의 손 떨림은 한결 멎어 있었다.

알폰소는 라나와 그의 새로운 고객을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이 소란하군요.”

라나가 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훤한 밖과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을 언급했다.

“왕궁과 가깝다 보니 별별 소리가 다 들린답니다. 그럼, 두 분 모두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알폰소가 가볍게 대답하며 빙긋 웃었다.

두 여자를 마차에 태워 보낸 알폰소는 하인에게 코냑 한 잔을 가져올 것을 부탁하고 침실로 향했다.

“코냑 가져왔습니다.”

“이리 줘.”

알폰소가 하인으로부터 잔을 받아 들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폰소의 집은 왕궁과 가까워 일이 터지면 알기가 쉬웠다. 늦은 밤인데도 성벽 너머가 밝고 소란했다. 아마 곧 근위병들에 의해 흩어지겠지만, 시위하는 자들일 것이다.

반역을 도모했던 자들이 줄줄이 끌려와 감옥에 갇히던 날. 길거리에는 현왕을 죽이려 했던 역당들의 이야기가 어지러이 떠돌았다.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분노의 방향은 두 가지로 뻗어 나갔다.

반은 감히 왕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에 기함하고 분노했다. 갑작스레 왕을 잃은 나라가 혼란에 잠길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나머지 반은 왕실의 현주소에 분노했다. 알폰소가 그랬듯, 배가 불러 고민이 없으니 치고받고 싸우고 있다며 성을 냈다. 이런 이들을 하늘이 내렸을 리가 없다고, 이런 자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으냐고 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물론 가장 앞에서 그 주장을 펼치고 있는 건 알폰소와 같은 부르주아 세력이었다.

“뭐, 왕비가 있으니 괜찮으려나.”

왕세자 시절의 왕과 혼인한 직후부터 괴롭힘에 시달렸다던 현재의 왕비가 지지리 복도 없다는 얘기는 덤이었다.

사람들은 로잘린을 몹시 가엾어했다. 왕세자비일 때는 모함으로 아이를 잃고, 왕비가 되어서는 그 남편을 잃을 뻔했다니.

그 와중에 가문은 선왕 시해로 엮여 있으니, 까딱하면 가문의 위세마저도 잃게 생기지 않았나.

평민 출신에서 왕세자비가 되었으니, 이제는 엄연한 왕족이어도 그 처지에 이입하는 이들이 많았다.

모두가 그 처지를 가엾어하고 있으니 설마 자리까지 빼앗진 않겠지.

왕비의 하녀인 마리가 라나와 함께 찾아왔었다는 것을 알 길이 없는 알폰소는 무심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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