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05)화 (105/151)

# 105.

왕실의 근위대는 왕의 명을 최우선으로 따르도록 훈련받았다.

아무리 선왕비가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말했어도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착해 말에서 뛰어내리는 왕을 보자마자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사한 왕비를 만난 왕이 보가트 저택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왕과 왕비를 수행하기 위해 일렬로 늘어섰다.

“다친 자들은 모두 병원에 데려가 치료해 주고, 죽은 자들은 집에 마땅한 값을 치러 줘.”

“그리하겠습니다.”

“그대에게도 따로 연락하지.”

왕비는 다소 지쳐 보였지만, 저택을 지키는 집사에게 뒤처리를 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곁을 지키고 서 있는 왕 역시 너저분한 행색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서늘해 함부로 그들이 한 행동을 변명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 왕이 왕비를 보호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대들의 잘잘못은 차후에 논하도록 해.”

로비엔이 애초에 그럴 상황을 막아 버린 것도 변명할 수 없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로잘린.”

집사에게 마지막까지 처리할 일들을 명하던 로잘린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달빛을 등지고 선 로비엔이 열린 마차 문 앞에 서 있었다. 로잘린은 정면에 선 그녀의 남자를, 그리고 등 뒤에 놓인 보가트 저택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로비엔과 처음 혼담이 오갈 땐, 언젠가 이혼하고 돌아와 이 저택도 집어삼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로비엔은 당연히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테고, 자신이 삶에서 애착을 가진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저깟 것보다, 눈앞에 선 남자가 더 가지고 싶었다. 사실 저택보다, 상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더 큰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로잘린이 비죽 웃으며 걸음을 뗐다. 로비엔 곁에 선 것을 후회하지 않는 만큼, 그에게 다가가는 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요.”

로잘린이 손을 뻗자, 로비엔이 그 손을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왕과 왕비가 모두 마차에 오르자, 마차의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바퀴가 덜덜거리며 굴러가는 정돈된 길의 끝. 새파란 달빛이 보호하듯 그 뒤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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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막 마친 시간.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어 책장을 팔락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선왕비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도 떠올라 있었다.

그녀의 승리를 자신한다는 듯이.

이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면 모두 결판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로비엔도, 로잘린도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클로티 부인은 초조하게 떨리는 손을 감싸 숨기며 선왕비를 응시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 덕분인지, 관심이 없는 덕분인지 선왕비는 그런 클로티 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만일 왕이, 그리고 왕비가 잘못되었다면 어떡하지?

손길 닿지 않는 곳 하나 없이 귀하게 길러 낸 소중한 나의 왕자님.

클로티 부인은 체념과 절망이 섞인 눈을 감았다.

“폐하.”

그 순간, 문밖에서 선왕비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왕비가 몸을 바로 하며 들어올 것을 허락했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보가트 공작가에 붙여 두었던 세작과 리만 후작 부인이었다.

“리만 후작 부인은 나가 봐.”

“예, 폐하.”

리만 후작 부인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나자, 초조한 얼굴을 한 세작만이 남았다.

“무슨 일인데 이 시간에 들었지?”

“왕이 돌아왔습니다.”

선왕비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마자, 세작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뭐?”

선왕비가 들고 있던 책을 세게 쥔 채 되물었다.

“어젯밤, 왕이 보가트 공작가를 찾아와 왕비를 구해 갔습니다.”

어떻게?

선왕비가 혼란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모든 것은 극비리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로비엔은 아무것도 알지 못해야 맞았고, 그 사냥터에서 멀쩡한 몰골로 살아 돌아오지 못해야 했다. 돌아오더라도 그가 위풍당당하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끌려와야 했다.

“왕비를 구해 가?”

그런데 멀쩡하게 살아서, 그 비까지 구해 냈다?

“예. 근위병들이 막 저택을 뒤지고 있을 때 나타나서…….”

세작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들이 꾀한 모든 일이 엉망이 되었고, 선왕비의 분노는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서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예?”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최소의 인원으로만 꾸렸어.”

그것도 피베체 공작과 선왕비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자들만 참여한 일이었다. 그들의 모임 역시 드러난 곳에서 이루어졌을 리는 없으니, 한갓 아랫것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숨어 듣고 전달했을 리도 만무했다.

“배신자가 있었다는 얘기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면서 명확한 직감은 그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궁 안팎으로 드나들며 왕과 왕비에게 접촉할 수 있었으니까.

세작을 내보내고 손톱을 잘근거리던 선왕비가 문득 행동을 멈추었다.

그들에게 사적으로 가장 접촉이 쉬운 것은…….

“어떻게 생각해, 라비앵 클로티?”

반응을 떠보기라도 하듯, 선왕비의 시선이 곁에 선 클로티 부인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반응을 샅샅이 살펴보는 칼날 같은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클로티 부인은 선왕비가 내미는 책을 건네어 받으며, 동요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순간 손에서 힘이 빠지며 책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선왕비의 분위기가 달라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클로티 부인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싶은 발끝에 힘을 주어 똑바로 섰다. 그러나 방 내부의 온도가 바깥처럼 차게 식는 기분이 들고,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날 똑바로 봐.”

선왕비가 명령했다. 클로티 부인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시 얘기해.”

자신을 직시하는 날이 서린 새파란 눈동자. 옅은 물기가 어린 것 같은 로비엔의 푸른 눈과는 확연히 달랐다. 모두가 모른다는 것이 이상할 만큼 분명한 차이였다.

저와 닮은 곳이 한구석도 없기에 그토록 싫어하였나?

클로티 부인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홀린 듯 붙잡힌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 클로티 부인이 멍청하게 자리를 지키고 섰다.

“그대가 나를 봐 온 시간만큼, 나도 그대를 알아. 거짓말을 할 때는 사람 시선을 마주치질 못하고, 자꾸 손을 감추지.”

아. 클로티 부인이 행동을 멈추었다. 손끝까지 힘을 주고 버텨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실수였다.

“똑바로 말해.”

쐐기를 박듯 묻는 목소리에는 도저히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시선을 돌릴 수도 없고, 손을 감출 수도 없었으니까. 힘이 풀려 달달 떨리는 손이 허공으로 툭 떨어져 드레스 치마 옆에 놓였다.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대답이었다.

“그땐 잘 숨겼구나. 그때도 이런 꼴을 하고 있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을 텐데.”

“…….”

“기껏 내 사람으로 살 기회를 주었더니, 감히 나를 배신해?”

선왕비의 얼굴에 비틀린 웃음이 선명히 떠올랐다.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처럼 보였다. 클로티 부인은 선왕비가 가까워지는 만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당, 당신도 나를 배신했잖아.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죽으라고 했잖아!”

클로티 부인이 더듬더듬 자신의 행동을 변명했다. 등에 벽이 부딪쳤다.

“폐하께서 잘못한 게 뭐가 있어!”

끝이야.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자, 본심이 튀어나왔다.

“당신이 스스로 제 밑에 들이겠다고 했잖아.”

사생아라는 오명은 귀족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일이었다. 그러나 그를 뻐꾸기 새끼로 길러 낸 것은 선왕비,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그 아이 왕이 되게 해 주겠다고, 왕비의 아들로 둔갑시켜 정통성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던 건 당신이었잖아.”

“가장 행복한 순간에 지옥으로 떨어뜨릴 생각이었으니까!”

선왕비가 불에 덴 것처럼 얼굴을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정통성 있는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 평온하게 왕위를 물려받고, 꾸린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 심장에 칼을 찔러 넣을 생각이었으니까.”

“…….”

“너는 사실 그 천한 정부의 아들이고, 정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하찮은 사생아일 뿐이니 이대로 죽어 없어지는 게 맞다고. 고통스럽게 죽어 갈 때 얘기해 주고 싶었으니까.”

그 영혼까지 부수어 버리고 싶었다. 왕족이라는 그 고고한 자존심과 알량한 우월감, 그리고 명예 한 자락 움켜쥐지 못하고 시간과 바람에 휩쓸려 가 버리도록. 그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끔찍한 절망과 고통 뿐이기를 바랐다.

선왕비가 토해 내는 어둑한 진심에 클로티 부인이 말을 잃었다. 그녀에게서 언젠가 남편의 배신을 깨닫고 울음과 절망을 서럽게 토해내던 어린 날 줄리 피베체의 모습이 보였다.

“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망쳤구나.”

선왕비가 선득한 눈으로 클로티 부인을 직시했다. 역시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다는 의미가 선명하게 담긴 눈동자에는 적의가 넘실거렸다.

뻗어 온 두 손이 클로티 부인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내가 왜 그때 너를 버리고 죽이려고 했는지 아니?”

선왕비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언제 목을 조일지 몰라 두려움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클로티 부인이 희게 질린 얼굴로 발발 떨었다.

“네가 그 애를 사랑해서야.”

“…….”

“내가 어떤 절망을 겪었는지 알면서도 그 천한 핏줄을 사랑해?”

감히.

클로티 부인의 목을 쥔 선왕비의 손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웃는 얼굴과는 다른 힘이었다.

“그래서 언젠간 네가 내 일을 망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선왕비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클로티 부인을 압도했다.

“사랑, 사랑, 그놈의 사랑! 도대체 그게 뭐라고!”

클로티 부인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혹은 박제되어 고정된 나비처럼 벽에 고정되었다. 선왕비의 손길은 착실히 숨통을 조여 왔다.

“알량한 동정심에 그래도 거두었더니, 돌아온 것이 배신이라니.”

거짓말. 클로티 부인은 선왕비가 동정심이나 선의 따위로 자신을 거둔 것이 아닌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그때 로비엔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몰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선왕비는 가장 극적인 순간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손을 무는 개는 죽어야지.”

“끅, 끄흑.”

클로티 부인이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양쪽으로 저어 댔다. 대체 그 가느다란 팔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선왕비는 그 격렬한 반항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점차 희미해졌다. 클로티 부인의 버둥거림이 서서히 약해져 갔다.

“선왕비 폐하, 국왕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가 손아귀에 실었던 힘을 삐끗하게 했다.

클로티 부인이 녹아내리는 크림처럼 벽에 기대어 허물어졌다. 바닥을 기어 도망가면서 모자란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몰골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이라 할 만했다.

“네가 한 번 살려 준 목숨이라, 네 목숨도 한 번 구해 주는 모양이구나.”

선왕비가 비아냥거렸다.

클로티 부인은 두 팔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저 희뿌연 시야에 눈물만 가득 차 흐려져 있었다.

선왕비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굽혀 바닥에 앉아, 클로티 부인의 턱을 들어 올렸다.

“기다리고 있으렴.”

“…….”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목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왕을 향한 역심을 들킨 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태연한 얼굴로 선왕비가 클로티 부인의 턱을 놓아주었다.

저를 지나치는 선왕비의 걸음 뒤로 남겨진 클로티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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