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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07)화 (107/151)

# 107.

선왕비가 그의 허락 없이 자리를 떠나고도, 로비엔은 자리를 지켰다. 막 오후의 햇빛이 들이쳤던 공간 안에는 날카로웠던 평화 대신, 불안한 노을빛이 어름어름 깔리고 있었다.

‘네 입으로 직접 비밀을 밝히는 순간이 무척이나 기대되는구나.’

한때는 어머니로 믿고 살았던 여자. 마침내 발톱을 드러내고 가면을 벗은 선왕비는 무척이나 나른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의 혼란과 절망을 비웃는 얼굴은 마치 어릴 때 동화 속에서나 보았던 마녀 같았다.

“폐하, 왕비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가 상념에 잠긴 그를 깨웠다.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음을 정리한 로비엔이 평상시와 같은 얼굴로 낯을 갈아 끼웠다. 그러고 보니 이 역시 그녀에게 배운 것이라는 사실이 생각나 헛웃음이 터졌다.

“안으로 드시게 해라.”

문이 열리고 로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쉬기는 했는지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 낯빛이었다. 제 속이 어떻게 엉망이 되었든, 그 하나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홀로 계셨다고 들었어요.”

“생각을 좀 하느라고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 몰랐습니다.”

대화를 마치자마자 돌아간다고 약속했으니, 내내 기다렸으리라. 로비엔은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무슨 말을 했기에 이리 오래도록 곱씹고 계세요?”

그러나 로잘린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선왕비는 혀끝에 칼이 달린 자라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난도질했을 것이다. 로잘린은 그렇게 짐작했다.

“반역에 대해서는 발뺌을 하더군요. 모르는 일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요!”

“맞아요. 그럴 리가 없지.”

로잘린이 선왕비가 몰랐을 리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로비엔이 긍정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하고 싶지 않으니, 사실관계를 모두 파악한 후 정당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하던가요?”

로잘린이 불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이 지경까지 와서도 뻔뻔하게 부정할 줄은 몰랐다.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니만큼 불안함은 더 했다.

“어디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하더군요. 유도하는 질문에 하나도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로잘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피베체 공작가, 왕제들, 그리고 피베체 공작가의 하수인이나 다름없는 카를로스 백작가가 모두 연관된 역모였다.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선왕비만이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증거를 남기지 않은 모양이에요. 자신도 있어 보였고.”

증거. 단어 하나에 로잘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자신이 내게 품은 악의를 증명해서라도 역모에 엮고 싶다면, 재판장에서 내가 정부의 아들이라고 말해 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한다면 인정하고 죽겠노라고.”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정말로 증거를 남기지 않은 덕분이라면.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 지는 오래였지만, 이토록 무서운 사람일 줄은 미처 몰랐다.

스스로 제 정통성을 훼손하고, 논란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라고?

허벅지 위에 올려 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틈새로 말려든 드레스 자락이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그렇게 만들지 않을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을 알고 있는데,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

발란이 선왕비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그가 선왕 시해에 사용된 비소를 제공하고, 당신과 나를 죽인 후 보가트 상단을 차지하기로 거래했다고.

그 사실이 알려지면 보가트 공작가가 폭삭 주저앉는 것은 물론이고, 로잘린이 쓴 왕관 역시 무사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다못해 타고난 혈통이라도 좋았다면 모를까, 평민이었던 주제에 가문이라는 뒷배까지 잃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지 않은가.

로잘린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두었다.

“증거들을 찾다 보면 다른 실마리가 보일 겁니다.”

로비엔은 그런 로잘린의 태도를 자신에 대한 염려로 본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좋아하는 산들바람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는데도 로잘린은 웃을 수 없었다.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폐하.”

뭘 어쩔 수가 없는데? 차마 묻지 못한 질문으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로잘린은 이제 누구보다 로비엔을 잘 알고 있었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모두 털어놓았을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사람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를 후벼 파며, 모두의 앞에서 난도질당하는 상황을 조금도 바라지 않으므로.

자신은 그런 사람의 짝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비밀로 두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로잘린이 바닥으로 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자신에게만큼은 늘 따사로운 눈이 언제나 그랬듯 모든 움직임을 기민하게 살피고 있었다.

“선왕비가 선왕을 시해했다는 증거, 그리고 이 역모에 참여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그게 무슨…….”

정정당당함을 내세우며 살아온 삶은 아니었다. 드마셸과 발란의 뒤통수를 치고 상단을 빼앗아 온 것으로만 유추해도 로잘린의 성격과 가치관은 명백했다.

지금도 매한가지였다. 사랑 앞에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여전히 가지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서라면, 혹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겁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가 상처받는 일은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와 선왕비가 주고받은 편지가 있어요.”

혹시나 그가 자신을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만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자세히 말해 주겠어요?”

로비엔이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어 왔다. 로잘린이 허리를 펴고, 짧게 호흡한 뒤 로비엔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폐하께서 사르데 숲으로 출발하셨던 날, 아시다시피 저는 보가트 저택으로 갔어요.”

그리고 로잘린은 자신이 아는 바를 처음부터 솔직하게 전달하기로 했다.

“막 저택에 도착했는데 큰 소리가 나더군요. 아버지께서 큰 소리로 발란을 욕하고 계셨어요. 늘 있던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들리는 내용이 가관이었어요. 그가 선왕을 죽이는 데에 참여했다 하더군요.”

믿기지 않아서 자신이 왔다는 것도 알리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굳은 듯 서 있었다. 로잘린을 실내로 안내한 시종 역시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여전히 눈앞의 모든 광경이 선명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던 젖은 드레스, 어떤 얼굴로 로잘린을 보아야 할지 몰라 어깨너머로 힐끗 얼굴을 살피는 시종, 편지를 손에 쥔 채 소리를 지르는 드마셸과 어쩔 줄 모르는 리리엔.

“저를 데려와야 한다고 소리치는 데 정신이 들어서, 아버지가 들고 있던 편지를 빼앗았어요. 다 적혀 있더군요. 바트만의 배달부를 이용하여 받은 것은 잘 사용하였고, 폐하와 저를 죽인 뒤 상단을 발란에게 돌려주겠다고요.”

그 순간은 분노도 분노였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앞이 캄캄했다. 왕을 죽이는 일은 역모, 그리고 역모는 모든 식솔들의 처분에 예외가 없었다. 가문의 이익을 해쳐서라도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발신자, 수신자의 이름과 내용이 명확하고, 피베체 가문의 문장도 찍혀 있어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될 거예요.”

사실을 말하기 전까진 계속 두려웠는데, 막상 말을 끝내자 평온해졌다.

“증거로는 충분하죠.”

로비엔의 얼굴이 담담하고, 왜 여태 몰랐냐는 듯 자신을 비난하는 기색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증거로 활용할 순 없어요.”

그러나 다음 순간, 로잘린은 의아해졌다. 명백한 증거를 두고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이 무척 단호하게 들려서였다.

“어째서요?”

“반역에 해당하는 죄가 어떤 처벌을 받는지, 모르지 않잖아요.”

로비엔이 애써 돌려 대답했다. 가문의 일원이 모두 처벌받으리라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보가트 가문은 무사할 수 없어요.”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죠.”

“로잘린.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그가 내뱉은 말이 현실화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이제야 간신히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 가려 하는데. 왕의 자리를 지킨다 한들 로잘린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당신을 이용하면서까지 이 자리를 지킬 생각은 없어요.”

로비엔에게는 드물게, 무척이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폐하. 이건 이용이 아니라…….”

로잘린이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추었다. 사실 그녀도 발란과 선왕비가 주고받은 서신을 증거로 제출하기에는 겁이 났다. 오래오래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으니까.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졸아붙고 눈물이 터졌던 게 고작 어젯밤의 일이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 증거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얘기를 꺼내 보았지만, 로비엔은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위험을 감수해야 해요.”

“…….”

“로잘린, 나는.”

로비엔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의 혼란을 읽을 수 있었다. 평온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속내는 들끓고 있으리라.

그는 고작 며칠 사이에 자신이 정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평생을 어머니로 알고 살았던 사람은 사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할 만큼 증오하고 있었고, 그 남편 역시 죽였다.

“보가트 가문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그렇지만 여기에 멈추어 서 있을 수는 없지 않나. 그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법정에서 인정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나. 그 두 가지 모두는 선왕비가 바라 마지않는 일일 것이다.

“증거가 없으리라는 것은 내 추측에 불과해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야기들이 갑자기 등장할 수도 있고.”

반론할 수 없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그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며 다른 증거를 찾아보는 편이 둘 모두에게 안전할 테니까. 누구 하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지 않아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당신에게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

“약속해요.”

로비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약속했다.

“……폐하의 말에 단호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제가 싫어요.”

로잘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얄팍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희생정신과 그걸 이해하는 그의 마음으로 온통 혼란스러웠다. 이 사랑이 신파가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얼마쯤의 자괴감이 뒤따랐다. 그 역시 그럴 터였다.

“어차피 로잘린 당신이 마구잡이로 우기고 들었어도 듣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로비엔은 단호했다. 만일 증거가 진실로 그 하나뿐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해도 제 대답은 명백하다고.

“나는 이제, 당신과 관련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조금의 불확실성도 용납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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