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책상 아래로 드러난 드레스 자락을 물끄러미 보던 사내의 몸이 점차 낮아졌다. 마침내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로잘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끔찍할 정도로 짧지만 긴 순간. 사내의 구둣발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로잘린이 고장 난 목각 인형처럼 천천히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아.”
안도감으로 재차 눈앞이 희뿌옇게 번졌다.
무척이나 피로한 듯 다소 검어진 눈 밑과 부르튼 입술. 옷도 지저분하고,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썼지만 바래지 않은 아름다움.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 로잘린의 남자였다.
“로잘린.”
로비엔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로잘린은 공포가 가시지 않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테이블 밑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손바닥 아래에 닿은, 내내 바깥 공기에 드러났을 옷은 차디찼다. 그러나 그 옷 아래의 몸은 내내 달려온 듯 불처럼 뜨거웠다.
로잘린은 그의 팔을 짚은 손을 더듬더듬 들어 올려 그 목을 끌어안았다.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자신을 안심하게 해 달라며 매달렸다.
“돌아오실 줄, 알고, 알고 있었…….”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로비엔이라면, 그라면 어떤 모습으로든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 마음에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한갓 불안이 깃들어 있었을 리가 없는데도.
“근데 왜 울어.”
그토록 그리워했던, 다정하지만 편안한 목소리. 로잘린이 흐윽, 숨을 들이켜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상황이 장난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그보다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이는 안도감이 더 컸다.
로잘린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바닥에 앉은 로비엔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내의 몸을 규칙적으로 다독이는 로비엔의 손도 사실 떨리고 있었다.
“오래, 오래 걸렸잖아요.”
로잘린이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울먹였다. 그의 어깨너머, 드러난 로잘린의 얼굴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무서웠는데,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미안해요.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그 마음을 안다고, 로비엔이 나직이 속삭이며 로잘린을 끌어안았다.
상대를 잃을까 불안했던 것은 그도 매한가지였다. 로비엔이 장난기를 거두고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에, 귀에, 보드라운 목덜미에 짧게 입맞춤을 남겼다. 로잘린을 으스러트릴 것처럼 끌어안은 양팔에 힘을 주었다.
꼬박 하루가량을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 막 저택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노력에 돌아온 것이 저택 앞에서 쓰러진 사병들과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열린 문 너머로 불어온 스산함이라니. 심장이 내려앉았던 그 순간이 여전히 선명했다.
말에서 뛰어내려 계단을 올라가면서, 제발 이 저택 안에 여전히 로잘린이 머무르고 있기만을 바랐다. 여태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무엇을 원한 바가 없었을 만큼.
“그래도 비겁하게 도망치고, 피하고, 살아서 여기 왔어요.”
그리하여 무사한 로잘린을 마주할 수 있었다. 모두가 말리는 순간에도, 휴식을 조금만 취하라는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말을 몰아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비께서 명령하셨으니까.”
배신감으로라도 살아야 한다던 로잘린의 명은 그의 삶에 당위성이 되었다.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는, 로잘린이 강요한 약속은 그의 목적이 되었다.
로비엔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안 그랬으면 거기서 죽었을 거잖아요.”
“…….”
“내가, 내가 여기 있는데도.”
로잘린이 로비엔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느슨히 풀고, 몸을 뒤로 물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동자에 원망이 서리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하는 미인을 바라보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흔적 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폐하가 비겁자라도 좋아요.”
그런 원망에 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너무 짧은 것 같았으므로. 바로 직전까지도 그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이 한이 될 것 같아 후회하지 않았던가.
“그런 비겁함까지도 사랑하니까.”
마주친 눈이 놀람으로 크게 벌어졌다. 로잘린이 작게 미소 지었다.
“책상 밑에 숨어서 계속 후회했어요.”
“…….”
“한 번이라도 말해 줄 것을.”
로잘린이 언젠가처럼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때와는 달리 마른 피부에 닿은 손이 격정적인 감정에 떨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없는 순간이 와도, 당신이 혼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고 싶었어요.”
“……로잘린.”
로비엔이 잠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이마, 부드러운 곡선에 입을 맞추었다. 땀과 흙이 뒤섞인 냄새가 났다.
“좋아해요.”
입술은 점점이 내려와 눈두덩이에…….
“내가 많이…….”
로비엔의 높은 코끝에…….
“사랑해.”
마지막으로 거친 입술에 닿았다.
끈적임 없는 입맞춤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자신이 들은 고백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로잘린이 반쯤 울먹이며 웃었다.
어쩌면 잘못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가장 높은 자와 낮은 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지닌 사람들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일지 의문을 가졌던 것도 그리 오래전의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에 자꾸만 의심을 품었다.
아이를 잃고서야, 돌고 돌아 확인받은 그의 마음에도 혹시나 하는 불안으로 마음을 졸였다. 그의 고백에도 섣불리 사랑한다는 답으로 보답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로잘린.”
“…….”
“방금, 뭐라고…… 뭐라고 했어요?”
로비엔이 여전히 제 턱과 볼에 닿아 있는 로잘린의 손을 낚아채며 물었다. 눈을 뜨고 코를 베이기라도 한 듯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어요.”
로잘린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한번 고백했다.
“이렇게 엉망으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당신이어도.”
고백을 토해 내는 사람의 마음도, 오롯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도 풍랑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요동쳤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
아직도 얼굴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주제에 복사꽃처럼 터뜨리는 망울진 웃음. 그가 한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던, 생기있는 얼굴과 화사한 미소.
언젠가는 평생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불안하게, 그리고 음울하게 만들던 얄궂은 사랑. 그러나 그것이 이미 그의 손안에 들려 있었다. 움켜쥔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가지도, 도망갈 것처럼 파닥거리지도 않은 채.
기묘한 일이었다. 연이은 고백을 듣고서도 로비엔의 심장은 여전히 불안을 호소하고 있었다. 직전까지의 위태로운 상황들이 초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심장에 늘 늘쩍지근하게 달라붙어 있던 것에 가까웠다.
“언제부터?”
그가 늘 속고 살아 의심부터 하고 보는 사람처럼 질문했다.
“그건 저도 몰라요. 폐하께선 알고 계세요?”
로잘린이 되물었다. 그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도 함께였다.
“아마 처음부터. 사랑은 불완전하고, 그에 의탁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순간부터.”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러면 자유로워서 아름다운 이 여자가 언젠가 이 사랑은 불완전하다며 떠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왕비처럼 그의 지위에 의탁해 살아가야 하는 자리는 싫다며 버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요?”
로비엔이 이제는 눈물이 말라 버린 로잘린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로잘린의 시선이 그의 손을, 팔을 따라 움직여 마침내 얼굴에서 멈추었다.
“네.”
로잘린이 짧게 대답했다. 호수에 돌을 던진 듯 잘게 파동이 이는 물빛 눈동자가 토해 내는 실망을 보고서도 그리 단호하게. 당신은 나를 영원히, 그리고 전부 소유할 수는 없다고.
“저는 아직도 이 두 발로 서는 방법을 잊고 싶지 않아요. 무섭거든요.”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어진 뜻밖의 대답에 그 실망도 몸을 숨겼다. 대신 불쑥 몸을 드러낸 것은 호기심이었다.
왜? 입 밖으로 질문을 내뱉기도 전에 로잘린이 말을 이어 갔다.
“사랑하는 이 마음과는 별개로 늘 불안할 것을 아니까요.”
지금은 나를 사랑한다는 이 목소리가, 끌어안아 주는 다정한 품이 변하는 그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그에서 발로한 의심.
“언젠가는 드센 내가 싫다고 하지 않을까? 모든 감정이 착각이었다고 하지 않을까? 마음이 변했다고 하지 않을까? 언젠가 이름 모를 여자를 데려와 정부로 삼겠다고 하지 않을까?”
“말도 안…….”
로비엔이 말을 끊기 전, 로잘린이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나만 홀로 남겨 둔 채 떠나면? 이 사랑이 기어코 나를 절름발이로 만들면 어떡하지?”
끝이 날카로운 불안의 조각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었다. 햇빛 아래, 형체의 뒤로 늘어지는 검은 그림자처럼.
“폐하께서 저를 전부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저도 폐하를 전부 소유할 수 없어요.”
로잘린이 로비엔의 입을 가린 제 손가락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아무리 한 몸이고 싶어도 한 몸이 아니니까.”
로비엔의 시선이 한층 가까워진 로잘린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래도 이 마음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어째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당신에게 기대고 싶으니까. 당신을 다 가지고 싶으니까.”
불안과 공포를 준대도 부나방처럼 달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로잘린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타인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앞면과 보이지 않는 뒷면.
그제야 알았다.
사랑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서 전해 들었던 것처럼 아름답고 선명한 감정만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가 나를 떠나지 않을지,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을지, 불안해하고 미련을 떨며 집착하는 추접스러운 감정과 마땅한 서러움을 동반한다는 것 역시.
“비의 말이 다 맞아요.”
로비엔이 제 입을 가린 로잘린의 손을 거두어 내며 긍정했다.
“내 사랑도 그래.”
이 불안마저도 감수하고 싶은 처절한 감정. 그러니 사랑인 것이다.
로비엔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로잘린의 입술을 덮어 가렸다. 언젠가 입 맞추고 싶었어도 망설이며 흘려보냈던 순간을 되돌리듯이. 그때였다면 그를 밀어냈을 로잘린이 두 팔을 뻗어 로비엔의 목을 그러안았다.
몸을 겹치던 순간처럼 갈급하게, 혹은 농염하게 깊어지는 입맞춤에 몸이 자꾸만 뒤로 기울었다. 숨을 나누고, 체온을 나누며, 품 안의 온기에 기대어 바닥으로 무너졌다.
타액에 젖어 이제는 부드럽게 느껴지는 로비엔의 입술을 밀어내며, 로잘린이 웃었다. 이 왕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지저분한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상황이 우스웠다.
“이제 돌아가요.”
뜻을 알아챈 로비엔이 아쉬운 듯 먼저 몸을 일으키고, 로잘린을 당겨 안아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이토록 지체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치러야 할 일이 많았다. 이겨 내야 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잡은 손에 느껴지는 온기가 있어,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