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08)화 (108/151)

# 108.

거칠게 문이 닫히며 선왕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침실로 돌아온 선왕비의 시선이 간신히 몸을 추슬러 벽에 기대어 앉은 클로티 부인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숨 쉬기가 마땅치 않은 듯 거칠게 쉬는 숨에 색색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라비앵 클로티. 재밌는 짓을 했더구나.”

웃음기가 섞인 듯하지만,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이 클로티 부인을 깔아 보고 있었다. 클로티 부인의 시선은 간신히 선왕비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클로티 부인을 지나쳐,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을 대충 소파 위로 던져 버린 선왕비가 숄을 대충 깔고 앉았다.

“네가 이미 로비엔에게 내가 친모가 아니라는 것을 말했다고 들었어.”

“…….”

“그건 네 몫이 아니란 걸 알았을 텐데도, 주제넘게 말이야.”

로비엔의 출생을 말로 고백한 적은 없다. 그저 로잘린이 알아챘을 뿐.

“덕분에 그 애가 아주 차근차근 정리하고, 내게 되돌려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더구나.”

선왕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20년 넘게 별러 왔는데, 이 꼴이 났다는 게…….”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입가에 드리웠다. 표정을 보고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웃는지 우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웃고 있다고 해도 진심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왕비는 식어 빠진 헛숨을 토해 내며 눈을 감았다 떴다.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왕자님이 날 죽이겠다더구나.”

툭 던진 말에 클로티 부인이 반쯤 뜨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선왕비는 소파의 등받이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시선이 맞부딪쳤다.

“왜 놀라니? 당연한 일이잖아. 저를 죽이려던 나를 죽이는 건.”

“하, 하지만. 아무도 모르, 모르잖습니까.”

오랫동안 선왕비를 모셨다. 왕세자비 시절 로잘린의 시녀장으로 자리를 지키는 동안 벌어진 일은 다 알 수 없었지만, 선왕비가 어떻게 일을 준비해 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클로티 부인을 옆에 앉혀 두고 대화한 날처럼, 피베체 공작과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피베체 공작으로부터 내용을 전달받은 카를로스 백작이나 리만 후작이 선왕비도 관련되었다 주장한다 한들, 피베체 공작이 홀로 저지른 일이라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내게는 로잘린 보가트가 죽을 때까지 꺼낼 수 없는 증거가 하나, 그리고 너라는 증인이 하나 있어.”

“…….”

“하지만 이미 날 한 번 배신한 네가 두 번이라고 못 할까?”

클로티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녀의 세심한 손길로 제 아들처럼 키워 낸 왕자님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복수를 마음먹은 친구 역시 안타까웠다. 그들을 기만한 자는 어디에도 없는데, 배신당한 자들만 몸부림치고 있는 이 현실이 지옥 같았다.

“난 이미 끝났어. 네 덕분에 곧 내 모가지는 단두대에서 잘리겠구나.”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죽여 묻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클로티 부인이 울며 소리쳤다.

“어차피 죽을 목숨, 그대를 동무라도 삼으란 소린가?”

그러나 선왕비는 고개를 저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제야 클로티 부인은 선왕비의 작은 두 어깨가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가, 제가 두 분을 만나 뵙겠습니다. 선왕과 그 정부가 당신을 농락한 일을, 그런데도 자식으로 받아들여 왕까지 되게 해 준 폐하의 은혜를 잊으시면 안 된다고요. 지금은 그저, 레이첼 후작 부인이 선왕을 해친 것에 화가 나서, 그 아들인 폐하께 잠깐 복수심에 눈이 먼 것이었다고…….”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용서의 여지가 없어 보였던 로비엔을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선왕비 역시 생각했을 법한.

“이미 다 끝났어. 나는 어차피 죽을 테니,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 그대라는 목숨을 하나 더 거두는 것은 의미가 없지. 떠나.”

“폐하!”

“가랄 때 가! 아까처럼 내가 눈이 돌아 그대를 죽이길 바라? 살아 봤자 그때처럼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르는데 미적거리고 싶어?”

선왕비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나 물기에 젖은 목소리는 클로티 부인을 향한 배려였다.

클로티 부인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엉엉 울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모든 감정이 회한에 젖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클로티 부인은 한참이나 서럽게 울다가 몸을 일으켰다. 선왕비는 이미 얼굴에서 손을 뗀 채, 그녀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클로티 부인은 그녀의 주인이었던 사람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죄송했습니다. 만에 하나 폐하께서 저를 찾아내시더라도, 절대로 증언하지 않겠습니다.”

선왕비는 되돌아보지 않았다. 클로티 부인은 그 곧은 뒷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고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때 그대를 배신하고 죽이려 한 것은, 나도 사람이라서…….”

“…….”

“늘 마음에 걸렸어.”

막 문의 손잡이를 붙잡는 순간,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하겠다 말한 것은 아니지만 사과나 다름없었다. 클로티 부인은 다시 한번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고 문을 열었다.

어릴 적 친우가 문을 닫고 인기척을 지운 순간, 선왕비는 내내 곧게 세우고 있던 허리를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며 무너졌다.

붉은 하늘 가장자리부터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선왕비는 무감하게 그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그래, 늘 마음에 걸렸어.”

아이의 것처럼 보드랍게 반짝이는 입술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죽여 버리지 못한 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매끄럽게 휘어진 입가에는 즐거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가끔 거짓은 진실보다 더 아름다운 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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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은 푹신한 침대 위에서도 뒤척였다. 잡다한 생각으로 수런수런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제게 머리를 베라고 팔을 내준 로비엔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험한 일을 겪고도 온종일 말을 달려 제게 온 사람이었다. 다친 어깨를 살필 생각조차 않고서.

그 생각을 하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보가트 가문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커튼을 쳤음에도 들이치는 달빛이 그의 아름다운 백금발 위에서 수백 개의 빛깔로 부서졌다. 그가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만큼, 로잘린도 이 아름다운 빛을 영원히, 그리고 안온하게 지키고 싶었다. 사랑을 지키는 것은 둘 모두의 일이지,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이 있었다. 로잘린은 발란과 선왕비가 주고받은 서신, 로비엔의 비밀, 그리고 재판의 연결 고리에 대해 계속 곱씹었다.

선왕비는 선왕 시해를 목적으로 비소를 전달받았고, 피베체 공작가가 로비엔과 로잘린을 죽이려던 계획 역시 모두 알고 있었다. 가문 전체가 역모에 가담한 셈이었다.

하지만 발란이 그 일과 관련된 것은 로잘린도, 드마셸도, 가까운 리리엔조차도 몰랐다. 드마셸은 로비엔을 위기에서 구하기까지 했다.

물론 둘 다 역모의 죄로 다루어져야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왕을 죽이고 현왕마저 죽이려던 자와, 선왕을 죽이고 현왕을 살린 자의 처분이 같을 일인가?

‘마차 밖이 왜 이렇게 소란하지?’

문득 공작저에서 마차를 타고 수도를 지나던 길, 유난히 소란스럽던 길거리가 기억이 났다. 로비엔이 마차를 두어 번 두드려 마부에게 묻자, 로잘린이 마차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들 역시도 보가트 공작가를 둘러싸고 있던, 공격하던 근위병들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그들 뒤로 따르고 있는 근위병들의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귀족인 치들에게 함부로 손가락질하거나 욕할 수는 없으니 소극적인 태도였으나, 분명 긍정적인 얼굴은 아니었다.

‘우리 왕비 전하 인생 안타까워서 어쩔까!’

누군가 그렇게 소리치는 목소리도 들렸다. 마치 로잘린이 궁에서 도망 나왔다가 다시 끌려간다고 생각하듯이.

퍼뜩 한 가지 깨달음이 스쳤다. 백성들은 왕가에서 괴롭힘당하던 자신을 가여워한다. 게다가 법원의 구성원 중에도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 귀족들이 많으니 어쩌면 협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당신과 관련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조금의 불확실성도 용납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문제라니, 우스운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로잘린이 조심스럽게 로비엔의 이마를 손끝으로 더듬어 만지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불확실성을 제거해, 그를 안심시켜 주면?

언제까지고 그의 자비와 그가 만들어 놓은 평화에만 기대어 살 수는 없었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로잘린 스스로였다.

잠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고민하던 로잘린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빠져나왔다. 이미 깊은 밤이라, 문 앞을 지키는 호위병들을 제외하고 궁은 온통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로잘린은 잠옷 위에 커다란 숄을 둘러 몸을 가리고 문밖으로 나섰다. 깊이 잠든 로비엔은 로잘린이 자리를 비우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조용히. 폐하의 단잠을 깨우지 마.”

움직이려는 호위병들을 막아 세운 로잘린이 걸음을 옮겼다. 두어 번의 노크 소리에 문 안쪽에서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예요, 라나.”

“폐하, 이 늦은 시간에 어찌…….”

로잘린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라나가 준비되지 않은 차림으로 황급히 문을 열었다.

“자고 있는데 미안해요. 급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편히 하세요.”

깊은 밤중에 타인의 수면을 방해하는 것은 귀부인의 덕목이 아니었다. 그러나 라나는 그런 것을 도통 지적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로잘린에게만큼은 지독하도록 물렀다.

“알폰소 가드가 칼라브리아 최고의 변호사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허황된 말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재판장에 막 들어섰을 때, 알폰소 가드를 고용했다면 무조건 이기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재판 중에도 말솜씨가 무척 유려하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비밀 유지에 무척 신경을 써 주었던 터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나가 신중히 대답했다. 그가 자신의 명예를 구해 주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잘린으로부터 목돈을 수임한 대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편지 하나를 써 줄 테니, 메르센데티 자작가에서 마리를 데리고 알폰소 가드를 찾아가요.”

“알폰소 씨를요?”

라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변호사를 찾아 무엇을 하려는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어서였다.

“그의 뛰어난 능력에 감명받은 라나가 새로운 사건을 연결해 주는 사람인 척해 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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