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마차가 멈추어 섰다. 거의 며칠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쉬지도 못한 것처럼 왕 내외는 무척이나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선왕비께 만남을 청했나?”
“예, 폐하. 말씀하신 대로 전달하였습니다.”
밀리언이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대답했다.
“로비엔.”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로비엔과 로잘린의 시선이 동시에 한 방향을 향했다.
늘 그랬듯 화사하게 꾸민 선왕비가 아름다운 꽃처럼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꽃이 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니…… 이 어미는 무척 기쁘구나.”
“무사히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하셨나 봅니다.”
로비엔은 다정한 어미인 양 기쁨을 표현하는 얼굴에 미소로 화답했다. 당장이라도 무언가 쏘아붙이고 싶은 듯 아랫입술을 깨문 로잘린의 손을 잡아 다독이는 침착함까지 선보였다.
“어떻게 그런 말을…….”
선왕비가 정말로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농담입니다.”
“…….”
“보시다시피 꼴이 이래서, 금방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로비엔이 부드럽게 이야기하며 먼저 돌아섰다. 로잘린은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그의 뒤를 따랐다.
묘하게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에 예민한 아랫것들이 모두 어깨를 굳혔다. 왕과 선왕비 사이의 미묘한 불편함은 내부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직전의 상황도 제법 아름다운 모자 상봉처럼 보였지만, 그 누구의 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로비엔은 로잘린을 처소로 들여보낸 후 제 침실로 돌아왔다. 이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에게는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로비엔이 물을 채운 욕조에 담그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곁을 지키던 아랫것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로잘린?”
막 트라우저만 걸쳐 입었을 때였다. 로잘린이 무엄하게도 왕의 허락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로비엔은 엉망이 된 몸을 씻고, 옷만 갈아입고 나가려 했던 계획이 엉망이 되었음을 짐작했다.
화가 난 것 같은, 하지만 어딘지 서러워하는 얼굴. 무슨 까닭으로 이리 갑자기 들이닥쳤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코멧에게서 그의 부상에 대해 들었을 터였다. 로비엔은 난처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는 로잘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스친 상처예요, 로잘린.”
“살이 터졌잖아요.”
피는 이제 멎었지만, 총알에 스친 상처는 그리 작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환부는 금방이라도 다시 터질 듯 위태로웠다. 혹시라도 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이런 몸으로 종일 말을 달려서 저에게 왔을 마음을 생각하자 울컥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치료는 받고 오셨어야죠.”
“그랬으면 늦었을지도 몰라요.”
로비엔이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로잘린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그가 입을 셔츠를 달라는 듯 시종을 향해 눈짓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발견한 로잘린이 그에게 다가서는 시종을 손으로 막아 세웠다.
“궁의를 데려왔어요.”
“로잘린.”
“어차피 기다린 거, 좀 더 기다리라고 하세요.”
로잘린이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코멧이 그토록 치료를 받아야 한다 했을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로비엔이지만, 파르랗게 날이 선 제 비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비의 뜻대로 해요.”
상체를 헐벗은 로비엔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몸 위의 지저분한 상처를 목도한 로잘린이 결국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궁의를 들여.”
상처에는 손을 댈 수 없어, 그 근처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는 로잘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쩌면 다시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사람.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애틋해졌다.
로비엔은 궁의가 다친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제가 더 아픈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로잘린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걱정으로 어깨를 더듬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듯이.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큰 움직임은 조심하시고, 씻을 때도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상처 부위에 이물질이 닿지 않도록 천을 감아 처치를 마친 궁의가 조언했다. 로비엔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내내 드러나 있던 상체에 옷을 걸쳐 입었다.
“좋은 얘기를 하지는 않을 테니 그대는 쉬고 있어요.”
“폐하.”
“대화를 마치는 대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로비엔이 드러난 로잘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끝내 자신을 떨치고 가겠다는 의사에, 눈을 세모꼴로 뜬 로잘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아양을 떨며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로비엔은 미적거리며 저를 붙잡는 로잘린의 손을 떨치고 돌아섰다. 그 몸을 품에 안고 하염없이 늘어지고 싶어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선왕비께서는?”
“내실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며칠 만에 보는 밀리언이 로비엔을 수행하며 대답했다.
“며칠 새에 얼굴이 반쪽이 된 것 같은데.”
“주군이 위험한데 신하가 되어서 잘 먹고 잘 잤다면 경을 칠 일이 아닙니까.”
밀리언이 그를 걱정하느라 이렇게 된 것이라고 담담히 대답했다. 그 주인에 그 신하라, 걱정했다고 말하는 중에도 극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바가 없었다. 물론 그의 연기는 로비엔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문을 열어.”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배경 안에, 얌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는 선왕비가 있었다.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않도록 해.”
로비엔이 선왕비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명령했다.
모두가 물러나고, 오로지 둘만 남았다. 상대방 쪽에서 평온을 가장하고 있으니 똑같이 대응해 줘야겠지. 로비엔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온화한 낯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렸군요.”
“괜찮다. 방금 사냥터에서 다쳤다는 얘기를 들었어. 상처는 괜찮니?”
먼저 입을 연 것은 선왕비였다. 로비엔은 자리에 앉으며 긍정했다.
“총알이 어깨를 스쳤습니다.”
“저런, 어쩌다…….”
“방아쇠를 당긴 자가 앨런이었지요.”
놀란 듯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총알이 스친 것보다 그게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자리가 늘 배신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자리인 줄은 알았으나, 제 형제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나 봅니다.”
로비엔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다는 듯,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선왕비를 직시하는 얼굴 그 어디에도 슬픔이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부정할 수 없는 반역이었습니다.”
여태 왕의 재목으로 나고 자란 것. 감정을 숨기는 일 정도는 쉬울 것이다. 선왕비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로비엔의 얼굴, 목소리,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어떠한 상처라도 찾아보려는 듯이.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무난히 대처하였으나, 반역에 참여한 자들의 명단이 믿기지 않는 터라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기에.”
“……누구이기에?”
궁금하지도 않을 질문이건만, 선왕비는 모르겠다는 듯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로비엔에게 질문했다.
“피베체 공작, 리만 후작, 카를로스 백작, 그리고 앨런과 마틴.”
“…….”
“선왕비께서도 관여하셨음을 압니다.”
로비엔의 얼굴에서 평온을 가장한 낯이 떨어져 나갔다.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는 그대로 그녀를 집어삼킬 파도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선왕비는 피하지 않고 고요히 그 눈을 마주했다.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겠구나.”
“…….”
“왜? 왕비를 선왕 시해 혐의로 잡아 오라고 해서? 아무 죄도 없다면 왜 궁을……!”
“그런 일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로비엔이 단호한 목소리로 발뺌하는 선왕비의 말을 끊었다.
“다만 왕제들과 고위 귀족 가문들이 역모를 꾀하고, 마침 보가트 공작가에 선왕 시해의 죄를 물으려던 그 순간의 절묘함에 대하여 생각했을 뿐입니다.”
“…….”
“내가 붙잡혔다면, 혹은 그곳에서 죽었다면 누명을 같이 지게 되지 않았을지.”
모든 일에는 명분이 있다. 아무 명분 없이 반역을 저지르려고 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로비엔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의심 때문에 내게 누명을 씌워 죄를 묻기라도 할 참이니?”
“개인적인 사감이나 짐작으로 처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선왕비가 서운함, 그리고 노기가 섞인 얼굴로 로비엔을 노려보았다. 이전이라면 저 감정 표현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비엔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랑하지도 않는 그를 사랑하는 척 연기했던 선왕비를 알게 되었다.
“선왕을 시해하였다 의심받는 보가트 공작가의 일도, 사냥터에서의 역모도. 역적들을 취조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마땅한 형벌을 내릴 예정입니다.”
로비엔은 그 모든 일에 당신이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피해 갈 수 없으리라고.
“그리하였는데도 그들이 내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나를 애매하게 몰아세우려다간 네가 역풍을 맞을 수 있단다.”
사건의 순서상 선행 재판은 보가트 공작가의 왕족 시해 혐의를 다루는 재판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보가트 공작가가 선왕을 시해하였다는 판결을 받게 된다면, 로비엔은 공범이라는 낙인을 면키 어려웠다.
그렇게 되면, 선왕을 시해하고 왕이 된 자에 대한 역모가 되므로 역적들이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리라.
“아무리 피베체 공작가가, 앨런과 마틴이 역적이 되어도 나는 네 어미지 않니.”
만일 선왕 시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존재했다.
보통의 역모는 연좌제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선왕비는 피베체 가문의 일원이기보다는 왕실의 일원으로 산 세월이 더 길었고, 왕의 어머니였다. 그것도 죄를 부정하고 있으며, 겉으로는 그를 해할 이유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 압니다.”
로비엔의 말에 선왕비가 멈칫했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의중을 가늠하는 눈이 날카로웠다. 이내, 선왕비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매끄럽게 웃었다. 핏빛으로 붉게 만개한 장미를 닮아 있는 미소였다.
“라비앵 클로티가 어디까지 말했니?”
선왕비가 어딘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전부.”
로비엔이 가감 없이 대답했다.
“아, 전부.”
로비엔의 대답을 잠시간 곱씹던 선왕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전부 다 털어놓았구나.”
“…….”
“너를 그리 아끼는 것이니 그 말은 아직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고, 그의 근간을 흔드는 일. 그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기회를 노렸다가 로비엔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는 일, 그리고 그 절망을 구경하는 일은 그녀가 기다려 마지않던 일이었다.
그런데 라비앵 클로티, 그것이 모조리 망치고 말았다.
아주 우스운 것을 본 듯 소리 내어 웃던 선왕비가 어느 순간 우뚝 웃음을 그쳤다. 눈은 열로 화끈거리고, 눈가가 숨기지 못한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렴.”
정면으로 로비엔과 반목하게 된 이상, 거짓으로 감정과 행동을 꾸며낼 이유가 없었다. 선왕비의 눈동자에 감추지 않은 공격성과 적개심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네가 로네 비에트의 친자라고 밝혀 나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다면 말이야.”
예로부터 왕의 정통성은 그 피로부터 왔다. 왕과 왕비의 장자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왕이 될 자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사생아는 왕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취급이 달랐다.
“천박한 왕의 정부. 재판장에서 그 계집의 아들이라고 말해 봐.”
“…….”
“네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그래서 내가 널 죽이려고 했다고 증명해 봐. 그렇다면 내가 기꺼이 인정하고 단두대에 설 테니.”
선왕비가 비죽이 웃었다. 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